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의 행태가 심심치 않은 양상을 보여준다. 과거의 잘못된 일들을 사과하고 풀어나가기 보다는 오히려 은폐하고 부정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전번 정권에서 가장 치욕적인 외교전략 중에 하나가 일본군성노예로 학대받은 그분들에 대한 처우이다. 100억에 국가와 민족의 자존심을 팔아먹는 현실에서 많은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그런 처우를 하던 인간들만 모이다보니 과거에 일어난 비참한 역사를 드러내기보단 오히려 감추려고 노력했다. 일본군이 과거 촬영한 사진 중에 위안부에 끌려간 여성의 사진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그녀들을 유린하고 밟는 것도 모자라 끔찍하게 살해한 기록이 사진으로 나온 기사를 보았다.

 

예전에 그런 사진을 찾았지만, 국가에서 예산을 반영해주지 않고 그런 사진을 드러내는 것을 원하지 않아 수면 아래 감추었지만, 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람을 끔찍하게 살해하고 그 시신을 땅에 매장하는 사진이 세상에 나오자 UN에 간 일본 외교성 직원은 그것은 자신들의 과거가 저지른 죄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최근 일본에서 이런 관점을 정치권과 언론, 심지어 교육계까지 침투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일본 유치원 교육방식을 보는데, 순간 소름이 돋았다. 독도를 자기들 것이란 점, 중국과 한국이 일본을 왜 미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 게다가 일본 천황의 신위에 계속 참배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일본에서 최근 법안개정 중에서 정부의 정치적 색과 맞지 않거나 그런 기미가 보일 경우 그 일본국민을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악법을 준비한다는 기사를 봤다. 이미 아베 총리의 조상이 일본전범 A급이란 점, 그가 전형적 극우성향 정치인이란 점에서 일본의 형태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다시 회귀하는 무리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조류에서 역사는 아주 중요한 전략이다. 역사는 교육이기도 하나, 역사 그 자체가 그 나라의 국민을 대변하는 하나의 이야기들이다. 역사라는 이야기 거리는 교육만이 아니라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소설,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로 쏟아 나오는 것이다.

 

일본 청소년이나 청년들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그 중에 좋아하는 장르는 당연히 전쟁이나 전투 장르이고, 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국시대를 좋아한다. 오다 노부나가를 비롯한 아케치 미츠히데, 다케다 신켄 등 같은 영주 군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인물로 보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쓰 같은 인물이다. 임진왜란 전후와 일본 내 세키가하라 전투는 일본역사에서 에도시대를 열게 된 관문이었다. 문제는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존재성이다. 히데요시 일족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로 모조리 섬멸시켰다.

 

그가 일본 전국을 통일한 점에서 대단한 인물이나, 그의 모습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서는 상당히 미화되어 있다. 특히나 전국무쌍에서 보여준 히데요시는 천하인(天下人)로 묘사고, 그의 정부인 네네는 상당히 포용성이 높은 여성으로 보여준다. 역사적 사료에서는 전혀 다르나 게임과 애니메이션이란 콘텐츠는 그러하다. 이게 문제가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사회를 두고 말하자면 칭호는 참으로 많다. 하지만 이것만은 그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로 드라마천국이다. 한국사회에서 드라마는 모든 대중들의 공통관심사이고, 월화 내지 수목, 주말드라마의 흥행은 한국사회에 늘 새로운 신드롬을 안겨준다.

 

드라마 장르에서 한국역사를 소재로 한 사극 역시 많이 등장한다. 예전에 인상 깊게 본 드라마 중에 <불멸의 이순신>이란 작품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드라마로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사실적 역사자료를 토대로 이야기를 붙인 것이다. 그러나 막상 보면 조금 다른 내용들이 종종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과 원균을 어린 시절 만난 적이 없고, 또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원균이 보여준 모습은 상당히 무인 그자체로 묘사한다. 남자답고 거칠게 없는 자로 말이다. 원균을 바라본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가 실제로 선조 후기 임진왜란 공신목록에서 선무원종공신록권(武原從功臣錄券)에서 이순신과 권율과 함께 1위로 책정되어 있다.

 

원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 그를 나름 훌륭한 무관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사료를 다시 정리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드라마와 역사적 사료는 기본적인 배경은 유사할 수 있지만,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관점은 올바를 수 없다. 역사는 바로 이런 것이다. 어떤 실제 행위에 대한 기록에서 진실에 대한 관계성을 두고 사실에 대한 관점은 보는 이만 아니라 정치적 권력과 시대적 흐름에 따라 새롭게 조우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가진다면 당연히 전쟁관련인물에 대한 평가를 어떤 식으로 내릴 것이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두고, 영웅시하는 문화콘텐츠를 비롯하여 그가 조선을 침공할 때 침략자의 이름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업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변질시킨다. 도쿠가와 정권은 조선침략에 대한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해 조선 앞바다를 노략질하는 왜구를 관리하고, 히데요시 일족과 그의 수뇌부를 모조리 숙청한다. 게다가 조선과의 외교와 교역을 재개하는 방식을 택한다. 임진왜란 당시 히데요시의 권력을 일본 천황보다 더 우위에 있었다. 히데요시 발언에 수많은 일본인들의 생명이 오고가는 시대였다.

 

임진왜란의 사료를 찾아보면 왜군들은 처음에 승기를 몰아 점령해 나갔지만, 일본 열도는 기본적으로 조선보다 온도가 높았고, 이에 따른 의복이나 음식문화가 많이 틀렸다. 일본과 한국의 음식을 뭔가 유사한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엄연히 존재한다. 임진왜란이 4월에 일어난 일이나, 조선시대 4월은 음력으로 계산했기에 지금으로 따지자면 5월 중후반 정도이고, 왜군이 충주의 신립부대를 섬멸하고 한양과 평양에 간 시점이 여름이다. 그 말은 곧 일본기후가 습하고 더운 점에서 일본보다 덜 습하고 더운 조선의 여름이 그들에게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토 마사요시를 비롯한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늦가을이 옥 눈이 내리는 겨울이 되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조선의 겨울은 일본에서 느끼지 못한 추위였고, 그들이 침공 시기에 가지고 온 옷은 겨울용이 없었다. 남측 부산과 거제 일원은 그나마 따뜻한 지역이나, 한양 위로 올라갈수록 추위는 무서운 적이었다. 왜군이 조선과 접전하면서 사망하게 된 이유가 전투 중 교전보다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병에 의해서였다. 풍토가 맞지 않은 점, 겨울에 추위에 의한 동사(凍死)와 감기 등은 치명적인 고통이었다. 가토 마사요시가 함경도로 가면서 정문부의 전술에 걸렸을 때 가장 큰 고역이 함경도의 차가운 겨울바람과 눈이었다.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아도 많은 병사가 죽었고, 숫자가 수백에 지나지 않은 의병에게 쫓김을 당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쟁에 끌려나온 왜군 내에서 동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임진왜란 사료를 보면 왜군 일반병사들은 어서 전쟁을 끝내고 집에 가고 싶어 한다. 전쟁에 나온 대부분의 장정은 영주의 명령에 의해 오거나, 조선에 가서 공을 세워 가계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온 것은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각종 질병, 바다의 이순신이 가로막고 있었다. 전쟁을 계속 하는 한 그들은 조선에 남아 생명을 잃을 각오로 총과 칼을 잡고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이니 그들은 자신의 군주인 관백 히데요시에게 원망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선의 임금 선조 역시 조선의 민중에게 원망을 받았지만, 왜군의 군주 히데요시 역시 일본의 민중에게 원망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전쟁에 나가면 자신의 아버지, 아들, 남편, 형제를 보내야했다. 먼 길을 떠나 시체조차 돌아오지 않으면 남은 가족의 마음은 어떨까? 수 십 만에 이르는 병사를 위한 군수물자 조달로 생필품이 부족해지니 더더욱 원망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군 전체가 배를 스스로 가르고 할복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무라이들이 아니다. 히데요시의 존재가 박멸될 때 일본은 에도를 지나 메이지를 맞이했다. 그리고 조선을 침략하게 되었다. 조선침략이 제대로 된 것은 임진왜란 밖에 없었다. 을묘왜변에서 전남지역의 왜구는 도순찰사 이준경에게 패배를 당했다. 임진왜란을 임금이 한양에서 몽진하여 의주까지 가고, 7년 동안 치룬 거대한 전쟁이다.

 

하지만 그 일이 일에게 하나의 역()에 불과했다. 그래서 풍태합조선역(豊太閤朝鮮役)이란 책이 나온 것이고, 일본 역사교과서에 임진왜란을 두고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이란 하는 것이다. 다행히 왜군은 조선의 수군과 의병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지만, 그 때가 잠시였지 을사늑약 이후 합일병합 그리고 해방 후 역사와 외교문제를 보듯이 우리는 결코 임진왜란이 끝난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의 승리를 거둔 전쟁이나 정말 승리한 전쟁인 것일까? 조선 인구 반 정도가 죽었고, 밭과 논을 황폐화되고, 성리학의 도리조차 사라졌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만든 주인공은 1위를 당연히 이순신이다. 그리고 이순신을 천거한 유성룡, 권율과 곽재우, 이항복과 이덕형 같은 문무 관료와 의병이 없었다면 우리의 국어는 훈민정음 한글이 아닌 가타가나의 일어였을 것이다. 이순신은 6갑자가 도래한 420년 전 사람이다. 그가 서가한지 400년이 넘어도 임진왜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해주게 한다. 전쟁이란 참 끔찍한 일이고, 전쟁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힘이 없는 일반 민중, 지금으로 보면 국민이다. 일제에 밟힌 그 어둠의 36년도 점점 잊어져 가는데, 임진왜란은 오죽할까?

 

하지만 이순신의 전쟁사는 세계 4대 해전에서 한산도 해전이 있었고, 그보다 더한 것이 명량해전이다. 이순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이순신이 대단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최근에 읽은 <이순신과 임진왜란>과 그리고 <난중일기>, 더 나아가 비봉출판사에서 제작한 <충무공 이순신 전서>에서 더 많은 것을 알았다. 비봉출판사 사장이면 창립자가 직접 책을 출판했는데, <난중일기><징비록>을 비롯하여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각종 장계와 사료들을 정리하여 이순신의 7년 전쟁을 찾아 떠났다.

 

그 내용 하나하나를 일일이 나열할 수 없지만, 진정한 적은 외적이기도 하나,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았다.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현자 곽재우>가 있었다. 곽재우 장군은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인물이나, 그가 최초로 의병을 거사한 인물인 점을 잘 모를 것이다. 곽재우 장군이 없었으면 이순신 장군의 전술이 성공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 유일하게 무사한 곳이 전남지역이었다. 전남의 길목을 진주성과 의령 정암진에서 잡아두었기 때문이다. 곽재우 장군이 경상남도에서 전라남도로 진출하는 왜군을 막았기 때문에 전라좌수영이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다. 곽재우를 비롯한 많은 의병들이 우후죽순으로 창궐하고, 산속에서 수행하던 승려들도 의승군으로 참전하여 조선의 민중을 구원하려 했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살생은 금지하고, 더구나 인간의 목숨을 헤치는 것을 최악으로 여겼지만, 조선의 백성들이 왜군의 칼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있는 게 더 큰 죄였다. 악귀의 칼날에서 조선의 민중을 구하는 게 진정한 불도였다. 문제는 이런 의병들이 너무 활약한 점이다. 곽재우는 조선선비 남명 조식의 마지막 제자이고, 조식 선생의 외손녀의 남편은 곽재우였다. 조식 선생이 차고 있던 방울과 칼은 수제자 김우옹과 정인홍에게 주었다. 정인홍을 비롯하여 김면 등 조식 선생의 문하생들은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웠다.

 

곽재우가 공을 세우자, 임금 선조는 시기했고, 게다가 관료들도 동서로 분당되어 서인의 관리들은 동인계열 관료 내지 의병을 모함하거나 서로 갈등을 빚었다.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의 일화도 그렇고, 동인계열에서 남인과 북인 역시 갈등을 빚었다. 선조가 의주행재소로 호종할 때 많은 신하들이 외면하다 행재소가 안정되자 여기저기서 찾아와 전쟁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망치고 있었다. 이순신의 승전에 좋게 여겼지만, 백성들이 이순신과 곽재우를 더 공경하자 선조는 질투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잘못된 소식이나 소문 그리고 주변 간신배의 말을 듣고 충신들을 헤치려 했다.

 

김덕령 장군은 아무 죄도 없는데, 반란군과 억지로 엮여 장살당해 죽게 되고, 그 계기로 수많은 의병들이 산으로 숨어들어갔다. 이순신 장군이 모함에 의해 백의종군하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발탁되는 과정에서 김덕령의 동생 집에 간 일화가 있다. 김덕령의 동생 역시 의병활동을 했으나 임금 선조와 간신배의 계략으로 형과 친우들을 잃었다. 평생 세상에 드러나지 않으려한 그의 모습에 안타까움만 더해간다. 이순신이 모함에 걸린 이유는 그의 인기도 있었지만, 그가 남인의 영수 류성룡의 비호를 받는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류성룡의 정치적 정적인 윤두수는 어느 정도 보면 영리한 신하지만, <충무공 이순신 전서>를 보면 정말 역적 간신배가 따로 없다. 원균을 기용한 점에서 선조와 똑같은 발상을 했지만, 막상 원균이 칠천량에서 패배 후 조선수군이 몰살하자 그 문제를 오히려 윤두수 같은 서인계열 신하에게 몰았다. 그리고 이순신이 명량에서 극적으로 승리하여 명나라 장수들이 이순신의 공을 치하하자, 선조는 오히려 이순신의 업적을 일개 무관이 해야할 일로 표현했다. 명나라 장수 앞에 머리를 숙이고 절을 하고 아부를 떨던 선조, 백성들은 죽어가고 있는데 정치적 입지만 신경 쓰고, 그가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왕좌를 전위한다는 교서를 내리고, 정치적 이권에 눈이 밝은 신하는 전위 양도를 반대하기 위한 사죄 모드로 돌입한다.

 

전쟁에서 각종 병권과 인사 업무, 그 외에도 처리할 공사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조정은 마비된 채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충무공 이순신 전서>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책을 읽으면 이순신 직접 만든 <난중일기>와 장계만 아니라 7년 전쟁동안 <선조수정실록>을 토대로 시기적으로 차례를 구성했기에 당연히 조정의 일들이 이순신 장군이 행하던 업적을 어떻게 풀어 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들은 모함을 당하고, 정작 전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은 시문놀이 빠져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급했다. 이런 자들을 몰아내지 않고 계속 조선을 지배했으니 히데요시의 원한은 뒤에 가서 풀린 셈이다.

 

일본은 그런 히데요시의 흔적을 지우려 하다 이제는 다시 국가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역사를 인지하는 방식이 곧 그 나라의 민족성이고, 그들이 원하는 이념이다. 일본이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군사 경영은 군비만 충당하는 게 아니라 백성들의 생계를 구원하고, 행재소의 임금에게 공물을 보내 조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정치경제학이란 학문은 없어도 정치경제학적인 자세, 게다가 목민관의 자세도 보여준다. 하지만 현실은 권력에 의해 내몰리고, 그 이후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면사(免死)라는 교지를 받는데, 그 면사첩은 선조가 내린 것이 아니라 명나라 황제가 이순신에게 내린 것이다. 이순신은 당색을 갖추진 않으나, 당색은 당연히 친구 류성룡에 의해 남인에 가깝다. 원균을 중용한 선조와 간신배 일원을 보면 대부분 서인계통이었다. 윤두수는 원균의 아내와 가까운 친척이었고, 서인의 조력을 받았던 원균은 통제사 자리를 이순신에게 빼앗을 수 있었다. 이순신은 평생 변방의 무관으로 고생했으나, 원균은 중앙정계와 연줄이 있었다. 전쟁 와중에 윤두수의 집에 뇌물이 갔다는 기록에서 조선의 백성은 배고 고파 굶주려 죽고, 저잣거리에 시체가 널려 있으며, 아비와 자식이 서로 잡아먹는 비참한 지경이 되었다.

 

모함을 받고 죽음의 위기에서 백성을 위해 몸을 던진 이순신의 삶을 두고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군사정권 시기 이순신의 이름은 군인이란 신분을 우상화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다 어느새 묻어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다시 이순신은 영웅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영웅은 영웅주의적인 인물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보통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늙은 노모를 두고 소식을 늘 기다리던 아들 이순신, 아들들이 아픈 것을 두고 고민하던 아버지, 비가 많이 와서 농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목민관 이순신, 군졸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덕장 이순신, 그는 강철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마음이 아주 섬세하고, 생각이 치밀한 사람이었다. 늘 위장이 좋지 않아 약을 입에 달고 다녔고, 몸살로 며칠이나 방에 앓아눕기도 했다. 그래도 늘 송사를 처분했고, 전장에서 부하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겼다. 원균은 술이나 마시고, 기생을 불려 음탕한 일에 재미만 보았다. 최후에 조선수군을 모조리 수장시켰으니 그 죄가 얼마나 깊은가? 이 책에서 이순신에 대한 행장록만 아니라 원균의 행장록을 수록했다. 이 책을 저술한 작가의 눈에 보이는 원균과 선조의 처사는 참으로 한심했다.

 

곽재우에 대한 기록을 봐도 그가 과거에 2위를 했는데도, 임금이 보기에 거슬린 문구가 있어 과거합격을 취소시켰다. 의병장을 탄압했고, 임진왜란 이후 청나라가 침공한 정묘호란 때 의병의 창궐이 거의 없었다. 나라를 구하는 자는 백성이고 나라를 만드는 자 역시 백성이니, 그 간단한 진리를 잊으니 그저 하늘을 원망하고 또 원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조금 재미난 기록이 나오는데, 선조는 원균이 실패해도 이순신에 대한 정치적 대항마로 이용했고, 원균이 전사한 뒤 원균의 부인에게 나라의 녹을 내려주었다.

 

그런데 광해군이 집권하자 말자 바로 원균의 처에게 나라의 녹을 내리지 않게 되었다. 이후 인조반정 이후 다시 서인들이 집권하자 원균의 아내에게 국가의 녹이 다시 내렸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알고 있었다. 이순신이 얼마나 분투했고, 원균이 얼마나 한심한지 말이다. 서인들과 선조의 전교양위 사건을 두고 가장 큰 피해자는 광해군이고, 그때 중간에 중재해 준 자는 류성룡과 일부 충신이었다. 나머지는 선조와 더불어 권력을 유지하려 했고, 변방의 장수는 군수물자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한 채 고생만 했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말고도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무의공 이순신이 생각보다 많이 시련을 겪는데, 그가 종친인 점도 있지만, 한편으로 학봉 김성일의 문인인 점, 학봉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제자이고, 류성룡과 같은 남인이기에 당색에 따른 견제가 있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자들은 외면 받고, 중앙에서 나라에 좀만 내는 자들이 승승장구하는 과거 그리고 현재에 이르는 사태를 보자니 역사란 반드시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하나의 가치이다. 지나간 역사의 기록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어떻게 가야할지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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