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들과 귀족들은 언제나 누굴 괴롭힐 준비가 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아랫사람들 역시 언제든 괴롭힘당할 준비를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구별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받은 명령이 그저 우리를 고생시키기 위한 것인지 아닌지.
왕녀님은 너무 강하셔서, 가끔 손가락만 까딱하셔도 그 바람에 날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잊으시는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 잘 아시거나요. - P331
용서를 구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저를 몇 번이고 때리셔도 만족하지 못하실 것을 압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왕녀님을 채워 드릴 수가 없습니다. 왕녀님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왕녀님의 인간성을 소실시키지 않고서는 행복을 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이도 저도 아닌 편에 서서 어물거릴수록 저는 야속한 존재가 되어 갑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원치 않는 상처를 주며 점점 슬퍼집니다.
얼얼하게 달아오른 뺨에 차가운 손바닥이 와 닿습니다. 왕녀님의 선연하신 이목구비가 다시금 코앞까지 다가옵니다. 극한의 고통 후에는 극한의 희락이 따르는군요. 이것은 천국인가요, 지옥인가요? 왕녀님의 눈에 고인 것은 눈물인가요?
그래요. 언제나처럼 은연중에 서로를 용서합시다. 다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계략을 꾸미고 비밀을 만듭시다. 언젠가는 또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서로에게 기대를 걸어 봅시다. 그게 우리가 잘하는 행위잖아요.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구원은 찾아올까요?
왕녀님.
저를 미워하지 마세요. 저를 버리지 마세요. 제발요. 저는 언제까지나 당신의 것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제가 아무리 당신의 것이라 해도, 저는 새장에 갇혀 평생을 살았던 울새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봄을 못 넘기고 땅에 떨어진 나비를 묻어 줄 것이며, 사냥꾼의 화살에 맞은 어린 사슴을 추모할 것입니다.
그 감정은 당신을 향한 충성심과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피어 보지도 못하고 스러진 작은 것들을 바라볼 때 당연히 느끼는 슬픔일 뿐입니다. 어찌 그조차 느끼지 말라고 하십니까? - P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