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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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엄마는 "네 친구 누구가 아들을 낳았다더라~"로 시작하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엄마는 바란다. 내가 내 동년배들처럼 평범하게 시집가서 아이 낳고 전업주부가 되기를. 내 친구들이 울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임신 후유증에 시달리고 독박 육아의 고통을 호소한다는 얘기에는 관심 없다. 여자 팔자가 다 그런 거야. 그런 게 여자의 행복이야. 엄마가 늘 덧붙이는 말이다. 


그런 엄마에게 <82년생 김지영>을 드렸다. 얼마 전 <정글만리>를 다 읽었다고 하시길래 이것도 읽어보시라고 슬쩍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정글만리>를 읽으실 때만 해도 나를 볼 때마다 "정글만리에 나왔는데, 중국은 말야~"로 시작하는 일장연설을 늘어놓으셨는데, <82년생 김지영>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걸까. 아니면 책을 읽은 감상이 아직 말로 정리되지 않은 걸까.


59년생인 엄마에게는 82년생 김지영의 삶조차 부러울지 모른다. 엄마는 장남인 오빠와 어린 동생들 때문에 어머니(나에게는 외할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에 지금까지도 시달리고 계신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바로 취업했으며, 월급은 전부 부모님께 드렸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었고(키워준 대가라고 하셨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월급을 드린 줄조차 몰랐다(알고 나서도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으셨다). 


엄마는 결혼 후 딸만 둘을 낳았다. 시댁 식구들은 첫 딸인 나를 낳았을 때만 해도 '큰 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했지만, 둘째마저 딸이자 아들을 왜 못 낳냐, 아들 낳는 수술이 있다더라, 마을에서 아들 잘 낳는 여자를 데려오겠다 등등의 발언으로 엄마를 모욕했다. 셋째가 들어섰지만 그 또한 딸인 것 같아서 엄마는 임신중절을 했다. 


엄마의 삶은 김지영의 어머니의 삶과 비슷하다. 김지영의 어머니 또한 딸 둘을 내리 낳고 시댁으로부터 갖은 구박을 들었고, 김지영의 동생을 임신했을 때 딸인 것 같아서 임신중절을 했다. 남편 수입으로 식구들을 건사하기가 힘들어서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각종 부업을 했고, 평생 임시직, 비정규직을 전전했지만 정규직이었던 적은 없어서 직업란에는 늘 전업주부라고 썼다. 


나의 삶은 김지영의 삶과 비슷하다. 어릴 때부터 딸은 출가외인 소리를 들은 것도, 그래서 단 한 번도 조부모, 외조부모로부터 따뜻한 대접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것도 같다. 공학에 다닐 때는 남학생들의 들러리 취급 당했고, 여고에 다닐 때는 조신하게 굴어라, 현모양처가 되어라 같은 시대착오적인 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페미니즘을 알기 전이라서, 여자는 응당 그런 취급을 당하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나의 삶과 김지영의 삶이 갈라지는 부분은 결혼이다. 나와 달리 김지영은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억지로 그만둔 것도 서러운데, 아이를 돌보다가 숨돌릴 겸 겨우 1500원 하는 커피 한 잔 마신다고 맘충 소리를 들었다. 주중에는 남편 없이 독박 육아를 하고, 주말에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시댁 어른들의 제사상을 차리고, 그나마도 성의가 없다고 꾸중을 듣는다. 딸만 하나라서 아들 낳으라는 잔소리도 듣는다(이 점은 59년생인 나의 엄마와 다르지 않다). 


여자는 조신하게 지내다가 나 좋다는 남자 만나 결혼해 현모양처가 되면 최고라고 믿는 사람들의 눈에 김지영은 예민한 여자로 보일 것이다. 복에 겨운 여자, 별것 아닌 일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여자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김지영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김지영은 둔한 여자다. 이때까지 참고 또 참다가 자기 목소리까지 잃어버린 여자다. 친정엄마나 남편의 결혼 전 애인의 목소리를 빌려서야 겨우 말을 할 수 있는 여자다. 


혹시라도 <82년생 김지영>의 후속편이 나온다면, 그때는 김지영이 김지영 자신의 목소리로 말했으면 좋겠다. 남의 목소리를 빌려 우는 대신, 자기 목소리로 욕하고 싸웠으면 좋겠다. 착한 여자, 조신한 여자, 현모양처인 여자 말고, 독한 여자, 사나운 여자, 자기 멋대로 사는 여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바람결에 '여자는 어쩌고~'라는 소리가 들려도 1밀리미터도 흔들리지 않는 여자였으면 좋겠다. 대놓고 그렇게 떠드는 인간이 있으면 다시는 끽 소리 못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여자라는 이유로 세상이 나를 안 받아주면 직접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소설을 읽고 싶다.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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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8-01-18 1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수많은 리뷰중에서 가장 와닿는 리뷰였습니다. 잘읽었습니다☺

키치 2018-01-19 07: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다락방 2018-01-18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키치 2018-01-19 07:26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북깨비 2018-01-19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부분이 약간 판타지물 같았거든요 (친정엄마나 특히 남편의 옛날 애인 말투로 말을 해서 남편이 깜짝 놀라는 부분 등) 그래서 호기심이 생겨 읽었는데 좋았어요. 그냥 신선한 도입부다 생각하고 말았는데 이 부분을 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린 여자, 다른 이의 목소리를 빌려 겨우 말을 할 수 있는 여자, 남의 목소리를 빌려 운다. 라는 키치님의 해석을 더하니 훨씬 의미심장하고 설득력이 있어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키치 2018-01-19 07:29   좋아요 1 | URL
앞부분이 신선했죠. 저는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살짝 비슷하다는 인상도 받았어요. 가부장제에 짓눌린 여자가 원래의 자신과 다른 자신이 된다는 설정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