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인생
글로리아 스타이넘 지음, 고정아 옮김 / 학고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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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생>은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운동가이자 세계 최초의 페미니즘 잡지 <미즈>의 창간인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회고록이다. 제법 두꺼워서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읽으려고 했는데 한 번에 다 읽어버렸다. 저자의 인생 여정도, 저자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어서 영화로 만들면 몇십 편은 만들 수 있을 것 같고 그중에 몇 편은 대박 칠 듯하다.


저자의 부모님 이야기부터. 1934년생인 저자가 한평생 자유를 추구하며 산 데에는 아버지의 공이 크다. 저자의 아버지는 틈만 나면 가족을 차에 태우고 방랑을 떠났다. 평생 일정한 직업을 가지지 않았고, 돈이 필요할 때는 골동품을 팔아서 해결했다. 저자는 그런 아버지가 싫었다. 아버지가 평범한 회사원이길 바랐고, 자신도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을 나와 사회에 나와 보니 아버지가 안정적인 생활을 버리고 방랑을 택한 이유를 알게 됐다. 세상은 넓고 인생은 짧은데 평생 한 곳에 정착해 한 가지 일만 하는 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에게 자유로운 영혼을 불어넣은 것이 아버지라면, 저자를 페미니즘으로 인도한 것은 어머니다. 저자의 어머니는 한때 잘 나가는 기자였지만, 당시 관습 때문에 결혼 후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일을 그만두고 나서 심한 우울증을 앓는 모습을 지켜본 저자는 대학 졸업 후 남자친구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관습대로 남자친구와 결혼하는 대신 아이를 지우는 편을 택했다. 당시 미국에선 낙태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인도까지 가서 임신 중절 수술을 받았다. 저자는 이를 계기로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관리할 권리조차 가지지 못한 현실에 눈떴고 여성 운동에 뛰어들었다. 


나같이 얌전 떨지 않는 여자에 대해 글을 써야 해요. 여자애들은 규칙을 깰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수녀님들이 나한테 그런 말을 해줬더라면, 20년은 덜 까먹었을 텐데. 


희생자가 되고, 섹스만이 나를 가치 있게 하는 유일한 것이라고 믿게 되는 건 끔찍한 일이에요. 도움을 받지 못하면 여자아이들은 그렇게 믿으면서 자라죠. 하지만 어떤 남자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학대하기 시작해요. 그게 남자가 되는 길이니까요. ... 내가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내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학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나는 훨씬 비참했을 거예요. 


여성 운동가가 된 저자는 길 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한없이 까칠해 보이던 한 여성 택시 운전사는 저자에게 "댁같이 설쳐대는 여자들이 나 같은 외톨이도 도왔어요."라고 극찬을 보냈고, 집회에서 만난 열두 살 남짓한 여학생은 "미국 헌법 제정자들인 건국의 아버지들이 건국의 어머니들을 포함시켰더라면 그 재생산의 자유야말로 권리장전의 서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당차게 말해서 저자를 놀라게 했다. 여기서 재생산의 자유란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통제하고 임신과 출산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일컫는다. 


남성들의 이야기 중에는 쇼킹한 것도 적지 않다. 저자는 언젠가 택시 안에서 성희롱, 성차별 발언을 퍼붓는 남성 운전사를 만나 한참 설전을 벌였는데, 나중에 그 운전사를 다시 만나 덕분에 자신의 성정체성이 여성임을 깨달았다는 감사 인사를 받았다. 누가 봐도 마초같이 보이는 남성을 만난 적도 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어렸을 때 집안의 남성 어른으로부터 상습적인 성폭행을 당했고 그 반작용으로 마초 같아 보이려고 노력했던 것이었다. 그는 여성 성폭행 피해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여성들이 가정이나 사회에서 당하는 차별과 폭력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털어놨다.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그 나이가 되었는데도 그만한 희망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면, 나는 여행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요. 길 위로 나서서, 그 길이 당신을 어디론가 데려다주도록 하세요. 길은 엉망진창이겠지만 우리의 삶도 그런 것이죠. 


저자는 대학 시절 민주당 선거 운동원으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예상치 못한 차별을 겪고 보수 정당이나 진보 정당이나 여성을 차별하기는 마찬가지인 걸 깨달아서 정치에 대한 환상을 내려놓았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기자 시절에는 예쁜 외모 때문에 덕을 본다는 비난을 듣기 싫어서 외모를 숨겼더니 이번엔 못난 외모를 숨기는 거냐는 비아냥을 들었다는 에피소드도 기억에 남는다. 여기서나 저기서나, 이러나 저러나, 여자는 여자라서 차별받고 여자라서 비난받는 게 일상이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평생을 페미니즘 운동에 바친 저자가 존경스럽다. 올해로 한국 나이 84세인 저자는 지금도 여성 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자신의 문제가 곧 사회 문제임을 인식하고 두 가지 모두를 해결하기 위해 기꺼이 길 위로, 세상 속으로 뛰어든 용기와 열정이 멋지다. 나도 이런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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