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기쁨
금정연.정지돈 지음 / 루페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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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려고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훑어보다가 충격을 받았다. 내가 정말 이 책을 읽은 게 맞나? 왜 모두 처음 보는 문장 같지? 충격을 받은 나머지 처음부터 찬찬히 읽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이 책을 읽기는 읽었구나. 근데 왜 기억나는 대목이 죄다 문학과 관련이 없을까. 엔제리너스 커피는 맛이 없다, 망원역 남자 화장실 두 번째 칸은 구조가 이상하다, 금정연이 데이비드 보위의 존재를 알게 된 건 퀸의 <Under pressure> 덕분이다(나도), 금정연이 처음 구입한 퀸의 앨범은 <Greatest Hits 1>과 <Greatest Hits 2>이다(나도)... 


<문학의 기쁨>은 서평가 금정연과 소설가 정지돈이 2015년부터 2년에 걸쳐 계간지에 연재한 대담과 웹진, 소설집을 통해 발표한 글을 엮은 책이다. 어디서 보니 '문학 대담집'을 빙자한 '문학 잡담집'이라는 소개 글이 있던데, '잡담'이라기에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수준이 높다. 인용한 작품도 웬만큼 한국문학을 즐겨 읽는 독자가 아니면 낯설 것 같고,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문학 이론과 용어도 생경한 것이 많다(한국문학을 읽지 않고 문학에 문외한인 사람이 이 책을 읽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겁먹지 마시라. 이 책은 적어도 금정연과 정지돈이 쓴 다른 책에 비해 쉽다. 금정연의 <난폭한 독서>를 읽는 데 몇 달이 걸리고, 정지돈의 <내가 싸우듯이>를 읽다가 도중에 포기한 나도 이 책은 한 번에 다 읽었다. 이 책을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 조언을 하자면 '쫄지 말 것'.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 <한국문학은 가능한가>, <한국문학의 위기> 같은 제목이 어려워 보인다고 지레 겁부터 먹지 말고, 모르는 작품, 작가 이름 나온다고 눈 돌리지 말고 쭉쭉 읽다 보면 문학을 읽는 눈을 한층 높여주는 멋진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소설이 단순히 독특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시시할까. 그것은 독특한 아이디어 밑으로 작품이 수렴되는 것인데, 그건 그림이 단지 그 그림이 묘사하는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 사진이 어떤 상황을 알리는 역할만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31쪽) 

하나. 다수는 어떤 책을 두 번 다시 읽는 법이 없다. 반면 소수는 다시 읽기의 기쁨을 아는 독자이고 좋아하는 책이라면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도 읽는 독자다. 둘. 다수는 아무리 책을 자주 읽는다고 해도 독서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수는 정확히 그 반대로 한동안 독서를 하지 못하면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을 느낀다. 셋. 소수는 어떤 문학작품을 읽고 영원히 바뀐다. 다수는 조금은커녕 아무런 변화도 겪지 않는다. (58쪽)


'문학을 읽는 눈을 한층 높여주는 멋진 문장'이라고 호기롭게 운을 뗐으니 인용문을 적어도 세 개는 찾고 싶었는데 마지막 세 번째를 도저히 못 찾겠다(으앙). 인용문을 찾으려 또 한 번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훑어보았는데 왜 모두 처음 보는 문장 같지? 내가 정말 이 책을 읽은 게 맞나? 문학상 역대 수상자 목록도 문단 내 관료제 이야기도, 앤 카슨의 책이 국내에 번역되기 전에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이야기도 죄다 처음 읽는 이야기 같고, 오로지 망원역 화장실, 데이비드 보위, 메세나폴리스만이 뇌리에 남는다. 대체 무슨 소린지 궁금하다면 직접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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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06-0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른다고 어렵겠다고 겁먹거나 쫄지말고 쭉~~ 가자. 그러면 뭔가 보인다, 로 님 글을 이해해도 될까요??
어려운 문학을 접할 때 있어 님 글에 용기를 얻을 거 같습니다. ^^ 근데 이 책은 벌써 겁이 나서 안 읽겠다고 뇌가 신호를 보냅니다~~

키치 2017-06-02 08:53   좋아요 0 | URL
산만한 제 글을 한 줄로 깔끔하게 정리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 저도 어려워서 포기한 문학 작품이 꽤 많은 데다가 금정연, 정지돈 두 분 작가의 전작이 저한테는 어려웠던 터라 이 책이 살짝 두려웠는데요, 막상 읽어보니 재미있는 대목도 많고, 문학 독자로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대목도 있어서 보람 있었습니다. 언제 여유 있으실 때 도전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ㅎㅎ 즐거운 불금&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