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 지음, 김경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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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리모컨을 잡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오래된 뮤직비디오 한 편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영국 록그룹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였다. 음악도 영상도 멋있지만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애절하면서도 파워풀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얼마 후 프레디 머큐리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놀라지 않았다. 소수자라는 비애가 그의 음악성을 증폭하지 않았을까.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소수자 문제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건. 유난히 그런 문제들이 나의 눈에 들어오고 귀를 사로잡았다. 중학교 때 일본에서 온 친구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고 고백했을 때, 고등학교 때 친구가 가족 내에서 딸이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내 마음은 평소보다 세게 뛰었다. 대학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페미니스트, 성 소수자, 장애인, 재외 동포, 이민자들을 만났을 때에도 그랬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여성 문제는 나와 무관하지 않지만, 성 소수자, 장애인, 재외 동포, 이민자 문제는 나와 직접 관련이 있는 문제는 아니다. 재일 코리안, 피차별 부락, 오키나와 문제도 관심은 있지만 상관은 없다. 다수자이면서 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건 괜한 오지랖이나 외부자의 관음증이 아닐까. 이 또한 당사자에게는 폭력이 아닐까. 그런 고민이 나를 늘 괴롭혔다. 



나는 재일 코리안이나 피차별 부락이나 오키나와 사람들에 대해, 또는 여성이나 장애인에 대해 누가 보더라도 다수자의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싶다는 마음에 보잘것없지만 공부를 해 왔다. 또한 일이나 사생활 면에서 그런 사람들과 맺은 관계도 점차 늘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지점에서 역시 나는 다수자일 수밖에 없다. (p.179)


이 책의 저자 기시 마사히코는 소수자 문제를 연구하는 사회학자다. 오키나와인, 재일 코리안, 피차별 부락민, 장애인, 게이, 이주 여성, 복장 도착자, 조직폭력배 등이 저자의 연구 대상이다. 저자는 소수자가 아니다. 일본인이고, 건강한 사람이며, 이성애자이고, 남성이다. 그런데도 소수자 문제를 연구하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말을 흐린다. 대학 졸업 후 공사장에서 막노동꾼으로 일한 경험 때문일 수도 있고, 학창 시절 친구들한테 미움을 샀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무엇도 정답은 아니다. 


저자는 대체로 다수자이지만 때때로 소수자다. 저자는 무정자증이다. 사람들이 자녀들의 사진을 보여주거나 왜 아이를 가지지 않느냐고 물을 때 저자는 폭력을 당하는 듯하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저자에게 아이를 가진 사람은 다수자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은 아이를 가진 사람의 행복을 짐작하지만, 아이를 가진 사람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의 불행을 고려하지 않는다. 아이만이 아니다. 배제된 경험, 차별당한 경험, 고통을 겪은 경험이 더 적은 쪽이 다수이며, 다수는 소수에 대해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 


다행히 사람은 누구나 어떤 문제에 있어서 다수자이거나 소수자일 수 있고, 다수자로 살 것인지 소수자로 살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저자는 소수자로 살기를 택했다. 재일 코리안, 장애인, 성 소수자, 여성 문제에 대해 평생 모르거나 무관심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기꺼이 관심을 가지고 사는 길을 택했다. 소수자들의 눈에는 그가 다수자로만 비치겠지만, 저자는 삶에서 다수였던 경험보다 소수였던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규정한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누가 다수자이고 누가 소수자일까. 이 또한 정답은 없다. 


한쪽에 '재일 코리안이라는 경험'이 있고, 다른 한쪽에 '일본인이라는 경험'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쪽에는 '재일 코리안이라는 경험'이 있고,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애초에 민족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도 없는' 사람들이 있을 따름이다. (p.166) 


저자는 이제까지 만난 소수자들을 연구 대상이 아닌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인연으로 본다. 유치원에 다닐 무렵 돌멩이를 아무것이나 주워 바라보면서 "이 드넓은 지구에서 '이' 순간에 '이' 장소에서 '이' 나에게 주워 올려진 '이' 돌...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음과 무의미함"에 전율하고 감동했던 것처럼 그들과 만난 것에 감사한다. 그렇기에 논문이나 책에 포함되지 않은 이야기조차 쉽게 버리지 못한다. 이 책은 여러 이유로 버려야 했지만 끝내 버릴 수 없었던 이야기들의 모음집이다. 


버려질 뻔한 이야기를 모았다고 해서 낮추어 보면 곤란하다. 일본 사회의 소수자로 흔히 거론되는 오키나와인, 재일 코리안, 피차별 부락민, 장애인, 게이, 이주 여성 등을 취재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있어 일본 사회의 소수자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회학자로서 연구를 하면서 느끼는 딜레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연구해가는 이유 등도 자세히 나와 있다. 


현대 사회는 상이한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점점 나아가고 있다. 소수자 문제에 무심한 다수자는 소수자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까닭 없는 공포와 두려움을 가지기 쉽고, 이는 공격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누구도, 누구에게도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평온하고 평화로운 세계, 자기가 누구인가를 완전히 망각한 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세계"를 꿈꾼다.


나도 꿈꾼다. 프레디 머큐리의 이력에 동성애자라는 말이 나올 필요가 없는 세계, 어린아이가 외국 학교에서 차별받지 않아도 되는 세계, 딸이라는 이유로 가족에게 미움받지 않아도 되는 세계, 장애가 있거나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2등 시민이 되지 않아도 되는 세계. 과연 그런 세계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아니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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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0-17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이 책에 대한 리뷰가 올라오는군요.
˝2016년 기노쿠니야 인문 대상˝을 수상했다는 화려한 장식성을 갖추지 않고 소수자에 대한 내용만을 얘기하려고 한 키치님의 안배가 돋보입니다. 이 책 취지와 부합하는...
잘 읽었습니다^^

키치 2016-10-19 11:34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