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절의록 호남문화 연구총서 13
김동수 지음 / 경인문화사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국가를 위해 순절한 분에게 물론 감사의 마음을 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감사의 의미를 담아야 할 대상은 그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에 치중하는 게 아니라, 후세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가령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과 같은 경우 조선시대 후기에 그렇게 인정받지 못한 인물이다. 그러나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읽으면 남명 조식 선생에 대해 나온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 같은 시대에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이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조선 명재상 중 하나인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선생은 2사람 모두 친분이 있었다.

 

퇴계 선생이 먼저 1570년에 타계하시고, 그 뒤에 남명 선생이 2년 후 타계하신다. 남명 선생이 돌아가기 전 퇴계 선생과 일전에 1번도 만나지 못해도 같은 경상권에 사는 학자로서 그의 뒤에 따라가겠다고 하신 일화가 유명하다. 성호 선생은 그 내용을 사설에 담았다. 문제는 남명 조식이란 인물이 조선 성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그렇게 큰 대접을 받지 못했고, 서원에 퇴계 이황 선생과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배향되어도 남명 선생은 배향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남명은 조선시대 분당정치사에서 북인의 학문적 스승이었다. 그의 학문은 단지 하나만 말한다.

 

학문의 기본적 원리와 배울 덕목은 이미 선현들이 모두 남겨주었으니, 이제 우리는 그것을 보는 것을 넘어 실천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실제 역사 속에서 북인의 활약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볼 수 있다. 의병군에서 최초로 발의한 인물은 홍의장군(紅衣將軍)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이다. 그분은 남명 선생 수재자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제자이고, 남명 조식 선생의 손녀와 결혼했다. 곽재우의 거병은 남해바다의 이순신 장군과 동시에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들이었다.

 

그러나 북인들의 활약은 대부분 경상권이다. 경상우도와 좌도 퇴계와 남명의 제자들이 분포했고, 초기 경상도 학자들은 2사람에게 학문을 배웠으나 점차 2사람에게서 제자들이 분리되기 시작한다. 남명 조식 선생에게 정인홍, 곽재우, 김우옹, 최영경 같은 학자들이 있었고, 퇴계 이황 선생에게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이들의 제자인 이억기 장군 같은 인물도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의병과 관군 모두 왜적에 항거했지만, 한편으로 당쟁의 소용돌이에도 같이 있었다. 외부의 적인 왜군과 내부의 적인 당쟁이 있었다.

 

이런 관점을 내가 제시하는 이유는 이번에 읽은 <호남절의록>이란 도서가 얼마나 편중되어 있는 서적이란 사실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번역하신 사학과 학자들도 인정했지만, <호남절의록>이 작성된 시기는 정조시대이고, 정조는 영조의 세손이다. 영조는 경종의 동생이나, 사실 경종이 죽은 후 등극된 임금이다. 당시 경종은 대다수의 소론과 일부 남인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고, 영조는 노론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경종 사후 영조가 오르자 소론의 영수인 김일경 등이 과거 영조에게 한 행동과 노론4대신을 죽인 죄로 죽임을 당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노론대신이 경종을 살해하려는 의도가 명백한 일로 참살되었는데, 영조는 자신의 형보다 자신을 지지한 대신에게 편중했다. 권력을 부자와 형제조차 냉정하다. 영조 집권 당시 일어난 난이 이인좌의 반란이다. 이인좌는 경종의 죽음에 불만을 품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올라가면 1618년 사르후 전투와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이 올라가있다. 정묘년과 병자호란의 치욕적인 일은 한국 역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은 상처이다. 인조 임금은 청나라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9번 머리를 받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절차를 수행했다.

 

당시 사료를 보면 인조의 행동에 사대부들이 실망을 하여 효종까지 출사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인조는 광해군 실각 이후 등극된 임금이다. 그는 서인의 반정을 중심으로 움직인 존재이다. 그가 올라간 순간 청나라의 습격을 받고, 인조반정 다음해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이괄의 난과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조선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들이 패배한 이유는 과거의 문제점을 보지 못하고, 백성을 진정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성리학의 틀에서 명나라를 절대적 존재로 보는 사대주의가 나라를 버렸다.

 

물론 <호남절의록>18세기말 성리학의 관점에서 적은 도서이다. 정조는 상당히 우수한 군주이나, 그 역시 성리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에 있다고 하나, 19세기 후반 메이지유신을 거친 후 강대국이 되었고, 청나라는 19세 중반 영국과의 아편전쟁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는다. 조선은 그러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성리학적 관점 조선왕조의 시대라면 당연히 <호남절의록>은 절대적 가치를 내세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책을 천천히 읽은 국사를 생각하면 나라가 망한 이유가 다시금 보인다.

 

국가를 위해 희생된 순국자는 칭송받아야 할 것이나, 이 책에 적힌 이름은 대부분 양반 사대부 집안이다. 그들은 명나라와 조선임금만 생각하지 조선에 살고 있는 백성에 눈을 두지 않았다. 광해군이란 인물을 두고 참으로 재미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바라보면 광해군의 분조활동에 의해 의병들이 전국적으로 창궐하고, <호남절의록>에서 세자의 분조역할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으나, 광해군의 분조활동을 드러내는 것보다 광해군 집권시기 혼주(昏主) 내지 폐주(廢主)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했다. 사르후 전투에서 강홍립은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항복하고, 정묘호란 시기 조선을 밟아대는 존재로 여겼다.

 

하지만 정묘호란 당시 조선과 청나라의 화의에서 강홍립의 역할이 컸고, 그가 없었다면 조선의 많은 백성들은 고초를 당해야 했다. 그가 중재하지 않았다면 조선왕실 역시 큰 피해를 봐야 했다. 다급한 상황에 이르러 강홍립이 중재한 사실은 빼놓고, 오히려 그를 나라를 배신한 역도로 몰아넣었다. <호남절의록>은 광해군 시대의 부정, 북인세력의 부정이 강력히 깔려있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死) 당시 수많은 선비들이 화를 당했다. 정여립과 단지 친하거나 글을 나누었거나, 그와 인척이거나 또는 의심가는 인물들이 모조리 화를 당했다.

 

남명 조식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의 제자이며, 상당히 학문이 높은 최영경이란 선비는 송강 정철의 무리한 수사로 인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 외에도 아무 죄 없는 학자들이 정여립 옥사에 연루되어 죽었으니 그 원한이 골수에 새겨져버렸다. 남인과 북인은 원래 동인이었으나, 북인에게 기축옥사는 친구와 친척, 동문수학하는 이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건이었다. 우습게도 송강 정철도 왕세자 문제를 선조에게 언급하는 바람에 선조에게 미움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호남절의록>에서 이런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정치적 입장이 상당히 많이 반영되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란 서적에서 <선조실록>을 보면 왜적이 침탈해 전국이 지옥처럼 변하는데, 임금을 명을 받은 송강 정철은 어서 달려오지 않고, 기생을 끌어안고 술을 마시며 시조나 읊어대었다. 송강 정철의 국문학적 가치는 높지만, 그가 해온 행동들을 보면 결코 의로운 인물은 아니다. 서인들이 만든 기축옥사로부터 인조반정은 어떻게든 숨기고 싶은 지난날의 과오이다. 문제는 그 과오를 정당히 밝히는 게 아니라 억지로 가면을 씌우게 만든 책이 <호남절의록>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시작으로 앞에 잠시 1555년 을묘왜변을 언급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뒤에 바로 오는 게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그리고 이괄의 난 평정이다. 이들의 난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데도 막지 못했고, 막을 수 없어 도망친 후 그 죄를 모조리 광해군에게 이전했다. 명나라를 구하지 못하고, 그대로 청나라와 외교정책을 펼친 점, 1609년 광해군이 왕으로 오르자 제일 먼저 한 것이 일본과 국교를 다시 시작한 것이다. 만일 일본과 앙금을 남긴 채 계속 지닌다면 왜적과 호란 사이에 더욱 난감한 상황이다. 전쟁이 나면 제일 고생하는 부류는 여인네와 백성들이다. 여인네들은 체력적 한계로 도망치지 못하고, 싸우지도 못한다.

 

백성들은 억지로 군사로 징병되고, 어리석은 지휘관의 명령에 목숨을 잃게 된다. 목숨을 잃기 위해 군에 입영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약자로 입영한 것이다. 60세까지 군역을 해야 하는데, 갓 태어난 아이가 군적에 오르고, 이미 백골이 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군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의 폐단이 이미 17세기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 시대의 기득권은 서인이었다. 그들은 자기만의 이상 속에서 백성들이 추위와 굶주림, 적들의 칼과 창 앞에서 베어지는데도 망상만 꾸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조금 다른 양상이다. 이 당시 의병들은 각기 출현했으나, 병자호란은 조금 다르다. 의병이 창궐해도 전국적으로 큰 성황을 이루지 못했다. 백성들은 알았다. 혼주 광해군을 내쫓아도 사실 인조 역시 별반 차이가 없었고, 광해군이 억지로 올린 토목공사도 인조에서 멈추게 아니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 전주에 있는 태조 이성계 초상을 모신 경기전은 광해군 시대에 재건된 건축물이다. 전쟁 속에서 궁궐이 없어져 대군의 집에서 조회를 해야했던 선조였다. 폐모살제(廢母殺弟)와 관련하여 인조는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와 손자를 죽게 만들고, 자신의 조카 역시 반역자들이 옹립하자 사약을 내린다.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광해군과 아들손자를 죽이고 조카까지 죽인 인조에서 왜 이리 다른 양상이 보이는가? 광해군의 어머니는 생모도 아닌 아버지의 계비로서 자신보다 어렵다. 그러나 인조는 자신의 친자식을 죽게 만든다. 이런 정치적 사건을 전후맥락을 따져 보면 <호남절의록>의 목적은 진실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희생된 순국자를 위한 기록인가? 책을 읽어가면서 인조부터 시작하여 계속 이루어진 서인(노론)들의 정권통치를 정당화하는 문맥으로 이어진다.

 

책 초반에 동래부사 송상현을 너무 뛰워준 것부터 문제였다. 왜적이 3시간만에 동래읍성을 함락했는데, 그는 자신의 첩을 피신하게 했다고 하나, 사실 성안에 수많은 백성들은 도망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모조리 학살당했다. 경상권 최전선 성문이 단시간에 무너진 것은 일본군이 강한 것도 있지만, 전쟁의 기록에서 본 것처럼 화포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 것이다. 화포를 이용하면 장거리 적에게 큰 타격을 주고, 성 아래보다 성위에서 발사하는 대포는 더 멀리 나가고, 성 아래서 발사하는 대포는 성 위로 오르기가 어렵다. 조총은 화약의 양과 탄환의 무게가 대포보다 못하기에 사정거리로 따지자면 대포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 연합군이 승리한 이유는 일본군보다 더 강력한 장거리용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군사들에게 대포를 이용하여 적진을 공격하고, 평소 훈련을 했다면 그렇게 단시간에 무너질 수 없다. 단지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한 이유로 충신으로 올린 그 자체가 한심한 자태이다.

 

무기가 정비되지 않았거나 군사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지휘관의 무능과 실책이다. 문관이 무관의 병법이나 지휘방법조차 모르고 그 자리에 앉는다면 적들에게 이로움만 주는 꼴이다. 만일 죽기를 각오하고 혼자 장렬히 전사하면 모르지만, 성안의 병졸과 백성들은 말이 다르다. 그들이 죽어도 어떤 기록도 남지 않고, 보상과 영광조차 없다. 그들은 목적은 전쟁에서 어서 벗어나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다. 이미 곡식을 탐내는 탐관오리가 판을 치고, 조정에서 이들에 대한 구휼정책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적이란 그저 왜만이 아니라 조선이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왕이 몽진하여 북으로 갈 때 백성들은 궁궐을 태우고, 양반 사대부집안을 불태우며, 일부 상인들은 왜적에게 호의적으로 대했다. 민심은 왜 천심인가? <호남절의록>에서 민심의 향방을 묻는 글은 없다. 번역하신 분도 공신록에 대한 설명문을 언급할 때 역사적 사실을 전후맥락에 맞게 적어내었다. 하지만 책 자체가 당시 조선시대 한문서적을 한글로 번역했기에 역사적 평론을 거론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정말 나라를 사랑해서 죽은 사람이 만일 수 백 년 뒤 일본에 의해 조선이 망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절의를 지키는 것은 중요하나, 절의를 지키기 전에 그런 상황을 막는 것 역시 중요하다.

 

광해군를 어리석은 임금이라 했지만, 막상 정묘·병자호란 당시 공신을 보면 광해군 시절 무과에 급제하여 변방에 나간 인물이 많았다. 이미 광해군은 청나라의 불온함 움직임을 보고 거기에 대비하기 위해 병력을 확충하고 훈련을 시켰고, 불천지 원수인 왜국에 주문하여 무기까지 수입한다. 항일전쟁사에서 임진왜란 이후 조선독립전쟁사라면 임진왜란의 역사정신을 따라볼 수 있다. 일제에 의해 유린당한 조선이 이미 없어졌기에 다시 고국을 되찾고, 자유를 향한 분투는 순국자의 진정한 애국정신이다. 그런 애국자들은 병자호란의 인조와 서인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조선독립을 위해서라면 중공과 소련, 미국과 유럽연합국이라도 손잡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발적 의지는 무참히 깨져 광복 아닌 광복을 맞이했으나, 21세기 우리 대한민국에서 다행히도 그들의 죽음과 공로를 기억해주고 있다. <호남절의록>에서 예로부터 전라도 지역은 의병도 많았지만, 그 지역이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점령당하지 않은 영토이다. 게다가 전라도는 곡창지대라 많은 식량이 나오며, 전라도를 잃은 것은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과 같다. 한편으로 곡창지대만큼 많은 수탈과 억압을 당한 지역이다. 농민이 쌀을 추수해도 대부분 나라와 권력자가 빼앗아 가버린다.

 

의병의 역사가 있는 만큼 동학운동사도 있고, 민족의 독립운동과 저항정신, 심지어 518의 민주화 투쟁도 있다. 21세기 <호남절의록>을 읽으면서 호남은 저항의 지역이기도 하나, 그만큼 아픔과 시련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국가의 주인이 국민인 현세대에서 백성을 하늘로 봐야 할 그들이 오히려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지배이데올로기만 만들기 바쁜 것을 <호남절의록>이란 도서로 확인했다. 물론 기억하고 칭송해야 할 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그 진의를 다시 파악할 필요가 있다. 21세기 전쟁에서 의병은 필요 없다. 의병이 되기 전에 이미 국가전산자료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다.

 

무기도 조총같이 수십m만 가는 게 아니라 수 천까지 날아가는 미사일이 날아온다. 물론 전쟁나면 탁월한 지휘관 내지 용사가 탄생하겠지만, 지금 무기는 과거처럼 검술과 궁술로 좌우되는 게 아니라 무기의 성능에 따라 달라지니 전쟁은 될 수 있으며 피하는 것이 상책이고, 억지로 죽음의 길을 선택해야 할 이유도 없다. 명예가 전부이던 과거 조선이나, 그 명예를 위해 억지로 전쟁에 끌려가던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르후 전투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 그 희생을 만든 자들은 반정을 만들고, 그 이상의 조선인들을 죽게 만들었다. 역사란 반성을 해야 한다.

 

병자호란의 패배로 인조는 혼자서 삼궤구고두례 절차를 수행해야 했지만, 일제에 의해 망한 조선은 국민 모두가 삼궤구고두례보다 더한 치욕을 당해야 했다. 이것을 두고 공신목록을 기록했다면, 이런 행위를 지금에 와서 계속하거나 용인한다면 똑같은 일들이 반복될 것이다. 그런 <호남절의록>이라 책 내용을 다 읽으면 비장미를 억지로 밀어붙인 것이 왠지 안타깝고 한심스럽다. 하지만 이런 책이 있어야 후대에 알려지고 우리가 과거의 일을 다시 보는 것이 아닐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12-07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12-07 08:56   좋아요 0 | URL
어느순간 제 글이 헬조선의 기원을 찾아가는 블로그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없는 사람, 백성을 위한 양반들은 바른말을 하다 의금부에 끌려가서 맞아죽고
또는 사문난적으로 몰려 끔찍한 보복에 집안이 몰락합니다.

앵반이란 존재가 행정가 및 사상가로서 백성의 삶을 돌봐야 하는데
그리고 문자를 모르는 백성을 위헤 학문을 해야 하는데 시문놀이만 추구했죠.

돌이켜보면 남인계열 학자들이 조선후기에 성리학 외에 의학, 복서, 지리학
수리학, 천문학 등을 연구하는데, 다 농사에 도움이 되고 주변 지여에 살아가는
백성의 삶을 유지하게 되는 방편인데 말입니다.

예전에 성호사설을 읽으면서 성호 이익선생이 길을 가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느 늙은거지가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면서 제발 죽여달라고 외치는
글귀가 생각납니다. 다 떨어진 옷에 추운 겨울에 비참한 몰골을 하는
그 모습을 생각할 때면 성호선생은 눈물이 난다고 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기까지 조선은 그야말로 완벽한 헬조선이었죠.
하다못해 이익 선생의 아버지 이하진도 바른 말 하다 귀양가서 죽고
형인 이잠은 바른 말을 하다 장살당해 죽으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역사이고 그런 역사를 만든자들이 책임의식 없이 성리학에 의한 영웅주의만 외치니....

yamoo 2017-12-07 2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양난 이후 조선 조정이 한 행태를 보면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남인이 상대적으로 부국강병을 위주로,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많이 시행하려고 한 듯합니다. 노론 세상이 되니 헬조선이 된 듯....그러고보니 헬조선의 계보의 중조는 아마도 노론 일당 체제가 득세한 조선 후기가 아닌가 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12-08 20:16   좋아요 0 | URL
항교에 가면 제일 먼저 할일은 송시열과 송준길을 배향대상에서 제외하는 겁니다. 백성들이 배고픔에 절규할 때 대동법을 시행햐라 하는데, 이때 김육이 제안하자 같은 서인 그리고 노론의 창시자인 우암 송시열이 반대합니다. 산당 즉 재야에서 활동하는 사대부들이 농민을 보살펴주지 못할 망정 계속 착취하는 형국에서 헬조선의 역사는 다시금 불국토로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