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진 옷장을 정리하며 - 힘들고 아픈 나를 위한 치유의 심리학
게오르크 피퍼 지음, 유영미 옮김 / 부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물론 많은 사람들이 사건을 정확히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그 과정에서 밀려오는 격한 감정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두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억에 자물쇠를 채우고 싶어 한다. 종종 방어 메커니즘까지 작동해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을 부분적으로, 때로는 전체를 가린다. 나쁜 일을 겪었지만, 그것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회피 전략으로 일관해 온 사람의 상황을 나는 곧잘 '쏟아진 옷장'에 비유한다. 

 

"옷장이 넘어져 속에 있는 것이 모두 다 쏟아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놀란 나머지 옷장을 얼른 일으켜 세우고, 모든 물건을 그 안으로 쑤셔 넣고는 얼른 문을 닫았다고 해 봐요. 그러면 이제 옷장 속은 엉망진창일 거예요. 제자리에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겠지요. 정돈하지 않고 무리하게 쳐넣은 옷가지들 때문에 옷장 문이 다시 열리곤 해요. 이렇게 옷장 문이 열리는 것이 바로 계속해서 갑자기 기습해 오는 플래시백이라 할 수 있어요. 당신은 연신 문을 닫으려고 애쓰죠. 다르게 해 볼 시간도 에너지도 없어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더 이상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해요." (p.183) 

 

 

나는 처음에 이 책이 옷장 정리에 관한 책인 줄 알았다. 막상 책을 받아보니 부제가 '힘들고 아픈 나를 위한 치유의 심리학'. 저자 게오르크 피퍼는 독일의 심리학자이자 국제적인 트라우마 전문가. 옷장 정리법을 다룬 실용서가 아니라 정통 심리학자가 쓴 심리학 책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지난 25년 동안 독일 보르켄 광산 붕괴 사고,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 지구촌 각지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 생존자들을 연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전문가이다. 2004년 동남아시아 해안가를 휩쓴 쓰나미 재해로 조카를 잃은 저자는 그 후로 학문적인 접근 방식을 버리고 직접 피해자들을 만나고 치유하며 현실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최악의 해결법은 쏟아진 옷장에 옷을 억지로 쑤셔넣듯이 고통을 부인하며 입을 꾹 다무는 것이었다. 반대로 힘든 상태임을 시인하고 사람들에게 감정을 털어 놓을수록 해결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대부분의 문제들이 그렇듯이 혼자서 끙끙 앓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과정은 험해도 결과는 더 좋을 수 있다.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세월호 사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고는 사상자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이웃, 나아가 온 국민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상태로 몰고 갔다. 어린 학생들이 순식간에 사고의 피해자가 되는 모습을 보며 어른들의 안일한 태도에 분노하고, 지지부진한 사고 처리 과정을 보며 안전에 대한 신뢰를 잃고, 진흙탕 개싸움꼴인 사고 후 상황을 보며 좌절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사고가 있은 지 벌써 수 개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야의 정쟁에 막혀 정작 사고의 당사자인 유가족들이 적절한 보호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고를 정면으로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몰고갈지만 염두하는 이들을 보며, 쏟아진 옷장을 억지로 쑤셔넣는 꼴을 떠올린 건 과장일까?

 

 

이 사고가 유난히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이유 중에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 씨랜드 참사, 대구 지하철 참사 등 지금까지 있었던 참사가 플래시백(flash-back)된 탓도 있다. 한때 나는 백화점에 가거나 한강 대교를 건너거나 지하철에 탈 때마다 비상구부터 찾는 습관이 있었다. 이런 습관이 한동안 없었다가 요즘 다시 생겼는데, 아마 세월호 사고탓인 것 같다. 만약 참사 때마다 적절한 피드백이 있었다면 지금 내가 덜 불안하고 힘들지 않았을까? 저자 또한 '위기 후에 가능하면 빨리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서, 가능하면 전과 똑같이 생활하고자' 하지 말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고백하고 그런 충격을 극복하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조언한다.(pp.130-2) 세월호 사고라는 국가적 재난과 이로 인한 마음의 고통을 추스르기 위해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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