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을 호령한 발해 - 장하다 우리역사
현무와 주작 지음, 한상언 그림, 윤명철 감수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대륙을 호령한 발해

장하다 우리역사

현무와 주작 지음 / 한상언 그림

랜덤하우스코리아

 

이 책에는 발해의 시작과 번성, 그리고 그 이후를 풀어냈다. 말갈족과 함께 나라를 세운 대종영에서부터 발해의 마지막 왕인 애왕까지, 발해의 모든 것이 담겨있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역사 정보를 제시해 발해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하고있다.

6장에 걸쳐서

제1장 가자, 동으로! 세우자 고구려_ 대조영과 발해 건국
제2장 요동으로, 연해주로, 시베리아로_ 무왕의 영토 확장
제3장 발해의 제도와 기틀을 잡다_ 문왕의 체제 정비
제4장 동아시아 최강으로 거듭나다_ 선왕과 해동성국
제5장 쓰러진 왕조, 그러나 빛나는 역사_ 애왕과 발해의 멸망
제6장 발해 재건의 기치를 내걸고_ 발해 부흥 운동과 발해를 이은 나라들

의 순서이다.

발해가 우리의 역사라는 증거를 찾아보자면,

① 첫 번째, 발해 지배층의 90% 이상이 고구려 유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고구려 예당에서는 고구려를 부흥시키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멸망 이후,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당에 대해 저항을 계속하였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698년 고구려의 장군 대조영은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길림성의 동모산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습니다.

② 두 번째, 발해가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발해 왕이 자신을 고구려 왕으로 지칭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서기를 보면 발해의 3대 문왕이 일본에 국서를 보낼 때 자신을 '고려국왕 대흠무'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 계승 의식을 뚜렷이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발해와 일본은 200여 년간 발해가 35차레(동란국 한 번 포함해서), 일본은 13차레 사신을 파견하였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811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③ 세 번째, 발해의 미술 양식에 고구려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에서 발굴된 돌사자 상을 보면 고구려 미술의 웅장한 멋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④ 네 번째, 발해 지배층의 무덤 양식은 고구려의 돌방 무덤을 그대로 닮았다는 것입니다. 발해 고분 축조의 재료와 규모로 볼 때, 돌방무덤, 돌덧널무덤, 돌널무덤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이 밖에도 널무덤, 벽돌무덤 등도 있습니다. 돌방무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돈화현 육정산 고분에서 발견된 정혜공주의 무덤과 삼령둔 고분군에서 발견된 삼령고분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1949년에 발견된 정혜공주의 무덤은 천장이 말각 천정(묘실 네 구석 위에 삼각형 받침을 얹은 형식)의 구조인데, 이것은 고구려 후기의 큰 봉토돌방무덤의 구조와 같은 것입니다. 대체로 돌방무덤과 벽돌무덤은 왕족 등을 비롯한 비교적 높은 신분층이 사용한 무덤양식이고, 돌덧널무덤은 그보다는 하위의 신분층이나 관리들이 쓰던 것들입니다. 일반인들은 주로 돌널무덤이나 널무덤을 썼습니다.

2015.6.15.(월) 이은우(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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