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인상적으로 읽어서 줄리언 반스의 이 책도 사랑에 관한 뭔가 강렬한 인상을

줄 거란 막연한 기대를 갖고 보게 되었는데 좀 예상밖의 얘기들이 펼쳐진다. 열아홉 살짜리 남자아이와

마흔여덟 살짜리 유부녀 사이에 벌어지는 애정행각(?)이라 세속의 통념으로 보면 진부한 부적절한

관계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존 어빙의 '일년 동안의 과부'가 바로 떠올랐는데 39살의 매리언과

16살의 에디의 사랑을 그린 '일년 동안의 과부'의 커플이 이 책의 케이시 폴과 수전의 나이 차이보다

적어 그런지 몰라도 줄리언 반스가 표현하는 폴과 수전의 관계는 생각보다 열정적이지 못한 느낌이었다.

보통 세상의 잣대로 부적절한 관계로 규정되는 관계들은 나름의 열정으로 불타오르곤 하는데 저자

특유의 필체 탓인지 구체적인 묘사를 생략해서 그런지 폴과 수전의 관계는 특별한 뭔가가 있는 듯

하면서도 대부분 그런 관계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느낌이 그다지 들지 않았다. 사건 위주로 전개되는

스토리가 아니다 보니 조금 뜬구름 잡는 감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알랭 드 보통의 사랑에 관한 3부작인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우리는 사랑일까', '너를 사랑한다는 건'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그게 단 하나의 진짜 질문이다, 라고 나는, 결국, 생각한다'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하는

이 책에선 폴의 회상 형식으로 얘기가 전개되는데 일반적으로 어울리는 커플이라 부르기 어려운

폴과 수전의 사랑의 역사는 테니스 클럽에서 시작되었다. 테니스 클럽에서 경기를 마치고 수전을 폴이 차로 집까지 태워다주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지는데 각자 서로의 두 번째 애인이던

두 사람은 나름 여느 커플 못지 않게 은밀한 사랑의 추억들을 만들어나간다. 나이 많은 여자와

어린 남자 커플의 전형적인 모습인 여자가 리드하는 그런 관계라기보단 둘 다 아직 사랑에 문외한인

듯 첫사랑에 빠진 사람들처럼 굴곤 한다. '첫사랑은 삶을 영원히 정해버린다. 첫사랑은 그 뒤에

오는 사랑들보다 윗자리에 있지는 않을 수 있지만, 그 존재로 늘 뒤의 사랑들에 영향을 미친다.

모범 노릇을 할 수도 있고, 반면교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뒤에 오는 사랑들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다. 반면 더 쉽게, 더 좋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물론 가끔은, 첫사랑이 심장을

소작해버려, 그 뒤로는 어떤 탐침을 들이밀어도 흉터 조직만 나올 수도 있지만'. '첫사랑은 늘

압도적인 일인칭으로 벌어진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압도적 현재형으로, 다른 사람들,

다른 시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앞에 열거한 문장들처럼 작가는 첫사랑은

물론 사랑에 대해 여러 주옥같은 말들을 열거해놓아 이 책을 읽다 보면 폴과 수전의 사랑 얘기보단

사랑의 본질이 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폴과 수전은 안타깝지만 부적절한 관계의 숙명적인

코스들을 밟아나가게 되고 아련한 사랑의 기억으로만 남게 된다. 사건 중심으로 전개되는 얘기가

아니어서 사실 조금만 방심하면 집중력이 떨어지기 쉬운 책이었는데, 폴의 공책에 오랫동안 살아남은

'사랑에서는 모든 것이 진실인 동시에 거짓이다. 사랑은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한

가지 주제다.'내 의견으로는, 모든 사랑은, 행복하든 불행하든, 일단 거기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게

되면 진짜 재난이 된다' 등 사랑에 관한 격언급의 문장들을 만나 곱씹어볼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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