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할 권리 -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 선언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학교를 졸업하니 가르침을 구할 스승이나 선배, 배움을 공유할 친구를 찾기 어렵다. 대학 시절 가장 존경했던 교수님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나셨고, 알고 지냈던 선후배나 동기들은 각자 살기 바빠 만나지 못한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 돕기보다 끌어내리기 일쑤다. 어쩌다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도 직장이 바뀌거나 사는 곳이 달라지면 관계를 지속하기 힘들다. 


스승이 그립고 사람이 아쉬울 때 나는 정여울 작가의 책을 읽는다. 학교도 전공도 다르고 직접 뵌 적도 없지만, 정여울 작가의 책을 읽으면 앞으로 어떤 책을 읽고 어떻게 공부할지 사사하는 기분이 든다. 남들 다 꺼리는 책 읽고 글쓰는 삶을 택한 죄로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 잘 알고 있다고 위로받는 듯하다. 힘든 길인 건 맞지만 틀린 길은 아니라고, 그러니 용기를 내라고 격려받는 듯하다. 


인문학 공부의 무서운 맨얼굴은 파고들수록 '넌 지독한 무식쟁이야!'라는 것을 기쁘게 깨닫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지함을 깨달을수록 신이 났습니다. 내가 무엇을 아는지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모르면서 아는 척하며 살아왔는지를 깨닫는 순간 진짜 배움이 시작되었습니다. (p.345) 


<공부할 권리>를 읽으면서는 더 많이 더 치열하게 공부하라는 자극을 받았다. 저자는 오랫동안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무지하고 아는 척 하는 게 많은지 깨달았다. 덕분에 시간 강사라는 불안정한 밥벌이를 가지고도 버틸 수 있었다. 출판사에 보낸 원고가 돌아오거나 원래의 기획 의도와 다른 책으로 만들어져도, 독자로부터 인문학 공부를 왜 하냐는 당돌한 질문을 받아도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었다. 인문학을 공부하며 자신의 밑바닥을 보았기 때문에 힘든 순간이 와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무지한 자의 괴로움을 알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글을 쓸 수 있었다.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인간답지 못하고 정의롭지 않은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일이 많은 지도 깨달았다. 고병권의 <철학자의 하녀>를 읽으며 '남들의 탐욕을 욕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부터 탐욕의 습관을 절제하자'는 깨달음을 얻었고, 알프레드 아들러의 책을 읽으며 '진짜 내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사람들은 결코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욕망을 줄일 수 없으면 '다른 삶을 욕망하'고, '진짜 내 것'을 만들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꿈을 찾아 사는 사람들은 책임을 다하지 않는 걸까요. 책임을 다하며 사는 사람들은 꿈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일까요. 우리는 이렇게 쓸데없는 일과 쓸모 있는 일을 나누고, 꿈을 찾는 삶과 책임을 다하는 삶을 나누고, 나만 잘 사는 것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삶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 때문에 더욱 불행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p.203) 


과 책임이 별개가 아니라는 조언도 얻었다. 저자는 이십대 후반부터 읽고 쓰고 공부하는 삶을 꿈꿨고 현재 그런 삶을 살고 있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저자와 같은 삶을 꿈꾸지만 쉬이 이루지 못하는 건 꿈과 책임을 별개로 보기 때문이다. 꿈과 현실을 외따로 여기고 일과 취미를 나누어 생각하니, 꿈은 이루기 어렵고 현실은 팍팍하고 일은 지루하고 취미는 허무하다. 그렇다면 내가 읽는 책, 내가 쓰는 글, 내가 하는 공부, 내가 하는 일과 취미를 연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확한 답은 모르지만 현재 내 생활을 이루는 모든 활동들이 언젠가 하나로 연결되리라는 확신은 든다. 글로든 일로든, 아니면 둘 다로든. 확신이 현실이 되는 날까지 나만의 '공부할 권리'를 열심히 누리련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깨비 2016-04-10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한달 넘게 델꾸 있었는데 이제 주문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키치님 리뷰 너무 좋아서 화르륵 타올랐어요 읽고 싶다는 욕망이 화르르륵ㅋㅋㅋㅋ

cyrus 2016-04-10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345쪽 인용문에 공감이 됩니다. 자신의 무지함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자세는 정말 좋은 거죠.

알라딘 서재/북플은 내 생각이 담긴 글이 공개되는 공간이라서 자신의 무지함 또한 노출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남의 글을 읽다가 잘못된 점이 발견되면 공손하게 알려줄 수 있어요. 상대방의 지적을 받고난 뒤에 자신이 썼던 글을 다시 읽으면 나의 무지함이 보입니다. 이러면 무지함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런데 상대방의 지적으로 인해 자신의 무지함이 들통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무지함을 깨달으면 조금은 부끄러워도 그냥 좋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인데, 도리어 화를 내거나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서재/북플에 이런 분들을 가끔씩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