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2 - 욕쟁이 꽃할배의 더 까칠해진 시골마을 여행기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2
빌 브라이슨 지음, 박여진 옮김 / 21세기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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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분전환하고 싶을 때 주로 책을 읽는 편이다. 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텔레비전은 안 본 지 오래되어 어떤 프로그램이 인기이며 유행하는 농담이 뭔지도 잘 모른다.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면 끽해야 인터넷이나 SNS를 하면서 낄낄대는 정도인데 요즘에는 인터넷이나 SNS에도 진지하고 무거운 내용이 많아서 꺼려진다. 나 편한 시간에 내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최고다.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국산책2>은 기분전환하고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읽기에 딱 좋은 책이다. 전 세계적으로 1600만 부가 넘는 책을 판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가장 재미있게 글을 쓰는 기자 겸 작가'로 평가받는 빌 브라이슨의 이 신작은 저자가 20년 전 영국 시민권을 취득한 것을 기념하여 쓴 <발칙한 영국 산책>의 속편이다. 이번에 저자가 선택한 여행 루트는 영국 최남단 보그너레지스에서 최북단 케이프래스에 이르는 자칭 '브라이슨 길'. 저자가 들른 곳 중에는 대도시도 드물거니와 사람들이 익히 하는 관광지, 여행지도 많지 않아 여행 가이드북으로서는 다소 미흡하지만, 영국을 제2의 조국으로 삼아 오랫동안 거주하며 영국의 문화와 풍습을 익혀온 저자가 20년 만에 영국을 종단하며 관찰하고 생각하고 느낀 바를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실 이 책은 '재미가 쏠쏠하다'라는 표현이 가볍게 느껴질 만큼 엄청 웃기다. 빌 브라이슨이 원래 독설과 유머의 대가로 유명하긴 한데, 이 책의 소재가 영국의 평범한 시골 마을이다 보니 동네마다 구별되는 특색이 딱히 없기도 하고 특별한 사건사고도 없었던 탓인지 저자는 뭔가 꼬투리 잡을 만한 요소나 그냥 지나치기 힘든 사건이 생기면 어떻게든 웃음 포인트를 만들어낸다. 때로는 온갖 과장을 덧붙이고 상상력을 발휘해서라도. 


길거리에 무심히 쓰레기를 버리는 청소년들이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주문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점원도 빌 브라이슨의 눈에 걸리면 얄짤없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네티즌도 물론 '저격 대상'이다. 저자는 이스트서식스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동네인 파보로소를 구글에 검색했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보로소 카페에 대해 혹평한 것을 보고 놀랐다. 어느 여행객은 파보로소에 다녀온 소감을 '완죤 실망'이라고 썼다. 이걸 본 저자 왈. "맞춤법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멍청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공공 게시판에 글을 올리지 말길 바란다. 우리는 옛것과 전통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맞춤법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무엇을 남기고 지킬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에 관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건 옳지 않다. 트립어드바이저의 댓글 식으로 말하자면 '심이 걱정슬업다'". 


이 책을 통틀어 제일 좋아하는 대목은 빌 브라이슨이 보그네에서 버스에 탔다가 만난 청년에 대한 인상이다. "모자챙은 다리미로 누른 듯 평평했으며 앞에는 반짝이는 홀로그램이 부착된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모자 정면에는 대문자로 'OBEY(복종하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어폰은 요란한 음파를 그의 텅 빈 두개골로 보내고 있었다. 그의 두개골 속 공간은 아득하게 멀리 떨어진 별과 별 사이만큼이나 공허할 것이다. 그 공허한 두개골 속을 한참 여행하다 보면 건조한 티끌 하나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그의 뇌다." 말을 섞은 것도 아니고 청년이 무례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예술적으로' 욕을 하다니. 이쯤 되면 저자의 별명이 '욕할배'인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그렇다고 빌 브라이슨이 시종일관 우스갯소리만 하고 욕만 늘어놓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영국을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공책을 꺼내 영국의 좋은 점들 목록을 생각나는 대로 적다가 끝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복싱데이(영국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을 공휴일로 지정해 쉰다), 시골의 술집들, 커스터드가 들어간 잼 롤리폴리, 심지어 "넌 개불알 같은 놈이야"라는 말이 친근감이나 감탄의 표현으로 사용되는 것이나 지뢰밭에서 다리 한 쪽이 날아가도 '내 뭐랬어. 이럴 거라고 했잖아'라고 말할 듯한 영국인들의 성품마저도 저자의 눈엔 사랑스럽다. 


저자는 영국의 이러한 매력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점 변하거나 사라져가는 것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한다. 영국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영국에 살고 싶어서 시민권을 취득하기까지 한 자신의 눈에 비치는 영국의 장점들을 정작 영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만 살아온 영국인들이 모르는 것에 저자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갑자기 이 지점에서 로버트 할리가 한국에 관한 책을 쓰면 어떤 내용이 실릴지 궁금해진다). 


변하거나 사라져가는 것이 영국뿐이랴. 저자가 태어난 미국도, 내가 사는 한국도 끊임없이 변하고 무엇이 계속 사라진다.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변화를 멈추거나 사라지지 않게 막는 일이라기보다는 변하기 전의 모습을 기억하고,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잊지 않고 추억하는 일뿐이지 않을까. 이 책의 저자 빌 브라이슨처럼 말이다. 부디 빌 브라이슨도 오래오래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좋은 책을 많이 내주었으면 좋겠다. 그가 사랑하는 영국이 지금보다 더 변하기 전에, 그가 아끼는 영국의 매력이 더 사라지기 전에 영국에 가보고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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