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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린
장래이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19년 12월
평점 :
"누구의 삶도 마찬가지야. 네가 빼돌리는 무수한 삶들은,
이곳에 모여들어 너의 홀린이라는 어항을 채우는 물고기가 되겠지.
그건 너의 유치한 자기만족을 위한 거지.
그들의 삶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야.
너는 그들로부터 아무것도 요구할 권리가 없어."
나 스스로도 그런 공상을 많이 해봤다. 현재의 과학기술문명은 사후에 얼마만큼 발전해있을 것인가? 그 발전은 과연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것인가라고 말이다. 짧은 식견으로는 그 범위와 속도를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겠지만. 여기서 갈라지는 또 다른 출발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환경을 손댈 것인지 신체를 다른 환경적응이 가능하게 개조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과 그 선택에 관한 질의와 응답이 발생할 테고 그에 대한 사례해설집이 바로 이 소설 <홀린>이 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류문명을 자자손손 번창하기 위한 종족번식의 문제점부터 해결해야 한다. 더 이상 섹스가 번식의 수단이 될 수 없는 세계에선 섹스로 태어난 인간을 1세대로 규정짓는데 환경변화에 적응 못하고 자연도태 할 수밖에 없는 이들은 생로병사의 주기가 짧아 반백년도 채 살지 못한다. 오히려 평균수명이 늘어날 거란 현재의 기대감을 무색케 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들보다 업그레이드된 단계에는 2세대라는 인류가 있어 바이오공학의 최첨단 기술적 산물들을 몸에 이식시켜 새로운 생명을 누리게 된다.
이쯤해서 멈추었다면 달라졌을 인류의 진화단계. 멈출 순 없어. 정부의 비밀 프로젝트에 의하여 더욱 업그레이드된 신인류가 탄생하였으니 그들을 3세대라고 부른다. 특징이자 강점이라면 데이터를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인류를 데이터 덩어리로 간주하여 바야흐로 이 지구에 닥친 멸종위기를 탈출할 도구이자 수단화하는데 특화되어 있는 기이한 집단이다. 그래서 이 소설 속 주인공인 미래인류연구소 연구원 박재희에게 두 가지 시험이 닥치게 되는데....
첫 번째가 1세대 연인인 강은성의 임종이 멀지 않았다는 점. 3세대인 자신과 함께 영생을 누릴 수 없음에 고민하다가 은성의 생체데이터를 해킹해 몰래 수집하게 된다. 은성의 의사와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빼돌렸던 걸 모아모아 소프트웨어로 재탄생 시키는데 까지 성공하지만 은성의 분노와 반발은 어쩌란 말인가. 이 아픈 가슴을. 아, 어쩌란 말인가, 이 아픈 가슴을. 게다가 같은 3세대인 쌍둥이 오빠 재희의 갑작스런 사망 또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죽었다고 믿었던 오빠 재희가 실은 모종의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니. 1세대의 생체 데이터를 어딘가로 집단전송 한 뒤 그곳에서 수집한 데이터만으로 새로운 인류세계를 조성하려 했음을 알게 된다. 그러려면 신체는 죽음의 상태에 있어야만 가능하다. 결국 남매는 각자의 가치관에 의하여 연방정부에서 승인내리지 않은 생체데이터 불법 전송과 사익용도로 활용하려고 했음이다.
제목이 “Hollin”이기도 해서 어떤 의미를 알아보고자 했으나 이것은 세기말적 현상에 다다른 인류가 특정종교에 홀려 현실도피 하고자 했던 행동들과 유사하기도 해서 그냥 홀렸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아니라면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특정 장소를 떠나는 상황, 즉 엑소더스의 의미와도 일맥상통 되는 것도 같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들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탈출한 내용이 담긴 성서의 '출애굽기' 같은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기대수명 만큼 살다가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는 자연순리에 순응할 권리를 누구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냐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찬성과 반대의 입장을 다 들어보자면 어느 한쪽에도 섣불리 손을 내밀어 지지할 수 없는 형국이었다, 다만 나라면... 나라면 그것이 폭주라 할지라도 유혹이라는 미명하에 굴복하고 말았을 것 같기도 하다. 나란 놈은 나약하니까, 불안하니까, 어쩔 수 없는 존재라서 이 스펙타클함에 눈치보다 묵묵히 따라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