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의 자서전 - 시로 쓴 소설 빨강의 자서전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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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온은 괴물이었네 그의 모든 것이 빨강이었네 

아침에 이불 밖으로 코를 내밀었네 빨강 코였네 

그의 소떼가 빨강 바람 속에서 

족쇄를 끌고 다니는 빨강 풍경은 얼마나 거친지

빨강 새벽에 파고들었네 젤리 같은 게리온의 

꿈 (13쪽)


캐나다 출신의 시인, 에세이스트, 번역가, 고전학자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은 여러모로 특별하다. 첫째는 '시로 된 소설'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 최초의 서정시인 스테시코로스의 <게리오네이스>를 읽고 유실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시로 된 소설'이라는 형태를 고안했다. 그 결과 시처럼 보이지만 소설처럼 읽히는 독특한 작품이 탄생했다. 


둘째는 그리스 고전을 현대의 시어로 재창조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대학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전공했고 이후 여러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쳤다. <빨강의 자서전>은 그리스 신화 중에서도 헤라클레스의 12과업 중 열 번째 노역의 에피소드를 배경으로 한다. 특이한 점은 주인공이 헤라클레스가 아니라 헤라클레스가 화살로 쏘아 죽인 빨강 괴물 게리온이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헤라클레스의 영웅 신화를 게리온의 러브 스토리 내지는 성장담으로 바꾼다. 


게리온은 어깨에 작은 빨강 날개를 달고 태어난 소년이다. 어머니를 포함해 주변의 그 누구와도 속내를 털어놓고 말하지 못하는 게리온은 오로지 '자서전'에만 자신의 내면을 기록한다. 어느 날 게리온은 헤라클레스라는 소년을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헤라클레스는 이내 게리온을 떠나고, 게리온만이 남아 헤라클레스에 대한 사랑을 지킨다. 시간이 흘러 대학을 졸업한 게리온은 외국에서 우연히 헤라클레스를 만나지만 그의 곁에는 새로운 연인이 있다. 


한때는 열렬히 사랑했던 사이지만 한 사람은 떠나고 한 사람은 남는다. 흔한 연애담이다. 저자는 '떠난 사람' 헤라클레스를 영웅, '남은 사람' 게리온을 괴물에 빗댄다. 당연하다. 떠난 사람은 내가 안중에도 없는데 남은 나만이 그 사람을 생각하고 심지어는 여전히 사랑하기까지 하니 미련스러운 괴물 맞다. 게다가 헤라클레스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멋지고 아름답다. 헤라클레스가 빛날수록 게리온은 자신이 더 깊은 어둠 속에 있다고 느낀다. 


사랑은 나를 기쁘게도 만들지만 비참하게도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이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질수록 나란 존재는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느껴지곤 한다. 영웅을 숭배하다 못해 스스로 괴물이 되길 자처하고 영웅의 칼에 스러지길 바라는 마음은 의외로 멀지 않다. 나로부터 멀다고만 여겼던 웅장한 영웅 신화가 저자의 손을 거치니 친근하다 못해 꼭 내 이야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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