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과 임진왜란
이성무 외 엮음 / 태학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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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1712월을 보내 이제 20181월이 왔다. 2017년은 지금으로부터 420년 정유재란을 7번 갑자를 돌았던 해였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침공하는 왜구, 그들의 입장에서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이라고 한다. 일본은 한일강제병합을 이루기 전에는 풍태합조선역(豊太閤朝鮮役)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치룬 전쟁에서 이제는 일본 내부의 전쟁 수준으로 임진왜란을 다루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일본에서 임진왜라은 여전히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이란 시선이다.

 

전쟁에서 보여준 참혹하고 잔인한 행위를 숨기고, 마치 전국시대 열도내부의 통일전쟁을 하는 것처럼 단어를 바꾼 것이다. 중국에서는 아예 조선을 원조했기에 인심을 써준 것처럼 생각한다. 420년 전의 일이 아직도 한중일 삼국 관계에서는 쉽지 않은 양상을 보여준다. 피해자 입장인 조선과 조선의 후예인 한국인으로 보자면 참으로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조선의 역사를 두고 지나간 과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 참 바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아직도 이런 문제가 국가별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나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할 때 중국 최고수석은 난징대학살 기념을 위해 행사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난징학살이 일어난 지 100여년이 되어 가는데, 현재까지 중국에서 깊은 상처와 분노를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1945년 핵폭탄 투하에 따른 피해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한국에서 한국전쟁에 희생된 장병을 위령하고 있다. 국가의 존재에서 결국 그 국가는 역사의 의의를 찾지 않으면 현재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 국가란 역사란 중요하다. 국가에게 역사가 없다면 그것은 국가의 정체 그 자체가 없다고 똑 같은 것이다.

 

대통령이 중국방문 시 일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곳을 찾아갔다. 한국정부가 제헌을 한 시점인지 아니면 그 이전인지를 말이다. 어찌 보면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민주주의국가 체계를 가진 것이 100년인지 아니면 70년이지 가늠할 수 있는 계기이다. 우리가 민주주의 이념을 토대로 만든 국가가 100년을 유지했다면 한국이란 민주주의 국가는 비록 국토를 일제에게 박탈당해도 인민의 의지와 유지는 남아 국가는 그 모든 것은 그 나라의 사람에서 시작되고, 민주주의 국가야말로 인간이 우선이라는 보편적 이념을 보여준 것이라 여긴다.

 

역사를 다시 찾고 역사를 다시 읽은 후 해석하는 것은 지나간 일로 마무리 짓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시작되는 내일을 맞이하는 길인 것이다. 헬조선이란 단어가 시작된다. 헬조선이란 단어가 비로소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일 것이다. 백성이란 존재는 그저 착취당할 존재이고, 위정자는 국가의 존위보다 자신의 안전과 이익만 생각한다. 이순신이란 영웅이 등장하지만, 그 영웅주의적 논리를 앞세워 독재의 논리를 위해 이용했다. 최근 덕수 이씨 문중이 시끄럽다.

 

덕수 이씨에서 배출한 인물로 한국 성리학의 대가인 율곡 이이 선생도 있지만, 최고의 인물은 성웅 이순신일 것이다. 이순신 종가의 종부님이 숙종 임금이 내린 액판 현충사(顯忠祠)를 다시 내걸기 원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 시기 현충사의 휘호를 대통령이 한글로 적어 보냈지만, 사실 종부님의 말씀대로 이순신장군은 일본 왜적을 상대로 목숨 걸고 싸운 분이다. 그런데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일본군장교 출신이 이순신의 사당을 두고 항일정신을 논할 수 있는 가이다.

 

금송나무와 관련하여 한국의 전통수목인 육송이나 박달나무도 아닌 일본에서 아끼는 나무가 자리 잡아 왜색으로 얼룩진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역사란 바론 이런 것이다. 이순신 종가의 종부님은 원래 현충사의 현판을 되찾길 바란다. 숙종 임금이면 300년 이전이고,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420년 전의 것이다. 난중일기는 국가의 국보이면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현재 살아가는 대한민국이란 존재만 아니라 범인류적으로 가치가 높은 물건이다. 그렇기에 역사를 다시 보고 판단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에 대한 나침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 만일 이분이 없으면 조선은 없었다. 아마 대한민국은 현재 같이 평화롭게 살아가지만, 일본어가 국어가 되고, 일본사가 국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분이 정읍현감인 이순신 장군을 수군 절제사(節制使)로 임명 후 당상관인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병조판서가 아니지만, 선조에게 건의하여 지방하급수령을 사령관으로 승진시킨 것이다. 같은 정3품이라 해도 당상관과 당하관은 큰 차이가 있다. 당상관이 되면 임금의 어진에 들어가서 회의에 참석하고, 정책적으로 큰 제안을 할 수 있다. 지휘권과 관련하여 수사(水使)의 지휘권은 병력을 통송하고, 군정을 세우고, 민간인가지 통제할 수 있다.

 

류성룡이 만일 왜란대비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류성룡과 임진왜란>을 보면 서애 선생에 대한 활약상을 후대 역사학자들이 연구하고 소개한 서적이다. 다시금 역사의 기록이 현재만 그렇지만 당대 혹은 그 중간의 관점 역시 중요하다. 선조시대는 당파싸움이 가장 치열하게 시작된 시기다. 기축옥사에서 동인을 학대하자, 후에 동인에서 북인과 남인이 나온다. 동인과 서인에서 당이 남인, 북인, 서인으로 활동한다. 이때 남인에 속한 류성룡은 서인보다 가까운 북인과 같이 일을 하기도 하나, 생각보다 북인의 반발이 심했다.

 

류성룡은 왜적에게 화의를 요청한 것을 두고 북인의 탄핵에 의해 실각한다. 이때 대부분 남인들이 실각하고, 정세는 북인으로 옮겨간다. 임진왜란을 보면 북인들은 의병이 많고, 서인들은 선조를 호종하는 부류가 많았다. 책에서 광해군에 대한 인조반정이 호종공신들이 선무공신에게 권력이 밀린 것에 대한 반발반응이란 것이 옳다. 광해군이 분조활동을 하고 의병을 독려하고, 무군사로 활약하여 전쟁을 지휘했다. 선조는 전쟁이 나자 북으로 몽진하고, 전쟁의 책임을 자신이 아닌 학봉 김성일, 광해군, 류성룡에게 돌린 것이다.

 

북인과 광해군의 뜻이 맞아 류성룡은 탄핵되고, 류성룡은 평생 안동에 은거하고, <징비록>을 저술한다. 류성룡이 전쟁을 지휘할 자리에서 남인출신 정승과 판서를 앉혀 실무를 보았다. 사실 전투를 수행할 때 무관을 싸우기만 하면 되나, 무관이 아닌 문관, 그것도 고위관료층은 정치적으로 내정을 이끌고 외교를 정리하고, 무관들이 싸울 수 있도록 행정적 조치를 해야 했다. 병조가 군사업무를 맡지만, 인구를 차출하고 식량을 대려면 호조의 업무가 필요하고, 물자를 가공하려면 공조의 업무가 필요하다.

 

이런 업무를 맡을 수 있는 인재를 박탈하기 위해 이조의 업무가 필요하다. 이런 많은 일을 하려면 뛰어난 행정조율가가 필요하고, 류성룡은 어김없이 그 능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류성룡은 북인에 의해 탄핵되고, 그 중심에 이이첨 같은 세력이 있다. 선조수정실록에서 류성룡에 대한 비판은 참으로 난감하다. 아주 못나고 간사한 인간으로 표현했다. 이에 반해 이이첨은 뛰어난 인물로 표현된다. 실록의 사관이 있는 그대로 적기는 하지만, 사견이 들어갈 경우도 많고, 뒤에 실록으로 편찬할 때 그 정치적 세력이 누군가에 따라 왕의 평가와 당시 인물의 평가조차 다르게 된다.

 

최근 논란이 많은 광해군의 경우 그의 일기가 완본 이전의 수정본에 많은 교정이 나타났고, 그 교정된 부분을 읽으면 광해군이 완전한 혼군이 아니란 점을 알 수 있다. 류성룡에 대한 평가도 선조실록보단 그가 남긴 <징비록>과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많은 점을 찾을 수 있다. 류성룡에게 지워진 주화오적(主和誤國)이란 오명은 단순히 생각할 일이 아니다. 조선의 병력은 일본보다 못하고, 조선의 군사는 조선 자치통솔권이 아니라 명나라의 통솔권에 움직였다. 게다가 명나라의 횡포는 정말 심각했다.

 

명군도 세력이 나누어져 서로 실적을 올리고, 다른 군세는 적의 수급이 부족하자, 조선인들을 살해하고 목을 잘라 성과품으로 바쳤다. 조선의 사내는 앞머리를 밀지 않으니 죽은 사람의 머리를 조롱하니 그 얼마나 참혹한 일인가? 하다못해 명나라 본국에서 조사관리관을 파견할 정도이니 그들의 민폐가 지독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많은 고통을 받는 것은 백성이다. 류성룡은 서울에 살면서도 지방에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현실을 보았다. 주자의 성리학인 조선에 다른 학문을 같이 수용하여 실질적인 안목을 높여 정책에 활용했다.

 

하지만 제일 심각한 문제는 기득권과의 투쟁이다. 서애 선생은 양반가문이고 재상의 반열에 올라갔으며, 그분의 부인은 왕실가문의 후손인 전주이씨이다. 광평대군의 후예로 재산과 권력 모두 가지고 있지만, 그 힘을 자신을 아니라 국가와 백성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징비록>을 읽으니 서애 선생은 치질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제대로 걷지 못해 기어서 어전에 나가 정사를 펼치고, 아픈 와중에도 정책안을 내놓았다. 류성룡의 적은 열도에서 침범한 왜적만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서인과 북인하고 갈등을 빚었고, 외교적으로 명나라와 여진족까지 닥쳤다.

 

특히나 광해군이 펼쳐준 활약으로 명나라에서 선조보단 광해군이 임금으로 있기에 적합하다는 말을 계속하였고, 이 때문에 선조는 양위소동을 일으켜 대신들의 충성심을 시험했다. 이런 소동 중에 가장 먼저 선조를 달래준 사람은 류성룡이었고, 전방의 이순신까지 정치적으로 지원해준 것 역시 류성룡이다. 당파적인 계략에서 학봉 김성일이 임진왜란의 조짐이 없다고 선조에게 보고했다고 하나, 선조는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를 받고, 류성룡에게 전쟁대비를 하라는 분부를 내린다. 이순신이 수사로 발탁된 이유는 바로 일본에 사신으로 간 외교관의 이야기에서 시작했다.

 

당쟁의 역사에서 무관의 임용과 배치에서 입김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니, 배설이란 장수가 수사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어찌 저런 인물이 수사로 올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 있다. 배설은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할 때, 왜적에게 이길 가망성이 보이지 않아 자신의 배를 데리고 숨다가, 추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기용될 때 그 배를 이용하여 명량해전에서 대승한다. 하지만 배설은 이 와중에 군영을 이탈하여 전쟁이 끝난 후 체포된 뒤 참수된다. 추후 공적을 인정받아 벼슬이 증직되지만, 그가 탈영한 죄로 참수형을 당한 것 자체에서 장수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다.

 

이런 자들이 즐비하게 경상도 수군지휘관으로 오고 있다는 점에서 이순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참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진왜란 배경과 전개는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알지만, 이번에 읽은 책에서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15~18세기 사이 지구는 외계의 영향, 즉 간빙기로 인해 기상조건이 악화된 점이다. 현대과학에서 기상학은 지진, 해일, 홍수, 가뭄, 태풍 등 다양한 기상현상을 다룬다. 그러나 당시 과학지식으로서 저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다른 이유로 원인을 찾으려 했다.

 

서구사회에서 가장 마녀사냥을 활발한 시점이 16~17세기이다. 15세기부터 시작한 마녀사냥이 19세기까지 진행된 원인은 농업의 문제였다. 상업이 발달하고 산업사회가 도래하기 전 대부분의 경제구조는 농업이다. 농사를 지어 수확을 해야 하는데, 이상기후 때문에 농작물의 수확이 저하되고, 게다가 기상이변은 신체적으로 질병을 일으키기 좋았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이 병에 시달려 자주 눕는 내용이 나온다. 류성룡 역시 병으로 앓는 모습이 나온다. 식량문제의 해결은 물류의 이동밖에 없고, 이런 세계화 흐름에서 대항해시대가 열린 것이 주요 세계흐름이다.

 

임진왜란이 조선과 왜적만이 아니라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 포르투갈과 서구의 국가까지 개입된 시점에서 이미 세계는 크게 변화하고 있던 셈이다. 이런 시점에 백성들을 구휼하는 선책보단 이익을 생각하는 지배계급층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를 잃게 될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군사력의 보강이다. 왜적을 막으려면 날랜 군사가 필요하고,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건강한 장정이 필요하다. 조선시대 노비를 군역에 동원하지 않았다. 노비를 사적인 재산으로 여긴 양반들이 노비까지 군사에 동원하면 자신의 이익에 손해 보니 반대를 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당쟁과 사화, 그리고 흥망성쇠를 보면 양반 기득권 세력과 개혁자간의 대립구도에서 개혁자의 실패로 결론난다. 기묘사화의 원인이 조광조의 개혁안이지만, 중요한 원인은 훈구대신 내지 공신들의 권력을 침해했기 때문이다. 류성룡의 탄핵이 된 이유도 역시 그렇다. 전쟁이 승리로 돌아가고 전후공상을 따지게 될 상황에서 류성룡은 파직당하고, 어린시절 친구 이순신은 전사한다. 류성룡이 내놓은 정책은 전시행정만 아니라 일반 행정상황에도 큰 도움이 되는 방안이었다.

 

양반계급의 권력을 감축하고, 백성의 삶을 향상시키며, 군병력을 강화하는 정책은 결국 물거품이 된 셈이다. 고향 안동에 내려간 서애 선생은 선조가 계속 종용해도 끝내 조정에 나가지 않았고, 결국 역사의 큰 빛줄기로 사라진다. 서애 선생을 모신 병산서원은 광해군이 직접 지시한 곳이었다. 광해군은 대북의 세력을 받고 올라갔지만,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문무관을 여전히 챙기고 있었다. 2017년 가을, 나는 안동에 위치한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신 도산서원과 서애 선생의 위패를 모신 병산서원을 다녀왔다.

 

낙동강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그곳에서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느낌이 참으로 달랐다. 도산서원은 약간 높은 구릉지에서 아래로 강줄기와 농경지를 바라본다면, 병산서원은 강줄기 뒤로 높은 절벽이 보였다. 절벽 아래 강줄기는 참으로 멋진 경관을 연출했지만 한편으로 답답하고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서애 선생이 느낀 전쟁에서 고생한 것도 모자라 억울하게 재상의 자리에서 내려와 전쟁의 아픔을 다시 반성하는 그 심정을 과연 어떤 것일까? <징비록>을 읽고, 임진왜란과 관련된 연구도서를 보면서 류성룡이란 인물의 위대함을 느꼈지만, 다시금 느껴지는 것은 서애 선생이 가진 실질적인 정치 감각이었다.

 

류성룡 선생은 소재 노수신 선생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게다가 선조를 임금으로 만드는데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영의정 이준경과 가까웠다. 이준경이 죽기 전에 붕당의 문제를 예감하여 유고를 남긴다. 율곡 이이 선생이 매우 뛰어난 인물은 알지만, 그가 너무 극단적이고 현실보다 이상적인 요소만 말하기에 이준경 선생은 생전 이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봤다. 이에 정철과 율곡 이이의 주변사람들이 이준경을 비난하자, 류성룡 선생은 노신이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고, 그가 틀린말을 하면 그것이 틀렸다고 하면 되지 왜 벼슬까지 빼앗으려 하느냐고 했다.

 

신속, 정확, 명쾌한 정치적 안목이 있지만, 그것을 내놓기 전에는 처음부터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그 상황에 맞는 대답을 내놓은 것이 류성룡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류성룡의 방식에 비난을 하지만, 만일 처음부터 그 방안을 내놓았다면 그대로 올곧게 들었을 리가 없었다. 정말 그런지 모르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류성룡이 임진왜란 온갖 고생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선조가 삼도수군통제사를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바꾸고, 이순신을 고문하고 백의종군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원균이 칠천량해전으로 패하고, 왜적이 다시 침공하자, 수군을 맡을 자가 이순신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이순신을 다시 부를 수 있는 인물은 류성룡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고, 류성룡은 선조의 입에서 이순신을 다시 부르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라마라는 속성이 따르지만, 적어도 이순신과 류성룡의 관계에서 류성룡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게 조선의 조정이었다. 물론 류성룡도 실책이 있었다. 선조가 이순신을 무고하여 역적으로 만들어 죽이려 할 때 류성룡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오리 정승 이원익이 목숨을 걸고 이순신의 죽음을 막았다. 이원익은 태종의 왕자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4세손으로 왕실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선비로 늘 백성을 아끼는 진정한 군자였다. 류성룡이 파직당할 때 이원익이 옆에서 변호하다 같이 파직되었다. 류성룡의 몰락은 남인의 몰락이기도 하지만, 전시행정을 이끈 관료들의 몰락이었다. 왜냐하면 많은 백성들은 선조보다 이순신, 광해군, 류성룡의 활약에 더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무관이나 정쟁의 중심에 있던 남인의 영수인 류성룡은 평가 절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조시대에 오면서 류성룡의 가치는 다시 원위치로 올라가고, 20세기 국사학을 배우면서 류성룡이란 인물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재상이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많은 손실을 입었으나, 전쟁보상금이 나간 것도 토지 하나 잃은 것이 없었다. 물론 국토는 유린되었지만, 그런다고 모두 사라진 게 아니었다. 역사는 너무 간단한 조건에서 보면 안 된다. 전후사정과 다른 국가의 역사기록까지 참고해야 한다.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에 와서 선조와 조정대신에 대해 많은 비난을 날렸다. 시문놀이 하는 습관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로지 류성룡에 대해서만 칭송을 했다고 한다.

 

류성룡 선생이 <징비록>을 집필할 때 피눈물을 흘리는 마음으로 붓을 들었을 것이다. 그 기나긴 전쟁의 아픔, 추위와 배고픔에 죽어나가는 백성들, 전투에서 사라져간 친구와 장병들, 이 많은 고통들이 21세기 우리에게 큰 유산이 되었다. 당시보다 비교하여 현대사회가 평화롭지만, 그 평화는 단순히 좋은 세상이기에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는 것이 각 국가마다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휴전,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한반도는 늘 전쟁위기 속에 평화가 숨을 쉬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애 선생의 <징비록>의 정신을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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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1-06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칸트가 평생을 보낸 쾨니히스베르크가 2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로 넘어가면서 칸트를 러시아인으로 만드는 역사왜곡이 행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행태를 보면 역사에 대한 이해당사자들의 입장이 차이가 나는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 뿐 아니라 동서고금 공통된 일인 것 같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1-06 22:18   좋아요 1 | URL
아독일 그 동네를 치보니 갑자기 스탈린그라드가 나오는 겁니다. 거기가 독일의 땅이 되고 칸트의 동네가 러시아의 관광지가 되었다니!

동북공정과 관련하여도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보더라도 역사는 과거의 것이 결코 아니죵

2018-01-06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6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