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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가 많은 편지 ㅣ 총총 시리즈
슬릭.이랑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먼저 구입한 책부터 읽다 보니 신간을 나중에야 읽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제부터는 가급적이면 최근에 산 책부터 읽는 습관을 들여보려고 한다. 그래서 고른 책이 이 책, 뮤지션 슬릭과 이랑이 공저한 <괄호가 많은 편지>이다.
슬릭은 몇 해 전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를 통해 알게 되었고, 이랑은 그보다 전에 모 독립출판물 전시회에 갔다가 그곳에서 본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둘 다 본업인 음악이 아니라 다른 활동을 통해 알게 된 경우인데, 나중에 음원사이트를 통해 이들의 음악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만 해도 아이돌 노래 외에는 한국 대중가요를 거의 듣지 않았던 내게는 회사에 의해 기획되지도 않고, 대중의 취향에 전적으로 맞추지도 않은 이들의 음악이 생경하지만 멋있게 느껴졌다.
그래서 슬릭과 이랑이 공저한 책이 나온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심지어 두 분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형식이라고 해서 더욱 기대가 되었다. 웹진 연재 당시에는 읽지 않고 이번에 처음 읽었는데 역시 좋았다. 서로를 무슨 호칭으로 부를 것인지, 언제 어디서 주로 작업하는지, 작업하지 않는 시간에는 무엇을 하는지 등등에 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들의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가령 슬릭은 룸메이트가 데려온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살고 있는데, 이중 '또둑'이라는 고양이를 잃어버렸을 때 서울이라는 도시가 얼마나 동물들에게 안 좋은 환경인지 새삼 알게 되었다. 나아가 그는 동물에게 해가 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고기를 먹지 않고(슬릭은 비건이다), 주변에 비건/동물권/환경 관련 다큐멘터리를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이랑은 임신중절 수술을 받았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시 그는 대학생이었고 단편영화 연출을 앞두고 있어서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수술은 그전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것과 전혀 달랐다. 몸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낙태죄 폐지가 이슈화되었을 때 이랑은 자신의 SNS를 통해 임신중절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고 고백했지만,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는 언론의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다. 개인의 경험을 언론이 어떤 식으로 왜곡하는지, 대중이 어떤 식으로 재단하고 폄훼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이들은 표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인데도 표현이 두렵고 어렵다고 말한다. 표현 자체가 두렵고 어렵다기보다는 표현에 뒤따르는 평가와 비난, 질책 등이 두렵고 어려운 게 아닐까 싶다. 언젠가 슬릭은 <영혼의 노숙자>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만 명 이상의 평가를 받아본 역사가 없고, 그걸 감당할 수 있게 진화되지 않았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인디 뮤지션으로서, 비건으로서, 페미니스트로서 공적으로 발언하고 창작하는 두 분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