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루티드
나오미 노빅 지음, 오정아 옮김 / 노블마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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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린 시절, 책이란 책은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지만 여자아이들이 즐겨 읽는 동화 책은 손길이 가지 않았다. 무도회에서 함께 신나게 춤을 췄으면서 왕자가 찾으러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는 신데렐라. 자기를 미워하는 왕비한테 찍소리 한 번 못하고 쫓겨나는 백설공주. 물레 한 번 잘못 만진 게 뭐라고 세월아 네월아 잠만 자는 숲속의 공주. 왜 이들은 자기 힘으로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지 않을까. 왜 바보같이 기다리고 쫓겨나고 잠만 잘까. 전부 다 답답했다. 누구 하나 닮고 싶지 않았다. 


나오미 노빅의 신작 <업루티드>의 아그니에슈카는 이들과 다르다. 일단 공주가 아니고 예쁘지 않고 착하지 않다. 십 년에 한 번 드래곤이 성에서 나와 그 해에 열일곱 살이 된 소녀를 잡아간다는 전설이 있고, 마침 올해가 드래곤이 성에서 나온다는 그 해이지만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아그니에슈카가 드래곤이라면 마을 최고의 미인이자 성격도 착하고 지성까지 갖춘 단짝 친구 카시아를 데려가지 잘난 구석 하나 없는 자신을 데려갈 리 없다. 나는 잠자코 있다가 카시아가 떠나면 멋진 남자 만나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렇게 살면 된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때 아그니에슈카의 예상을 뒤엎는 사건이 발생한다. 성에서 나온 드래곤이 카시아가 아니라 아그니에슈카를 선택한 것이다. 드래곤의 성에 끌려간 아그니에슈카는 드래곤이 자신을 겁탈하거나 죽일 거라고 짐작해 잔뜩 겁을 먹는다. 드래곤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시키지도 않은 식사 준비까지 하는데 드래곤은 도리어 밥 지을 시간이 있으면 마법이나 연습하라고 화를 낸다. 그때부터 드래곤은 아그니에슈카에게 마법 공부를 시키는데, 아그니에슈카는 마법 책 읽는 것도 싫고 주문 외우는 것도 싫다. 마을에서 카시아를 데려와 자기 자리에 앉히고, 자신은 마을에 돌아가 예전처럼 살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드래곤의 성에 마렉 왕자가 찾아온다. 잘 생기고 늠름하고 성격까지 좋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마렉 왕자는, 알고 보니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난봉꾼이었다.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인 아그니에슈카에게도 손을 뻗었다. 아그니에슈카는 왕국 전체가 칭송하는 마렉 왕자가 실은 나쁜 사람이고, 악명을 떨치는 드래곤이 실은 좋은 사람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아그니에슈카는 드래곤에게 키스하고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 하는 게 아니라 이제부터 진정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 번 들어가면 영영 돌아오지 못하거나 미치광이가 된다는 소문이 퍼진 '우드'와 이를 둘러싼 왕국과 이웃 나라 사이의 갈등, 왕권을 빼앗으려 하는 세력, 이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십 년에 한 번씩 여자아이를 납치하며 악명을 쌓는 드래곤, 드래곤에게 순순히 여자아이를 바치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지를 뻗고 잎사귀를 펼친다. 


아그니에슈카를 성에 데려오고 마법 교육을 시킨 건 드래곤이지만,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마법을 터득하고 마법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건 아그니에슈카 자신이다. 드래곤도 익히지 못한 야가의 주문을 저절로 습득한 아그니에슈카는 오랜 친구이자 마음의 빚을 진 상대인 카시아의 목숨을 구하고, 우드와 드래곤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오해를 푼다. 왕실 내의 암투와 거대한 전쟁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우드의 정체도 밝힌다. 사람들을 오염시키는 건 우드가 아니라, 진실을 외면하고 잘못된 관습을 무조건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 그 자체라는 것도 만천하에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드래곤이 납치한 힘없는 소녀에 불과했던 아그니에슈카는 모든 사건을 주도하고 해결하는 강력한 영웅으로 성장한다. 


아그니에슈카는 기존의 동화나 판타지 문학에 등장해온 여성상을 뒤엎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그니에슈카는 드래곤의 성에 갇혀 왕자가 자신을 찾으러 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왕자가 되어 위기에 빠진 카시아을 구출한다. 하룻밤 사이에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의 운명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개척한다. 문제가 생기면 누가 풀어줄 때까지 버티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나선다. 사랑에는 대체로 적극적이지만 신중해야 할 때는 신중하다. 이렇게 멋진 여성 주인공은 예전에도 지금도 본 적이 없다. 


더욱 마음에 드는 건, 아그니에슈카가 처음부터 남과 다른 존재가 아니라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르고 주어진 삶에 의문을 품지 않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아그니에슈카는 집에서나 마을에서나 평범한 여자애에 불과했지만 살던 곳에서 벗어나자 누구보다 강력하고 재능 있는 마법사로 성장한다. 다른 여자들처럼 시집가고 아이 낳고 평범하게 살기를 꿈꿨지만 마법사의 재능을 발견하자 그 어떤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해내지 못했던 일들을 척척해낸다. 이러한 전개가 독자들(특히 여성)의 인생관은 물론 기존 판타지 문학의 여성상을 '뿌리째 뒤엎는(uproot)' 결과로 이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받은 감동이 부디 다른 독자들에도 전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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