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미디어창비 / 2022년 12월
평점 :
해외로 이주한 한국인은 국적이 바뀌어도 마음 깊은 곳에는 우리 이야기와 우리 땅이 각인되어 있는 모양이다. 토론토 대학에서 역사와 문학을 전공한 허주은은 제주의 신비한 자연환경을 아픈 역사와 함께 파노라마처럼 소설에 펼쳐놓았다. 제주의 바다, 오름, 동굴, 숲과 바람, 해녀들의 숨비소리, 조랑말의 말발굽 소리가 공녀(貢女)의 슬픈 역사 위에 펼쳐진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용암동굴 속 호수의 모습도 일부 등장한다.
작가는 고려시대 이곡이 원나라 황제에게 우리 처녀들을 공녀로 데려가는 것을 금지해달라고 요청한 편지를 읽으면서 한국 여성에 대한 소설을 쓰고자 했다고 한다.(도서 423쪽 인용)
소설은 범죄를 수사하는 환이가 비밀을 하나씩 풀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400쪽이 넘는 소설이지만 끝까지 몰입감있게 읽을 수 있다. 다만 가끔 '거실'같은 서양문화에 있는 단어들이 제주의 역사에 끼어들어와 독서에 멈칫거림이 있지만 번역 자체는 애쓴 흔적이 많이 보인다.
소설에서 특히 관심이 간 것은 세 아버지의 이야기다. 옳은 길을 가르치지만 불친절한, 친절하지만 이면에서는 권력을 이용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폭력을 사랑의 방법으로 택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고단한 역사 속에서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뭐든 한다. 그것이 대의와 갈등을 일으키며 문제적 사건들이 생겨나고 인간관계가 복잡해 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나은 것을 받아야 마땅한 이들에게 시련을 주고, 선한 행동을 하려는 사람들의 앞길을 장애물로 가로막지. 그러는 동안 가슴에 악을 품은 자의 길은 수월하게 뚫린다네. 악을 퇴치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는 것은 없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그 사실을 일찍 받아들일수록 삶도 편해질 것이오." (사라진 소녀들의 숲, 243쪽.)
마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홍목사의 말을 들여다보면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명나라에 조공을 바쳐야 하는 조선의 상황에서 이를 위한 공물을 걷어야 하는 목사는 자신의 정의와 국가의 부조리 사이에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좌절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길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머릿속에 있는 계획은 좀체로 현실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저런 자료들은 주인공의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고, 사건을 더 미궁에 빠지게 만든다. 환이와 매월의 대화를 보면 갈등의 원인은 어떤 신념이 생각의 배경으로 있는지가 기준이 된다.
"책이나 지도에 코를 박고 어떻게 수수께끼를 해결하겠다는 거야?"
"매월아, 원칙이라는 게 있어. 지도는 따라가라고 존재하는 거야."
"아니, 지도는 길을 잃었을 때 활용하는 거야. 우리가 길을 잃지는 않았잖아."(사라진 소녀들의 숲, 195쪽.)
#사라진소녀들의숲 #창비
#소설 #고려 #공녀 #아버지 #길
막다른 길은 언니 머리에나 있는 거지. 찾고자 하면 언제든 다른 출구를 찾을 수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