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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스미스 ㅣ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평점 :
세라 워터스의 <핑거 스미스>를 읽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런 생각이었다. '얼른 읽고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를 보러 가야지.' <핑거 스미스>를 다 읽은 지금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아가씨>를 봐도 괜찮을까?' 작품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고 각색도 잘 되어 있어 소설은 소설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즐길 거리가 있다고 들었다. 문제는 <핑거 스미스>를 이제 막 읽은 내가 아직 작품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며칠 안에 소화하기엔 너무나 장대하고 감동적인 작품이라서 도저히 침착한 마음으로 영화를 볼 자신이 없다.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의 화자 수 트린더는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되었고 버려진 아기들을 맡아서 키우는 일을 하는 석스비 부인과 장물아비 입스 씨의 손에 자란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수는 젠틀먼이라는 사내로부터 매력적인 제안을 받는다. 시골에 사는 젊은 상속녀 모드의 하녀로 들어가 모드와 젠틀먼의 결혼을 성사시켜주면 모드의 재산 일부를 주겠다는 것이다. 제안을 받아들인 수는 모드의 하녀가 되고 모드에게 연애에 필요한 이런저런 기술을 가르친다. 그러는 사이에 수는 자기도 모르게 모드에게 빠져든다. 이런 수의 속도 모르고 젠틀먼은 모드와 결혼해 재산을 가로챌 준비를 착착 진행한다. 모드를 속여야 하는 수, 수의 마음을 사로잡은 모드. 두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수는 비록 거짓과 횡행이 판치는 곳이지만 석스비 부인과 입스 씨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사랑 가득한 심성으로 자랐다. 사기를 치러 온 입장인데도 외딴 시골에서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며 자란 모드를 측은히 여기고 급기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수의 솔직하고 순수한 인품을 잘 보여준다. 그런 수의 마음을 사로잡은 모드는 그 나름대로 매력적이다. 정신병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브라이어 저택에서 삼촌과 하인들로부터 학대를 당하는 등 비극적인 유년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모드는 지혜롭고 강인한 여성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세상이란 토양은 그녀들이 온전히 홀로 꽃 피기엔 너무나 척박하다. 세상은 그녀들에게 여성에 대한 차별과 가부장제의 압박이라는 시련을 끊임없이 부여하며 그녀들을 괴롭히고 옭아맨다. 아버지든 남편이든 오빠든 남동생이든 남성의 존재 없이 그녀들은 하나의 개인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어른이 될 수 없으며 정당히 자기 몫으로 부여된 재산도 가지기 어렵다. 결국 그녀들은 남성과의 결합이 아닌 여성과의 연대(나아가 결합)로서 자신만의 천국을 찾아낸다.
역사 소설, 그것도 한국도 아닌 영국의 역사 소설이라고 해서 지레 겁부터 먹었는데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오히려 역사 소설이라는 점이 작품을 새로운 위치에 놓이게 하고 작품 전체의 수준을 높인 감도 있다. 작가 세라 워터스는 원래 게이 레즈비언 역사 소설 연구자였다. 그래서인지 소설 전체에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 복식, 예절, 런던과 농촌의 풍경 등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고 당시 문학작품이 충실하게 고증되어 있다. 덕분에 막장 드라마 같고 흡사 할리퀸 소설의 레즈비언 버전처럼 보일 수 있는 줄거리가 전형적이지 않고 신선하며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작가의 문장까지 탁월한 이 소설을 과연 영화 <아가씨>는 어떻게 재구성했을지. 지금 내 심정은 궁금함 반 두려움 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