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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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은밀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 누구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행동하고, 발화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한다. 모두들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대리인간'으로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힌다. 자신의 차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운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p.7) 


저자 김민섭은 2015년 '309동 1201호'라는 필명으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을 펴냈다. 지방대 시간강사, 이른바 '지방시'의 처우가 패스트푸드점에서 최저 임금을 받으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밝힌 죄(?)로 그는 그 해 12월 대학에서 나와야 했고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한 직업이 '대리기사'였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대리기사로 일할 수 있겠냐며 걱정했지만, 그는 "오히려 대학에서의 10년보다, 거리에서의 1년이 더욱 가치 있었다." 라고 회고한다. 대학은 이제 성역(聖域)이 아니다. 대학 또한 "우리 사회의 욕망을 최전선에서 대리하며 그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대리인간으로 만들어내는 '대리공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이제 안다. 


<대리사회>는 그가 1년 동안 대리기사로 일하면서 수집하고 기록하고 분석한 '거리의 언어'를 엮은 책이다. 자동차라는 타인의 공간에서 그는 김민섭이라는 인격이 아니라 대리기사라는 역할로서 존재했다. 그가 태운 손님들은 그의 직업이 대리기사이고 그의 시간과 노동력을 돈을 주고 구입했다는 이유로 그의 행동과 언어, 사유를 통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대학 안에서 '교수님' 혹은 '선생님'이라고 불렸던 그는 거리에서 '아저씨'로 불렸다. 손님의 콜을 받는 순간부터 그의 몸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밥을 먹다가도, 아이를 보다가도 뛰어나가야 했다. 손님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땀이 나게 달려야 했다. 운전석에 앉으면 그때부터 그의 입은 손님이 뭐라고 말하든 "네, 맞습니다" 하고 영혼 없이 답하고, 그의 귀는 손님이 하는 말과 손님의 취향에 맞는 음악에 고정되어야 했다. 


'진상 손님'을 만나도 항의할 길이 없었다. 밤늦게 콜을 받고 갔는데 알고 보니 여러 명의 기사를 한꺼번에 부른 것이어서 허탕을 친 적도 있고, 처음에 약속한 금액과 다른 금액을 제시하며 흥정을 하는 바람에 곤란을 겪은 적도 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지도대로 운전했는데도 일부러 돌아갔다며 시비를 걸고, 심지어는 지갑을 훔쳤다고 의심했으면서 사과도 하지 않고 훌쩍 가버린 사람도 있었다. 아무리 억울해도 손님은 갑, 대리기사는 을이므로 고분고분하게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타인의 운전석과 다름없는 '을의 공간'은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차의 주인과 대리기사와 같은 역설의 관계 역시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그 어디에서, 주체의 욕망은 쉽게도 타인을 잡아먹는다. 예컨대 의사 결정권자는 언제나 자유롭게 회의 안건을 내고 소통하자고 하지만 그 누구도 화답하기는 쉽지 않다. 이미 상상과 수용 가능한 범위가 제한되어 있음을 모두가 안다. 거기에서 벗어나거나 반론을 내기라도 하면 곧 눈총이 쏟아진다. ...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의 관계부터 시작해 교사,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을의 공간'에서 순응하는 방법을 주로 배워왔다. (p.35) 


대리기사 일은 고되지만 대학교수가 되길 꿈꾸며 불합리한 생활을 해나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저자는 대학에서 일하면서 4대 보험 혜택은커녕 합당한 보수도 받지 못 했다. 자연히 부모와 아내 등 가족들에게 의지해야 했다. 언젠가 교수가 되고 정규직이 되면 그의 부모는 '교수 부모', 그의 아내는 '교수 아내'가 되겠지만 그것으로 그들의 희생이 보상받으리라고 합리화할 수 없었다. 


몇 년을 기다려야 교수가 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는 '대학이라는 괴물의 욕망'에 포로가 된 자신 때문에 자신의 부모와 아내, 자녀들까지 고통을 겪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가 대학에서 타인의 욕망을 위해 '유령의 시간', '대리의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사랑하는 가족까지 유령이 되고 대리 인생을 살길 강요할 순 없었다. 1년 3개월 동안 맥도날드에서 일한 경험이 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준 것처럼, 대리기사로 일하는 경험 역시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사했다. 


'진상 손님'이 있었다면 '좋은 손님'도 있었다. 집에 가서 아내, 아이와 나눠 먹으라며 빵을 한 아름 안겨주었던 손님도 있었고, "여기 높으니 버스 타고 가요" 하고 차비 2천 원을 덤으로 건네주었던 손님도 있었다. 비록 '대리 사회'에서 살지언정 주체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그는 만났다. 


가족의 소중함도 새삼 깨달았다. 대리운전을 시작한 지 3주쯤 되었을 때 저자의 아내는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했다. 함께 차를 타고 다니면서 대리운전을 하면 시간도 절약하고 체력도 보전하고 평소보다 많은 콜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어린 아들을 늦은 밤 집에 혼자 두고 나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가정용 CCTV를 켜놓는 것으로 해결했다. 비록 대리일지라도 주체로서 결정하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니 훨씬 나았다. 


대리 사회의 괴물은 대리인간에게 물러서지 않는 주체가 되기를 강요한다. '주인 의식'을 가지라고 끊임없이 주문하는 가운데, 정작 한발 물러서서 자신을 주체로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봉쇄한다. 결국 개인은 주체로서 물러서는 법을 잊는다. (p.252)) 


사회가 개인을 주체가 아닌 대리인으로 대우하고 개인의 행동과 언어, 사유를 통제하면, 개인은 좌절감을 느끼고 끝내 분노를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분노가, 분노를 야기한 사회 구조나 조직이 아니라 분노와 무관한 약하고 힘없는 개인 또는 자기 자신에게 향하기 쉽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 모두는 경계에 있다." 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우리는 주체임을 부정당하고 경계에서 밀려나고 난 뒤에야 어느 공간의 대리로서 살아왔음을 자각한다. 그전까지 잉여나 패배자로 규정하고 조롱했던 존재가 되고 나서야, 자기를 대체할 새로운 대리인간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사회의 부조리를 인식한다. 


이미 보편화된 대리사회에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려면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연대하여 행동하는 경험을 자주 해봐야 한다.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좋다. 거리에서 만난 이름 모를 타인을 위해 길을 양보하고 문을 잡아주는 것도 좋고, 버스 기사든 식당 종업원이든 나를 위해 일해준 사람을 위해 따뜻한 인사 한 마디 건네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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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6-12-09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리운저 이야기에 찡해 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대우 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