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을 보았다 - 분노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이얼 프레스 지음, 이경식 옮김 / 흐름출판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생각해보면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이유는 인간 본성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중, 고등학교 내내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하고자 했던 나는 원서 접수 막판에 정치외교학과가 있는 사회과학계열로 전공을 바꿨다. 신방과가 거품이라는 말을 듣고 그럴 바엔 관심 있는 분야의 공부를 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에 즉흥적으로 바꾼 것이었지만(국제부 기자나 외국 관련 프로그램 PD가 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직관을 따르기 잘했다 싶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신문방송학은커녕 방송 자체에 대한 흥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을 뿐 아니라, 정치학의 주요 연구 주제 중 하나인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권력의 본질은 무엇인가, 폭력은 어떤 상황에서 발생하는가 등등에 대한 의문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늘 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탐사보도 전문기자 이얼 프레스가 쓴 <양심을 보았다>의 첫 장을 읽는 순간 작가와 나의 관심사가 어쩌면 이렇게 일치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42년 독일 유제푸프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책을 읽던 저자는 학살 명령을 받은 경찰대원들 중에 명령을 거부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상사가 명령을 내리면 부하는 선택의 여지 없이 따라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고 당시 경찰대원들 역시 그러했으리라고 믿었는데, 생과 사가 오락가락하던 그 순간에 몇몇 대원들은 상사의 명령을 거부하고 학살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했던 것이다. 반대로 나머지 대원들은 선택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사의 명령에 복종해 학살에 가담하기를 원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낳은 것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저자는 다수의 폭력을 거부하고 양심을 택한 네 명의 실제 인물들의 삶을 추적했다.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1938년 나치의 핍박을 피해 독일, 오스트리아부터 탈출한 유대인 이민자들을 받아들인 경찰관 그뤼닝거다. 경찰관인 그는 상부로부터 이민자들을 받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을 입국시켰고, 그 대가로 비극적인 여생을 살았다. 그는 특별히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도, 반골정신이 강한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조국인 스위스를 끔찍하리 사랑하고 법과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는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사회에 반기를 들고 명령을 거부하는 사람은 날 때부터 그렇게 규정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뤼닝거에 이어 등장하는 1990년대 초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간 전쟁 당시 몰래 크로아티아인들을 구한 세르비아인 야초, 이스라엘 군대가 점령한 지역에서 근무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스라엘 최정예 특수부대 대원 아브네르, 뉴욕 월스트리트에 위치한 유명 금융사의 내부 비리를 고발한 레일라 역시 남들보다 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저자는 이들이 남들과 달리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친밀성을 든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심리학자 밀그램의 전기 충격 실험을 예로 들며 '언제라도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상태와 희생자에 대한 친밀성은 반비례한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선택으로부터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거나 본 사람은 감정에 반하는 선택을 하기가 어렵다. 반대로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나 자신과 무관한 사람에 대해서는 선택에 대한 감정적 부담을 덜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이 친밀성을 막는 요인은 무엇일까? 저자는 관료제와 책임 소재의 분산, 그리고 공동체로부터 배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을 든다. 다수의 계층으로 이루어진 관료제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분산시키며, 결과적으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행위를 하게끔 조장한다. 관료제에 대한 충성은 공동체로부터 배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포함되는데, 남과 다른 소리를 내서 남들의 비난을 받는 것, 이로 인해 혼자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결국 양심에 반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해악이다.

 

 

악으로부터 선을 지키기 위해 결집한 공동체가 결국에는 선을 무시하고 악을 조장한다니. 이런 아이러니를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오늘도 수많은 이들이 턱밑까지 차오른 '아니오' 대신 '예'를 말한다고 생각하니 씁쓸하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당히 '아니오'를 외치고 있는 보통 사람들이 있으리라. 이들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사람이, 든든한 힘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