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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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나 지금이나 친구가 곁에 없어 외로운 적은 없었다. 보통 전학을 하면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고 하는데, 나는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때 전학을 한 번 했지만 첫날부터 여러 명의 친구를 사귀었고 이듬해엔 반의 부반장이 되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반장이며 동아리 부장을 도맡아 해서 주변에 친구들이 없는 날이 드물었다. 그 때에 비하면 성인이 된 후에 사귄 친구들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대학 수업을 들을 때나 동아리 활동을 할 때도 사람을 쉽게 사귀는 편이었고, 사회에 나온 후에도 그랬다. 



한데 책을 좋아하고부터는 외롭다는 생각을 부쩍 한다. 회사에서 책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리 만무하고, 친구들을 만나도 내가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할 수 없어 외롭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볼까 싶기도 하지만, 일하면서 틈틈이 책 읽고 서평 쓰는 것도 벅찬데 다른 사람들까지 만날 여유가 없다. 그러니 블로그나 인터넷 서점에서 책 이야기를 나누는 곳에 끼어들거나, 책 관련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남이 하는 책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하는 것이 책 때문에 생긴 외로움을 해소할 유일한 수단일밖에.



정민의 <책벌레와 메모광>을 읽으면서 이런건 핑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미쳐 손에서 책을 놓지 못 했던 책벌레들, 숨 쉬듯 읽고 밥 먹듯 메모한 메모광들의 이야기를 엮은 이 책에서, 나는 외로운 데다가 배까지 고픈 데도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들의 열의와 정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배지에 있는 몸이면서도 제자들에게 학문을 권하다 못해 독촉했던 독한(!) 선생 정약용이며, 추운 겨울 마당에 눈 쌓이는 것도 모르고 글 읽기에 심취했던 이덕무, 그리고 그 먼 열하에 다녀오는 길에도 좋은 생각이 날 때마다 말을 멈추고 붓과 벼루를 꺼내 메모를 했다는 박지원 등의 삶에는 외로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덕무는 열여덟 살 때 자신의 거처에 구서재란 이름을 붙였다. 책과 관련된 아홉 가지 활동이 이루어지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 아홉 가지 활동은 바로 독서, 간서, 초서, 교서, 평서, 저서, 장서, 차서, 포서였다. (p.112)



조선의 르네상스인 정조 시대에 자타가 공인하는 책벌레였던 이덕무는 책을 그저 읽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는 '구서재'라고 이름 붙인 자신의 거처에서 책을 낭독하고, 눈으로 묵독하고, 베껴 쓰고, 교정 보고, 비평하고, 집필하고, 소장하고, 대여하고, 진짜 '책벌레'에 상하지 않게 잘 관리했다. 이 중에 내가 하는 활동이라고는 눈으로 묵독하는 간서와 베껴 쓰는 초서(그것도 책 전체를 베껴 쓰는 게 아니라 인상 깊은 구절만 짧게 베껴 쓰는 정도다), 읽고 난 감상을 적는 것도 넓게 봐서 비평이라면 평서, 소장하는 장서, 빌려 읽는 차서 정도. 책벌레 때문에 책이 상한 적은 없지만 종이가 누렇게 바래지 않도록 천이나 신문지로 덮어놓는 것도 포서에 속할까.



글을 쓸 때 자리 옆에 늘 궤 하나를 놓아두고, 책을 읽다가 의혹이 생기거나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붓으로 적어 그 안에 던져두곤 했다. 쌓아둔 지 오래되니 없어질까 걱정되어 베껴써서 <독기>라 하고, 질문을 기다린다. (<독기> 중에서 저자가 인용한 글, p.145)



메모를 하는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선조들이 추천하고 저자가 직접 경험한 바 있는 메모법은 '독기'다. 독기란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적어서 상자나 옹기 같은 데에 넣어두었다가 어느 정도 모이면 주제별로 분류해 책으로 묶는 것이다. 저자는 이 방법을 활용해 <마음을 비우는 지혜 - 명청청언소품>이라는 책을 집필한 바 있고,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메모를 정리할 때 유난히 <유몽영>이라는 책의 내용이 많은 것을 깨닫고 이 책도 찾아 번역했다.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는 영원히 기억할 것 같지만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생각들을 붙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리해 책으로 만들 수도 있다니 일석이조다.



한 권의 책을 다 읽을 만큼 길게 한가한 때를 기다린 뒤에야 책을 편다면 평생 가도 책을 읽을 만한 날은 없다. 비록 아주 바쁜 중에도 한 글자를 읽을 만한 틈이 생기면 한 글자라도 읽는 것이 옳다. (홍석주의 말을 저자가 인용, p.214)



오늘의 청와대 비서관에 해당하는 승지에 오른 인물이자 평생 읽은 책을 목록으로 만들고 각 책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 책 <홍씨독서록>을 남기기도 한 홍석주의 글은 책벌레와 메모광에 관한 글 모두를 통틀어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나중에 읽어야지, 시간 나면 읽어야지, 휴가 때 읽어야지, 회사 그만두면 읽어야지, 은퇴하면 읽어야지...... 그런 결심을 실제로 실행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있다 해도 나는 그런 사람보다, 읽고 싶을 때 읽는 사람, 지금 당장 책을 읽는 사람이 되고 싶다. 책이란 게 언제나 거기 그대로 있을 듯한 사물 같지만, 시간과 공간, 무엇보다 인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책이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나는 왜 내 곁에 늘 책이 있는데도 외로워했던 것일까. 그동안 내 안에도 책을 그저 평범한 사물로 여기는 마음이 있었던 것일까. 책 읽는 시간을 애인과 정을 나누는 순간처럼 소중히 여기고, 기록하는 일을 사랑하는 이의 고백을 받아 적는 것처럼 황홀하게 여겼던 이들에 비하면 난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다. 삶에서 책을 빼면 아무것도 없다고 여긴 책벌레와 메모광의 길을 나도 따라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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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11-08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을 읽으며 외로웠던 마음들을 키치님의 글 속에서 만나게되 내심 반가운(?)마음이 들었어요. 저도 이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꿀밤되세요 키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