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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동안 이백 여 권의 책을 읽었다. 읽은 책의 목록을 보니 어려운 책, 깊이 사유하며 읽어야 할 책보다는 쉬운 책, 금방 읽을 수 가벼운 책이 대부분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새해 목표는 책 '느리게 읽기'로 정했다. 천천히, 깊이 사유하며 읽고 싶은 책을 선별해 일정 분량을 읽고, 기억하고 싶은 문장은 따로 서재에 적어두고 코멘트를 달 셈이다.


첫 번째 책으로 리영희 선생의 평론집 <전환시대의 논리>를 골랐다. 오래 전에 사서 책장에 꽂아두기만 하고 읽지는 않았다. 이 책의 초판은 1974년에 나왔다. 책에 실린 글은 대부분 베트남 전쟁 직후, 닉슨 대통령 방중 전후에 쓰였다. 지금으로부터 43년 전에 나온 책임에도 불구하고 글이 주는 의미는 크다. 특히 맨 처음에 실린 '강요된 권위와 언론자유'라는 제목의 글은 최근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리영희 선생이 한참 전에 내다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시의적절하다.


옷을 입지 않은 임금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한 소년의 우화는 그 소년의 순진함이나 용기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략) 그 보이지 않는 비단옷이라는 것을 팔러온 형제 상인은 어째서 그토록 맹랑한 술책이 먹혀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임금에게 있지도 않은 옷을 입혀놓고 아름답다고 한 임금 측근자들의 이해관계는 어디를 향해 있던 것일까. 임금이란 으레 아첨배에 속게 마련인 것일까. 그리고 옷을 걸치지 않고서도 입었다고 우기는 '통치자의 진리와 권위'는 임금의 것인가 측근 아첨배의 것일까. 이와 같은 '허구와 허위'는 통치자들의 속성이어야 하는가. 허위가 진리의 가면을 쓰고 나타날 수 있는 그 사회의 제도와 풍토는 어떤 것일까. 그 많은 백성들 가운데 임금의 알몸뚱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 왜 모두들 입을 다물고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또는 못했을까. (13~14쪽)


'옷을 걸치지 않고서도 입었다고 우기는 임금', '보이지 않는 비단옷이라는 것을 팔러온 형제 상인', '임금에게 있지도 않은 옷을 입혀놓고 아름답다고 한 임금 측근자'와 같은 비유를 보고 떠오르는 얼굴이 몇 있다. 저자는 이들이 만들어낸 '허구와 허위'를 규탄하는 동시에 그 '허구와 허위'를 보고도 못 본 척한 수많은 백성들의 잘못도 질책한다. 백성들의 눈에 임금님의 알몸이 보이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 왜 백성들은 소년이 사실을 말하기 전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을까. 저자는 알렉시스 토크빌이 남긴 "문제는 법적 구조보다도 정치의 내면정신에 있다"라는 말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이와같이 위기에서 되살아날 수 있는 하나의 사회의 내면적 자질에 관해서 또끄빌은 "문제는 법적 구조보다도 정치의 내면정신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월남전쟁 비밀문서를 에워싸고 일어난 미국 내의 사태는 법적 구조의 굳건함과 아울러 정치의 내적 정신의 건전함도 입증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국가나 국민의 생활원리가 되어주는 일반적 정치의 내적 정신이 건전하지 못할 때 법적 구조의 건전이란 기대하기 어렵다. (17쪽)

한 작품의 해피 엔딩은 과정의 줄거리가 가열찰수록 더욱 행복하게 느껴진다. 고뇌와 비참과 과오가 아무리 처절했어도 종말이 행복하면 그 과정은 그것으로 잊혀진다. (중략) 그러나 해피 엔딩으로써 슬펐던 과정을 잊을 수 있는 것은 관객의 경우다. 슬픔을 겪은 주인공은 종말의 행복보다도 불행했던 과정에서 잃어버린 가치를 아쉬워하게 마련이다. 그 차이는 불행을 체험한 사람과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의 위치의 차이이다. (19쪽)


저자는 옷을 입지 않은 임금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내려면 '관객'의 입장에서 벗어나 '당사자'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최근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 가장 크게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은 '당사자'였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하루에 몇 개씩 알바를 뛰고 치열하게 공부해서 학점을 따는 대학생들이 학교 행정에 의혹을 제기하고 학점 문제를 들춰낸 것이 시작이었다. 


대통령이 수감되고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는 것이 이들에게 '해피엔딩'일까. 그야 '새드엔딩'보다는 낫겠지만, 교수에게 속고 학교에 배신당한 상처는 학생들의 마음에서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사태를 바라보는 관객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가 당사자임을 깨달은 것,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밝힌 것 또한 그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기억이 하나둘 쌓이고 합해질 때 비로소 정치의 내적 정신이 건전해지고 법적 구조도 굳건해진다.


소위 국가기밀이나 국가이익이라는 것이 민주사회의 국민을 시종일관 기만하는 정부체제와 세력에 의해서 이용될 때 그 집권자와 집권세력의 기만을 폭로하는 것 이상으로 애국적인 행위는 있을 수 없다. 지성인의 최고의 덕성은 인식과 실천을 결부시킨다는 것이다. (26쪽)

비난받아야 할 일은 엘즈버그 박사가 허위의 커튼을 활짝 열어젖힌 극적인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비난받아야 할 것은 그 장막의 뒤에서 이루어져온 일들, 음모에 관한 모든 진상을 알고 있으면서도 눈치를 살피거나 그에 방조하거나 갈피를 못 잡거나 침묵했을 뿐 그것을 밝혀내려 하지 않은 사람들의 행동이다. 진실로 놀라운 것은 엘즈버그와 같은 고위관료들 속에서 더 많은 엘즈버그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뉴욕타임즈 위클리> 7월 18일) (27쪽)


당사자임을 인정하지 않고 관객에 머무른 죄는 그 주체가 관료, 언론인, 지식인일 때 더욱 무겁다. 저자는 월남정책의 수립을 위한 조사연구를 시작으로 정책수급과정에서는 핵심적 지위에 올랐다가 기밀문서를 전 세계에 폭로한 다니엘 엘즈버그의 공을 높이 치하한다. 엘즈버그의 행동에 대해 미국 내 우익적 여론과 군부에서는 비난과 인신공격, 중상이 쏟아졌지만, 저자는 그의 폭로가 국가기밀이나 국가이익을 수호하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일이었다고 평가한다. 


누가 문제를 폭로하면 폭로한 문제를 보지 않고 폭로 자체의 선정성과 유해성에만 집중한 예는 너무나 많다. 폭로한 자가 관료, 언론인, 지식인일 때는 공무원의 의무, 언론인의 윤리, 지식인의 소명을 들먹이며 문제의 본질을 가린다. 개별 사건만 보면 찬성측과 반대측의 논리가 팽팽하게 맞서는 난제로 보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너무나 쉬운 문제다. 이를테면 잘못을 묻는 사람들에게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잘못을 묻는 행위 자체를 죄로 만드는 사람들. 이런 방식으로 몇십 년에 걸쳐 권력을 농단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한 사람들. 그들의 이름과 민낯을 뻔히 알면서도 입을 닫고 있는 사람들. 


미국의 반지성, 반이성주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최대의 반공 활동을 한 사람도 안전할 수가 없었다. 1953년 10월 당시의 검찰총장(법무장관)은 전 대통령 트루먼이 소련의 간첩을 은닉했다고 주장, 정식으로 고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로즈벨트, 아이젠하워, 케네디 등에 대해서도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이 나왔고 얼마 전까지도 미국의 지적 풍토 속에서 웬만한 학자, 작가, 교수, 기자들은 추방되거나 침묵을 강요당하지 않으면 어용으로 화했다. 이것이 <뉴욕타임즈>와 같이 훌륭한 언론기관을 가지면서도 미국 내에 진정한 사상의 자유와 비판의 자유가 존재할 수 없게 됐던 경위의 일부다. 위대한 반공주의자 매카시는 10년 후 미국사회의 분해를 초래한 셈이다. (36쪽)

정부의 독선과 비밀주의는 국민 전반의 성격과 지식을 변칙적일 만큼 약화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독선과 비밀주의는 본래 사회를 위해서 이용될 수 있을 국민의 정력과 능력의 광범한 해방을 저해한다. 또 모든 권력이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있을 때 당연한 결과로서 다수의 욕구, 견해, 필요, 복지가 버림을 받는다. 이 두가지 결과는 사회의 손실일 수밖에 없다. (46쪽)


'웬만한 학자, 작가, 교수, 기자들은 추방되거나 침묵을 강요당하지 않으면 어용으로 화했다.' 국정 교과서, 문화예술인 블랙 리스트 사건이 떠오른다. 대부분의 문화예술인이 블랙리스트에 오르자 관련 지원 사업들을 아예 폐지했다는 웃지 못할 뉴스도 생각난다. '모든 권력이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있을 때 당연한 결과로서 다수의 욕구, 견해, 필요, 복지가 버림을 받는다.' 지난 두 정권 동안 대한민국 일반 국민들의 생활 수준과 복지 혜택은 얼마나 저하되었던가. 그것은 과연 우리의 '노오력'이 부족해서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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