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0
헤르만 헤세 지음, 황승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헤세에게 몰락이라는 개념은 현실적·물질적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카오스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싹 트는 것을 의미한다. 몰락은 모든 대립을 지양하고 대립쌍들을 통합하는 사고를 표현할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며, 클링조어의 자화상에서 최고조에 다다른다.”(p117)
헤세의 작품들을 읽으면 주인공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나 방식이 비슷한 면이 있다. 그는 치열한 삶의 통찰 속에서 몰락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간다. 그들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 때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전부를 던지며 살아간다. 그런 그의 이야기들은 읽고 나면 항상 나에게 질문을 남긴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고. 무엇을 위해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고 있느냐고.
그래서 자신에 대한 각성을 주는 헤세의 작품들은 읽은 후에 여운이 길다.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은 헤세의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간 작품으로 유명한 화가 클링조어가 생애 마지막 여름 동안 모든 생명력을 불태워 자화상을 완성한다는 내용이다.
특히 이 작품은 헤세가 1차 세계대전의 폐해와 가정의 붕괴라는 이중고로 정신적 죽음의 문턱에 서 있던 1919년 여름 약 네 주 만에 신들린 듯 써 내려간 것으로, 그의 고뇌와 열정이 작품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당시 그는 치료의 일환으로 그림을 시작했는데, 1925년의 어느 편지에서는 “내 생애 가장 힘든 시기에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려는 시도가 나에게 위안을 주고 나를 구원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미 오래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p91
“얼굴을 풍경처럼 그렸는데, 머리칼은 나뭇잎과 나무껍질을 연상시켰으며, 눈구멍은 바위 틈새 같았다. 멀리서 보면 산등성이가 사람 얼굴처럼 보이고 나뭇가지가 손발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림을 본 사람들은 단지 우의적인 시각으로 이 그림도 자연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이 책은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 구원이 되었다는 시기에 지은 작품이다. 그림을 그리듯 그린 독특한 문체로 규범에 벗어난 문장들도 많기도 하지만 풍경화를 감상한 듯 아름다운 묘사가 많다. 길고 긴 묘사에 한번 읽고는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들도 있었다. 그러나 오감을 통해 모든 사물이 하나가 되는 몰입의 단계가 오면 충분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그의 말처럼 그의 문체를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를 행복감에 미소가 지어지는 순간을 만날 것이다. 클링조어가 자연과 그림들이 하나가 되어가 듯, 그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그림 같은 문장 끝에선 자기 내면에 이르게 될 것이다.
평생 인간의 삶과 내면에 대해 고민하던 헤르만 헤세.
한편의 깊은 울림은 주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그림 작품을 감상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