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반대하며 - 타자를 향한 시선
프리모 레비 지음, 심하은.채세진 옮김 / 북인더갭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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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 이름이야 수없이 들어봤고 그가 쓴 책과 책에서 한 이야기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저작을 온전히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프리모 레비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그의 생애를 짤막하게 적어볼까. 1919년 이탈리아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프리모 레비는 토리노 대학 화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반파시즘 파르티잔 부대에 가담한 그는 파시스트 군인들에게 붙잡혔고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돌아온 후 그곳에서 겪은 일을 기록한 <이것이 인간인가>를 썼으나 큰 반응을 얻지 못했고 십 년 넘게 공장에서 화학자로 일했다. 이 책은 1958년에야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며 12개 언어로 번역될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이후 <주기율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등 여러 권의 장편소설, 단편집, 시집, 에세이 등을 남겼으며 1987년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고통에 반대하며>는 프리모 레비가 1985년에 낸 에세이집이다. 이탈리아 토리노의 조간신문 '스탐파'에 연재한 글을 엮은 것이다. 대부분이 서평이지만 글쓰기에 관한 글도 있고 어린 시절 추억이나 학창 시절 무용담도 섞여 있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프리모 레비 하면 아우슈비츠 생존자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이 책을 보니 집안 대대로 살고 있는 집을 애틋한 눈으로 관찰하고 나이 들어 이탈리아어를 배우느라 고생하고 학창 시절 죽마고우로 붙어 지냈던 친구를 다시 보지 못해 아쉬워하는 등 평범한 생활인으로서의 면모가 보여 좋았다. 


글쓰기는 진짜 직업이 아니다. 아니, 적어도 내 견해로는 직업이어서는 안 된다. 글쓰기는 창조적인 활동이므로 일정이나 마감, 고객과 상사에 대한 책무 등을 견디지 못하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글쓰기는 '생산', 아니 오히려 변형이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독자가 될 '고객'이 이해하기 쉽고 좋아할 만한 형태로 변형한다. 그러므로 경험(넓은 의미에서 삶의 경험)은 원료다. 원료가 부족한 작가는 헛되이 일하는 것과 같다. 자신은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페이지는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이제, 그간의 삶에서 내가 보고 체험하고 행한 일들은 오늘날 작가인 내게 원재료, 이야기할 사건들의 귀중한 원천이 된다. (p.27)


나는 개인적으로 세상을 더 좋게 발전시키는 방법을 '아는' 누구에게든 어떤 불신감을 갖고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은 자기 체계를 너무 선호하는 나머지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지나치게 강한 의지를 소유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히틀러가 <나의 투쟁>을 쓴 뒤에 행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많은 다른 이상주의자들이 충분한 에너지를 갖게 되면 전쟁과 학살을 촉발하리라고 종종 생각했다. (p.61)


수십 년 넘게 글을 써온 작가로서 글쓰기에 관한 생각을 펼쳐놓은 대목도 흥미롭다. 저자는 글쓰기를 신성시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글쓰기는 진짜 직업이 아니다'. 그런데도 글쓰기를 직업으로 가지고 싶다면 글로 쓸 '무언가'를 가지는 게 우선이다. 그는 유대인 집안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것이나 대학에서 어엿한 화학자가 되길 고대하며 어려운 실험을 반복했던 것이나 공장에서 척박한 환경에 시달리면서도 돈을 벌어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버텨내야 했던 시간들이 자신의 글쓰기의 원재료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심지어는 아우슈비츠에서 보낸 혹독한 나날들마저도.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고 글이라는 체로 걸러내는 작업은 그가 세상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던 동력이자 원천이었다.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글이 아우슈비츠에서의 참담한 생활을 증언하고 그곳에서 힘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길 바랐지만 글이 사람들을 선동하고 해치는 건 경계했다. 아우슈비츠라는 지옥을 만든 악마 히틀러가 생전에 1만 6,000권의 책을 소장한 열정적인 독서가였으며 저서 <나의 투쟁>이 1500만 부 이상 팔린 희대의 '베스트셀러'가 된 것만 보아도 글의 힘은 과연 경계할 만하다. 글의 힘을 경계하면서도 글로서 증언하고 글로서 소통하길 바랐던 그의 글의 실체는 과연 어떠할까. 프리모 레비의 다른 책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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