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 누구와, 어떻게, 무엇을 위해 일할 것인가?
제현주 지음 / 어크로스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에 접속하면 원하지 않아도 친구나 선후배 소식을 알게 된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기도 한 그들의 생활을 보면서 내가 그들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실감한다. 아르바이트 수준의 급료를 주는 직장에 다니면서 (팔리지 않는) 글을 쓰고 (통과되지 않는) 기획서를 보내는 나날, 만나는 사람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스스로를 단련하는 나날을 그들은 알까. '내리막 세상'을 탓하다 못해 스스로 내리막을 자처하고 일찌감치 '일하는 노마드'가 된 삶을 그들은 이해할까.




<내리막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는 저자 제현주가 오늘날의 '일'에 대해 연구하고 고찰한 결과를 담은 책이다. 저자는 맥킨지, 크레딧스위스, 칼라일 등에서 기업경영 및 M&A, 투자 분야 전문가로 10년간 일하고 현재는 협동조합 롤링다이스 대표이자 사회적 경제 분야의 경영 컨설턴트, 번역가, 작가로 일하고 있다. 여러 직장과 직업, 일의 형태를 경험한 저자에 따르면 더 이상 아버지 세대가 누린 종신고용, 평생직장은 없다. 경제성장은 물론 직장과 직업의 발전 또한 기대할 수 없는 내리막 세상에서 그래도 밥벌이를 해야하는 사람들의 선택지는 노마드가 되어 여러 직장과 직업을 표류하는 것뿐. 여기까지는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들의 설명과 다르지 않다.




이 책이 특별한 점은 저자가 대안으로 공동체의 삶을 제시하는 점이다. 직장 생활하는 틈틈이 책을 읽고 글쓰는 모임을 이끌었던 저자는 퇴사 후 친구들과 공동으로 출자하여 공동으로 경영하는 협동조합 롤링다이스를 세웠다. 롤링다이스는 전자책을 출판하고, 사회적 경제 조직들을 위한 컨설팅과 연구 사업을 한다. 조합원 대부분이 퍼스트 잡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래의 관점으로 보면 롤링다이스는 직장이 아니며, 협동조합이니 회사도 아니다. 각자 업무외 시간을 할애해 롤링다이스 일을 보고, 롤링다이스를 통해 개인적인 꿈을 성취하고 서로의 꿈을 지지한다. 이런 형태의 일도 가능하다니! 직장을 그만두면 사업을 하거나 1인 기업, 프리랜서로 혼자 일하는 줄만 알았는데 사업을 하지 않고도 여럿이 함께 일하는 방법이 있다니 신선하다.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로서 솔깃한 대안이 아닐 수 없다. 




일을 하든 하지 않든, 혹은 어떤 일을 하든 간에 한 번쯤 해보았을 고민에 대한 저자의 답도 흥미롭다. 내가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이 뭔지, 좋아하는 일과 잘 하는 일 중에 어떤 걸 직업으로 택할지 고민하거나, 막상 해보니 자신의 적성과 안 맞는 일임을 깨닫고 후회하거나, 보수가 좋으면 근무 조건이 나쁘고, 근무 조건이 좋으면 보수가 나빠서 갈등하는 등 일 때문에 생기는 트러블이 허다하다. 여기엔 사회 시스템의 문제도 있지만,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지 않거나 욕망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선택에 따른 기회비용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는 개인의 문제도 있다. 스스로 '일하는 노마드'가 된 건 좋은데, 기왕이면 그냥 노마드가 아니라 돈 잘 벌고 남들 보기에도 어엿하게 사는 노마드가 되고픈 나의 마음은 욕심일까. 아무래도 나의 표류는 꽤 길어질 것 같다. 




노동은 화폐로 환산되는 한에서만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 가치가 높아야 자신과 가족의 배를 채운다. 그러나 밥벌이야말로 귀하다지만, 누구든 밥벌이만으로 인생을 채우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을 둘러싼 모순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한 욕구를 일 하나로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p.10)




많은 사람이 입버릇처럼 '일하기 싫다'고 말하지만 싫은 것은 대개 일 자체라기보다 일이 놓인 조건이다. 그저 싫다, 괴롭다 토로하는 대신 정확히 어떤 부분이 싫은지 구체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거기서부터 무엇이든 하나씩 지금과는 '다르게' 해보아야 비로소 실마리가 드러난다. ... (중략) ...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알았기에 그들은 기꺼이 '다르게 사는' 비용을 치를 수 있었다. 그 덕에 그들은 일의 주인 자리에 뚜벅뚜벅 오를 수 있었다. (p.49)




요리는 요식업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만화와 소설을 좋아한다고 출판업을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ㄷ씨와 그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요리, 만화와 소설은 일이 아니다. 요식업의 일에는 진상 손님과 승강이를 벌이는 것도 포함된다. 재료비와 인건비를 따져서 음식 값을 정하느라 골머리를 앓는 것도 들어 있다. ... (중략) ... 그에 반해 "가르치러 왔다고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릴 필요가 없어 좋은 일이 현실에선 오히려 진짜 좋아하는 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pp.55-6)




마지막 두 해 (물론 당시에는 그게 마지막 두 해가 될지는 몰랐지만) 갑작스레 시간이 많아졌다. 해야 할 일의 양이 줄어들었고 회사에 앉아서도 이른바 '딴짓'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여유를 즐겼다. 그렇지만 그 상태로 시간이 조금 흐르자 오히려 통제력을 잃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이 없음에도,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장소에 내 몸을 가져다 둬야 한다는 사실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일의 대가를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시간을 판 대가, 즉 내 자유의 일정 부분을 포기한 대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 둘은 스스로 내 일상을 통제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다. 내 자유에 아무리 비싼 값이 매겨진다 해도 그걸 팔아서 살고 있다는 실감은 뼈아팠다. (p.168)




많이 일하고, 많이 괴로운 사람이 능력자로 인정받는다. 아니, 정확히는 많이 일한 것처럼 '보이고' 많이 괴로운 '티'를 내는 사람이 좋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보여주기 위해 쓸데없이 만들어내는 일이 난무한다. 일종의 군비경쟁인 셈이다.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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