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여자 1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근현대사에 무지한 사람도 박헌영이나 김원봉, 여운형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 항일운동을 하고 해방공간을 누볐던 주세죽, 허정숙, 고명숙 - 이 세 여자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조선희의 소설 <세 여자>를 읽기 전에는 나 역시 이들의 이름을 전혀 알지 못했다. 


소설은 표지에 실린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다. 사진이 찍힌 건 한일 강제병합으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20년대. 당시로선 드물게 머리를 짧게 자른 세 여자가 청계천 개울물에 맨발을 담그고 있다. 사진의 주인공은 박헌영의 첫 번째 아내 주세죽과 북한의 초대 문화선전상 허정숙, 조선공산당원 고명자. 작가는 한소 수교가 이루어진 이듬해인 1991년에 박헌영과 주세죽의 딸 비비안나 박을 만나 이 사진을 처음 보았고, 사진 속 주인공 중 하나인 허정숙의 생애를 들여다보다가 이 소설을 구상했다. 


1920년 상해. 함흥 출신의 음대생 주세죽과 경성 제일의 변호사 허헌의 딸 허정숙이 만나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이들은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청년동맹을 이끌던 박헌영과 임원근, 김단야를 만나고, 얼마 후 주세죽은 박헌영, 허정숙은 임원근과 사랑에 빠져 혼인을 한다. 몇 년 후 귀국한 허정숙은 사회주의 여성운동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결성하고 여기에 고명자가 가입한다. '조선공산당의 여성 트로이카'로 불리던 세 여자는 혁명도 사랑도 순탄하게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일제가 조선 내 공산주의자를 가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운명 또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휘말려 짓밟히고 찢긴다. 


이 소설은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의 한국 근현대사, 그중에서도 한국 공산주의운동사를 촘촘히 따라간다. 고려공산당이니 신흥청년동맹이니 여성동우회니 하는 이름은 낯설고 어렵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학창 시절 한국 근현대사 시간에 배운 신간회나 근우회, 건국준비위원회, 남북협상 등이 세 여자의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자연스럽게 한국 근현대사에 대해 공부하고 이러한 사건들의 배후 내지는 속사정에 대해 알 수 있었다(한국사, 특히 한국 근현대사 공부하시는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합니다). 



나는 가끔 이 남자들하고 혁명을 하는 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어. 

다들 <자본론> 대신 <사서삼경>을 읽은 모양이야. (1권, 378쪽) 


이 소설은 한국 근현대사의 일부를 재구성한 '역사 소설'인 동시에, 여성의 존재와 역할을 고찰한 '여성 소설'이기도 하다. 주세죽과 허정숙, 고명자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항일운동에 투신했고,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동등한 역할을 해내고자 했다. 하지만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이 직접 총칼을 들고 싸우기보다 집안에서 운동가들을 재우고 먹이는 역할을 담당하길 바랐고, 고명자는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사랑한 남자인 임단야에게 (그의 존재 이유인) 혁명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오직 허정숙만이 남성 동지들이 여자는 밥 짓고 빨래나 하라고 할 때마다 단호히 거부했고, 남편조차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떠났다. 이로 인해 허정숙은 당대의 요부 취급을 받았으나, 결과적으로 그러한 삶의 태도가 북한 내에서 숙청의 바람이 불 때마다 허정숙을 살렸다. 


외동딸이 공산주의에 빠지고 항일운동을 하는데도 말리기는커녕 한 배를 탄, 허정숙의 아버지 허헌도 인상적이었다. 조선인 최초로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변호사가 된 허헌은 좌파와 우파를 아우르는 당대의 지식인이자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가를 후원하는 독지가였다. 아시아 전역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 꿈의 나라와도 같았던 스탈린 이전 소비에트 연방의 사회상도 놀라웠다. 1930년대에 이미 아이를 낳으면 국가가 보육원에서 책임지고 키워주고, 남자든 여자든 평등하게 사회 활동을 할 수 있었다니. 이런 사회를 목격하고 체험한 세 여자가 조선으로 귀국한 이후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을까. 이런 사회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했던 조선의 대다수 여성들의 삶은 얼마나 또 비참했을까. 수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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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3-26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읽는다고 해 놓고 못 읽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꼭 읽어봐야겠슴다.ㅠ

키치 2018-03-26 18:22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이제야 겨우 읽었는데 넘 재밌더라고요 ㅎㅎ
밤잠을 잊고 후다닥 읽었습니다. stella.K님께도 그런 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