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정 - 20세기의 스무 가지 교훈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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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째, 한나 아렌트의 책을 읽고 있다. 대학 시절부터 한 번은 정독을 하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미뤘다. 그러다 최근 한길사에서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묶은 세트를 출간했기에 이 때다 싶어 읽기 시작했다. 분량도 많고 내용도 어렵지만, 발췌로만 접해온 문장을 앞뒤 맥락을 알고 온전하게 읽으니 감동마저 느껴진다. 


한나 아렌트는 대표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권위에 순응하는 다수의 태도가 독재를 가능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흉악한 살인마나 반사회적 인격장애자가 아닌 상부의 명령에 저항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악이 자행된다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도 이 책에서 나왔다. 


미국의 대표적인 홀로코스트 연구자이자 2013년 한나 아렌트상 수상자인 티머시 스나이더가 쓴 <폭정 : 20세기의 스무 가지 교훈>의 메시지도 다르지 않다. 163쪽밖에 안 되는 이 책에서 저자는 20세기 역사를 통해 인류가 배워야 할 교훈을 20가지로 추려 제시한다. 그중 핵심은 민주주의가 결코 자동적으로 폭정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며,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극적 또는 중립적인 태도로는 악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세기 유럽의 역사를 통해 인류가 얻어야 할 교훈은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강력한 독재자가 출현했다는 사실보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손에 총을 그러쥐고 이웃을 무참히 살해했다는 사실이다. 1938년 초,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했을 때 오스트리아 나치가 유대인을 학대하는 동안 나치도 유대인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은 즐겁게 이 상황을 지켜봤다. 소련과 동유럽에서 공산 정권이 악행을 저지를 때 대다수 민중은 저항 대신 동조나 침묵을 택했다. 


홀로코스트를 생각할 때면, 우리는 아우슈비츠와 기계화된 비인격적 죽음을 떠올린다. 이것이 독일인들이 홀로코스트를 떠올리는 편리한 방식이다. (중략) 본질적으로 친위대 지휘관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명령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 살인자였다. (64쪽) 


저자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암약하는 폭정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 일반 시민들이 할 수 있는 노력도 소개한다. 미리 복종하지 말라, 제도를 보호하라, 일당 국가를 조심하라, 세상의 얼굴에 책임을 져라 같은 정치적 구호가 있는가 하면, 어법에 공을 들여라, 진실을 믿어라, 직접 조사하라, 시선을 마주하고 작은 대화를 나누어라 같은 일상생활에 밀접한 조언들도 있다. 


저자는 영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조지 오웰을 인용해 국가를 내세워 인권을 억압하는 국가주의자들은 "끝없이 권력과 승리, 패배, 복수에 관해 생각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이나 이념이 아니다. 정치는 삶이며 개인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하는 사소한 선택들은 그 자체로 일종의 투표 행위다. 그런 선택 하나하나가 장래에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치러질 가능성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2016년 저자는 설마 했던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불완전한 제도인지 다시 확인했다. 2017년 3월 10일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2년 대선에서 51.6퍼센트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되었다. 민주주의는 불완전하고 국민은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이를 경계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적극적인 관심과 행동, 저항과 투쟁이다. "선거가 끝나는 곳에서 폭정이 시작된다"라는 저자의 말이 마음에 깊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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