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출근길이라고 하면 지긋지긋한 풍경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들이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히 들어선 지하철 안, 비슷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가지였다가 이제는 스마트폰을 향하고 있는 눈동자들, 눈을 뜨고 있어도 감은 것 같고,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듯한 표정들로 이루어진 풍경. 



<걸 온 더 트레인>의 첫 장면에 나오는 출근길 풍경은 조금 다르다. 영국 애시버리에서 유스턴까지 가는 오전 8시 4분 완행열차. 기차 통근에 이골이 난 듯 짜증 섞인 한숨을 픽픽 내쉬는 사람들 속에서 레이철이라는 여인만은 눈을 빛내며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눈길이 향하는 곳은 기찻길 옆에 있는 빅토리아 왕조풍의 2층짜리 연립주책. 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에 사는 두 남녀에게 레이철은 각각 제이슨과 제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혼자만의 망상을 펼치며 시간을 보낸다.



사실 레이철은 출근할 직장이 없다. 그녀는 지독한 알코올 중독으로, 술 때문에 생긴 실수로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같이 사는 친구 캐시에겐 해고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은행 잔고가 바닥을 보이지만 직장을 구하는 건 말뿐이고, 새출발할 용기를 내기 보다는 다른 여자랑 바람이 나서 자신을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 기찻길 옆 집에 사는 제이슨과 제스 커플은 레이철이 살아가는 유일한 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며 레이철은 떠나간 사랑을 그리워하고, 그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며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은 행복을 헤아린다. 어째 자신의 행복은 보지 못하고 남의 행복만 넋 놓고 보는 요즘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그런 레이철이 사건에 휘말린다. 매일 기차 안에서 훔쳐 보았던 여인 '제스'가 실종되는 사건의 진상을 우연히 레이철이 목격한 것이다. 레이철은 제스가 왜 실종되었는지,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알코올 중독인 데다가 실업자에 범죄를 일으킬 뻔한 전력이 있는 그녀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 심지어는 레이철조차 자신의 기억을 확신하지 못하게 된다. 하필이면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단서가 될 만한 기억만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처음엔 망상하길 좋아하고 의지력도 약하고 산만하기까지 한 레이철이 참 미덥지 않았다. 미덥지 않은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며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은 지금은 다시 한 번 소설을 읽으며 레이철의 시선과 감정을 따라가보고 싶다. 통근 기차 안에서 레이철이 본 것이 제이슨과 제스라는 망상 속 남녀 주인공이 아니라, 레이철이 가지지 못한, 아니 박탈당한 행복과 사랑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소설을 다시 읽는다면 레이철을 직장도 없이 출근하는 엉뚱한 여자, 남의 삶을 엿보는 수상한 여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박탈당한 억울한 여자, 남에 의해 굴절된 삶을 의심조차 안 한 가엾은 여자로 여기며 읽어보리라.



매일 아침 출근길에 마주하는 비슷비슷한 얼굴들에도 혹 레이철 같은 사연이 숨어있지는 않을까. 꼭 레이철 같은 사연은 아니더라도, 어디서나 볼 법한 직장인의 얼굴을 한 그들이 사실은 복권에 당첨되었는데 취미로 회사원 코스프레(?)를 하는 중이라든가,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유기한 뒤 뻔뻔하게 출근하는 척하는 중이라든가 하는 건? 왠지 오늘 출근길은 기분이 퍽 다를 것 같다. 불금이라서만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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