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한민국이란 국가에서 과거의 영웅을 말한다면 대부분 이순신 장군을 말할 것이다. 성군(聖君)인 세종과 성웅(聖雄) 이순신, 세종대왕은 조선의 문()을 열었다면, 이순신 그 자체로 무()의 완성이다. 일전에 이순신 장군의 일대를 방영한 <불멸의 이순신>이란 작품이 있었다. 거기서 보인 이순신의 모습은 보통 인간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헤치고 나간 불굴의 무관(武官)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이순신이 상대로 하던 적은 과연 왜적이었을까?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면 참으로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임진왜란이 7갑자 즉 420년 전에 계속 우리 조선 한국 땅을 고난의 세계로 만들었다.

 

게다가 정확히 420년 전은 1597년 정유재난이 일어나던 시기이다. 임진왜란이 1592년에 발발한 원인을 보고, 정유재란이 일어난 배경도 봐도 참으로 문제가 많았다. 단순히 이것은 이순신 한명으로 모든 적을 섬멸한 것이 아니라, 전 방위적으로 관찰할 것이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접한 임진왜란은 단행본 연구서적 내지 드라마에 더 심한 편중을 둘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이나 <징비록>을 보자면, 전자는 이순신을 중심으로 후자는 유성룡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2사람 모두 임진왜란 당시 없었다면 조선의 앞날이 없었다는 점이다.

 

문제점은 드라마가 작가의 상상력이나 허구적인 요소를 다소 집어넣어 이야기를 극적으로 이끌어내나, 대하드라마 사극의 경우 기본적으로 기초 사료와 어느 정도 부합되어야 한다. <불멸의 이순신>은 소설도 있었으나 더 중요한 것은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였다. 칼의 노래를 예전에 약간 읽은 기억이 있다. 문체가 매우 비장하고 엄중했다. 이순신의 마음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말 그대로 칼을 마음에 품고, 자신은 언제나 칼 위에 걷고 있는 칼집 같은 모습이었다. 칼을 가지고 있기에 그 자신조차 벨 수 있다는 각오에서 더 이상 무슨 수식어를 붙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임진왜란을 말하기 전에 이순신이란 한 인간을 말할 수 없겠지만, 임진왜란이란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성인(聖人)이란 단어처럼 일반사람에게 식견으로 묻자면, 성인이란 의미는 석가나 그리스도 같은 신과 같은 존재, 혹은 신의 권위를 가진 자로 본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성인이란 단어는 동양에도 있었다. 한국은 이미 서구화되어 기존 동양적 정신이 많이 파괴되었다. 역사학(歷史學)이란 학문이 동양의 영역이 아닌 서구의 관점이 되어 있기에 우리의 문화와 사적(史的) 영역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서양을 알기 위해 고대 그리스로 넘어가자면 유명한 철학자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과거의 철학자는 형이상학자이나, 한편으로 수학자 내지 의학도이기도 했다. 때로는 정치가와 철학자를 병행하기도 하나, 서구의 역사에서 정치, 철학, 군사, 의학 등의 분야가 서로 관계성을 유지하기보단 각자의 학문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반해 동양의 학문은 다르다. 동양의 학문은 철인(哲人) 군주 밑에 다른 철인들이 정사를 돌보는 구조였다. 그것은 바로 유학자(儒學者)들이고, 조선에서 성리학자(性理學者)들이다.

 

이들이 관점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예를 들어 우리가 좋아하는 소설, 게임, 콘텐츠로 삼국지(三國志)가 있다. 삼국지에서 유명한 장수로 유비와 조조, 관우와 제갈량 같은 불세출의 인물이 모여 있다. 이들은 황건적 당시 의병을 일으키고, 동탁의 난을 잠재우며, 천하삼분지계로 전쟁의 소용돌이에 있었다. 그러나 막상 소설을 보고, 게임을 하는 도중 뭔가 느끼는 바가 있다. 단순 롤플레잉게임(RPG)이라면 몰라도 정식적인 삼국지 시리즈에서 군주의 역할은 전쟁을 하는 것도 중요하나, 전쟁과 더불어 내정을 관리해야 하고, 외교와 인사문제를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경영(經營)이란 관리체계가 어느 정도 지켜지지 않으면 전쟁에서 무조건 패배란 점이다. 이순신의 영웅적인 모습에서 그의 무술능력과 더불어 지장으로 보여주는 책략가란 점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그가 뛰어난 지략무장만 생각하지, 그가 그 이전에 준비해둔 작업과 계획, 군영을 다스리는 태도와 피난민의 대책, 군량미 보급과 지원에 대한 관리는 잘 몰랐다. 유명한 대첩에서 많은 왜적을 쳐부순 것만이 많은 사람들의 기억이다. 그리고 그가 처해진 모함에서 이 문제가 어떤 전후맥락이 있는 것인지 생각할 점이 많다.

 

임진왜란은 이미 경고된 전쟁이었다. 임진왜란 이전 전남 남해안에 왜적이 노략질을 하고, 담당관아 무관과 병사를 참살했다. 사실 이것만은 전부가 아니다. 1555년 을묘왜변이 전남지역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왜적은 남원과 전주까지 올라올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만일 그때 왜적을 맞지 못하였다면 최초로 몽진을 한 군주 선조가 아니라 명종이었을 것이다.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만 보는 것이 아니다. 오늘 지금 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일들을 다시 보고, 지금 현재 처해진 우리 모습을 반성하고 거기에 대한 채비를 하는 것이다.

 

서애 유성룡이 피눈물을 머금고 작성한 <징비록>은 그야말로 우리가 놓치고 놓친 지난날의 과오를 드러내던 책이다. 이 책을 제대로 보고 반성했다면 정묘·병자호란, 일제의 침탈에 대비했을 것이다.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읽는 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런 일들은 다시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란 인물은 성웅으로 우리에게 그저 하나의 콘텐츠로 소비되어온 인물이나, 막상 학문적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은 점이 많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은 왕으로부터 면사(免死)라고 적인 첩을 받는다. 하지만 정사 선조실록에서는 선조가 아닌 명나라 왕에게 하사받았던 것이다.

 

면사권한을 내린 자가 선조가 아닌 명나라 왕이라면 말이 상당히 달라진다. 조선의 성리학에 너무 치중하여 자국의 안위를 파괴했다. 성리학의 시작은 남송에서 시작되어 한족(漢族) 중국인들에 의해 조선까지 넘어왔다. 조선은 명나라와 인접한 국가고, 태조 이성계는 원나라를 섬기는 고려보다 새롭게 떠오르는 명나라에게 자신의 대의를 내보냈고, 그것은 성공했다. 즉 정치적 이념과 통치방법론에서 불교와 유교 사이의 고려보다 유교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이 되게 한 과정인 셈이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을 호령해도 조선은 여전히 성리학에 빠져있었고,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 큰 독이 되었다. 이순신은 성리학을 잘 아는 무관이었다. 그러나 성리학 안에 빠져있지 않았다. 성리학의 문제와 더 나아가 심각한 폐단은 현장중심의 경영체계가 아니라 시문놀이 하는 맹한 성향이다. 임진왜란 발발 이전 조선에 심각한 사건으로 기축옥사를 생각할 수 있다. 옥사에서 형사업무 최고책임자로 송강 정철이 있었고,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인 세력을 숙청한다.

 

그 뒤 왕의 후사문제를 잘못 언급하여 귀양 가게 되고, 귀양지에서 전쟁의 소식을 들은 다시 선조 곁으로 오라는 명령을 듣는다. 문제는 전시상황은 모든 업무가 비상이기에 신속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송강 정철이 보여주던 일은 참으로 한심했다. 최고 권력자리에 있다가 귀양을 간 것이 마음에 큰 상처였는지 그는 수 일 안에 올 수 있는 거리를 2주에 거쳐 왔고, 중간에 들린 관아숙소에서 기생을 불러 술자리를 만든 후 시조나 읊어주고 있었다. 한국 최고의 문학을 만든 자이나, 전쟁에서 보인 행동은 최악이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정철만이 아니다. 이순신이 수군삼도통제사에서 억울하게 물러난 후 원균이 통제사로 부임하자, 수사(水使)들의 능력도 의심스러웠다. 배설이란 장수는 원균 아래에서 도망쳐 배를 보존케 한 것은 큰 공이나, 그는 이순신 막하로 오고 나서 큰 전쟁이 두려워 병영을 탈영한다. 전시 병영을 탈영하면 참형에 다스린다. 목을 벤 후 군문 높이 목을 효시하여 진중의 소란을 잡는다. 배설이 아니더라도 주변에 보인 장수들이 능력을 인정받아 온 것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이 작동해서 온 것이다.

 

이순신의 할아버지는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하고, 아버지 역시 세상의 큰 뜻을 품지도 못한 채 살아간다. 이순신은 사림정치세력이었고, 그는 율곡 이이 선생과 같은 덕수이씨 문중이나. 어릴 적 서애 유성룡과 친한 이유로 남인과 같은 영역으로 몰렸다. 유성룡은 이순신에게 늘 지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은 친구였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도 이순신의 활약을 전하고, 이순신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노량해전에서 끝이 나자 북인 이산해에 의해 탄핵되어 정승의 자리에서 파직된다.

 

전시행정의 도체찰사로 활약한 그로써 이순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그가 백의종군할 때도 항상 위로해주었다. 백의종군은 이순신의 무장으로서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정치권력의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선조의 아들 광해군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지 않으나, 책 전반적인 관점을 보면 광해군의 정치적 업적을 인정한다(책에서 광해군이 아닌 광해임금이라 한다, 이 부분은 명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의 관점과 유사하다). 그 이유는 광해군은 정치적 행위를 실제 현장중심과 연계된 점이고, 실사구시를 통해 시문놀이 하는 정치적 행태와 반대로 갔기 때문이다.

 

선조와 호종신하들은 전장의 다급함과 전략적 관점을 잘 알지 못했다. 전술의 기초도 모르고, 적을 이기기 위한 작전문서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시문놀이에 젖어 말만 앞세우고, 선조는 작전을 내리려면 적과 가까운 곳으로 정부를 옮겨야 하나, 계속 북쪽에 머물면서 몸을 사리기만 바빴다. 선조의 문제는 그가 몽진을 한 것이 아니다. 몽진을 한 후 보여준 대응방법이었다. 변방의 장수가 전쟁을 할 때 군주는 절대 그의 지휘권을 간섭하면 안되나, 선조는 늘 그렇게 해왔고, 그런 실수가 패배를 불러왔다.

 

선조와 서인세력은평양성전투나 벽제관전투에서 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무기는 화포를 중심으로 반격했으면 싸울 만 했으나, 오로지 기병을 통한 돌격이나 내세웠다. 왜군의 조총사격술에 신립이 탄금대전투에서 패배했다. 자신들이 왜 패배했는지 이유도 모르고, 명나라가 와서 현실을 말해줘도 그것을 받아들이기보단 명분만 길게 늘여놓았다. 명나라 장수는 명분을 앞세우고 실리를 추구했다. 조선이 망하는 것은 명나라에게 중요하지 않으나, 조선이 망한 후 왜적이 넘어오는 것은 문제다. 그들은 항왜원조(抗倭援朝)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조선을 다시 세우게 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이란 단어를 남발했다.

 

재조지은의 문제점은 선조와 호종대신들의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 숨어있다. 사실 전쟁이 나면 제일 공을 세우는 자는 왜적을 무찌르고 몰아내는 자이다. 변방의 장수들은 목숨을 내걸고 하루 24시간이 죽음과 같이 숨을 쉰다. 그러나 선조는 호종한 대신에게 많은 공을 전해주었고, 그 이유는 자신이 의주로 가면서 명나라 왕에게 요청하여 명나라 군대를 파병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전쟁을 자신들의 손이 아닌 타국의 힘을 빌린 점에서 이미 병자호란의 그늘이 조선을 삼키고 있었다. 선조는 자신의 아들인 광해군에게 변변치 않게 대하다, 전쟁 중 분조지휘를 마치고 돌아오자 매우 따듯하게 대해준다. 하지만 이내 다시 차갑게 대하고, 광해군이 분조활동과 무군사 책임자로 큰 활약을 해도 공신의 축에 넣지 않았다.

 

왕의 가족에게 공신은 어림이 없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자신의 피난길에 동행한 다른 왕자에게 호종공신으로 책봉하는 점은 아이러니이다. 조선의 모든 백성은 알고 있다. 조선의 위기를 탈출하게 한 인물은 이순신과 수군, 그리고 의병이나, 그들을 치켜세우는 것은 선조에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이고, 그런 선조와 함께한 간신배 세력에게 치명적인 약점이다. 만일 이순신이 살아남아 전쟁이 정리된다면 선조와 서인세력에게 큰 타격이 될 것이다. 면사 첩은 선조가 아닌 명나라 왕이 하사하고, 하다못해 명나라 왕은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명나라의 수군 제독자리를 수여한다.

 

조선장수가 명나라 최고 지휘관의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 이순신을 두고 당시 참전한 명나라 장수는 그를 제갈량과 동급으로 보았다. 제갈량은 창과 활을 못 다루나, 창과 활을 다루는 자들을 다루어 적을 섬멸했다. 이순신은 조선수군 몇 십 배나 되는 왜적을 격파했다. 명량해전의 기적적 승리는 하늘이 준 행운이 아니었다. 단지 조선과 명나라에게 이순신이란 인물이 있었던 그자체가 행운이었다. 이순신은 조류와 암초 그리고 지형 등을 고려하여 작전을 개시했고, 그의 전략은 상대 총지휘관의 목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런 이순신이 다시 온다면 선조나 서인세력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으며, 전시 국방부장관을 맡은 유성룡과 이원익의 경우 그 공이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 이순신이 선조에 의해 잡혀갈 때 유성룡은 제대로 돕고 싶었으나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이원익은 목숨을 걸고 이순신을 변호했고, 병조판서를 맡은 정탁 역시 이순신의 업적을 고려하여 그의 안위를 보존해 달라고 했다. 이순신의 인품과 능력은 이미 선조실록이나 많은 기록에 남아있다. 이순신이 다른 무관과 다른 점은 학문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고 그리고 후에 망한 이유는 무관을 천시한 문치의 맹점이었다.

 

현장을 잘 아는 자가 대비하기보단 문관이 더 높은 자리에서 명령을 하고, 문관이 만호, 첨사, 부사 등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도 문제였다. 동래부사 송상현을 두고 부산시민들은 영웅으로 생각하고, 동래충렬사에 그를 모신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송상현이란 인물은 시문놀이만 빠진 문관에 불과했다. 정발장군은 부산진성을 수호하다 순국했다. 현재 지역적으로 부산광역시는 조선시대 이름이 부산이 아니다. 부산이란 말은 부산진성(釜山鎭城)이 있었고, 원래 부산의 지역명은 동래부였다. 동래부라고 하면 동래읍성이 총지휘부고 동래부사 송상현은 부산지역 전체 수비를 담당하는 최고지휘관이다. 그러나 그 성은 4시간 안에 무너지고, 그는 죽음을 당했다.

 

이때 송상현이 화포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무관이었다면 쉽게 성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 덕분에 많은 조선인들은 죽임을 당했다. 단지 일본 왜군에게 살해당한 이유로 충신의 반열에 올랐지만(아니라면 후에 예송논쟁의 주인이 그와 동본이라 더 올라갈 수 있다), 송상현의 죽음이나 평양성전투를 본다면 당시 무관을 대하는 조선의 수준을 알 수 있었고, 전시행정을 보면 전투능력을 알 수 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력과 병력이나, 그와 더불어 보급이다. 군량미가 없으면 싸울 수가 없고, 물이 없다면 그 진중은 이미 패배선언이다.

 

병사의 손에 제대로 된 활이 없고, 옷을 제대로 구비되지 않으면 전투 그 자체가 무리고, 수군에서 대포사격을 위한 화약이 없다면 역시 싸울 수 없다. 이순신의 경영관리는 보급의 체계화이다. 더 나아가 피난민을 수용하여 관리하여 그들에게 농지를 제공하고, 상업적 교류를 도모하여 전시 중에도 경제활동이 되도록 유도했다. 생선을 잡고 소금을 구워 팔며, 식량이 남으면 조정에 바치기도 했다. 전시 군량미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으면 군령에 의해 참형에 처해진다.

 

이순신의 승리는 모든 게 요행이 아니라 체계화된 시스템이었다. 병사 하나의 공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병사의 죽음을 두고 기록에 남긴다. 장계에 자신보다 부하의 덕을 칭송하니 감히 누가 따르지 않을까? 그런 면이 있었기에 언제나 철저한 준비를 했다. 이순신의 죽음을 두고 설전이 많다. 자살이었는지 아니면 속임수였는지 말이다. 진린의 기록이나 이순신의 아들과 조카의 기록을 보면 그의 죽음은 순수하게 교전 중에 벌여진 사태이다. 그런데도 승리로 이끈 것은 자신의 죽음으로 지휘통제력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현대전은 양상이 다르지만, 과거 전쟁은 총지휘관이 죽으면 그 사단은 모든 행동을 정지된다.

 

적장을 잡는 순간 적의 병졸은 항복을 한다. 다른 지휘관이 비상사태를 인식하고 인계받으면 되지만, 그것이 되지 않으면 무력화된다. 자신의 죽음 곧 조선수군 지휘부의 붕괴이고, 그동안 자신이 보여 온 전술과 전략을 자신의 아들과 조카에게 요청한 것이다. 주도면밀한 이순신이 만일 다시 조정에 나온다면 영웅의 귀환을 두고 정치적 혼란은 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선조는 자신보다 이순신이 조선 그 자체라는 점을 알았다. 이순신과 더불어 죽음의 세계에서 나라를 구한 의병장을 소홀하게 대한 이유는 바로 정치적 입장이었다.

 

김덕령 의병장은 모함으로 장살을 당하고, 홍의장군 곽재우는 김덕령의 죽음과 이순신의 모함을 보고 산으로 숨어버렸다. 광해군은 선조에게 정치적으로 최악의 라이벌이고(이 책에서 <난중일기>의 내용이 나오는데, 광해군이 건강이 편찮아 하자, 이순신이 매우 걱정하는 글귀가 나온다), 전시 중에도 전쟁 후에도 왕위 전위 소동으로 정치적으로 큰 파란을 일으킨다. 우리는 임진왜란을 왜 다시금 봐야 하는 것인가? 최근 일본이 헌법 개정을 하고 있다. 일본은 자위대가 군대가 아닌 자치대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 자체적으로 군대라는 기관을 만들기 위해서다.

 

일본의 정치세력 대부분 대동아전쟁의 후손이고, 전범들의 악행을 반성하기보단 오히려 영웅으로 모신다. 이런 시기에 우리가 과거의 일들을 지나쳐버리면 제2의 임진왜란이 오지 마란 법은 없다. 임진왜란 시기 명·청 교체시기이고, 지금 북한이란 폭력국가는 여전히 군사돌발을 일으키고 있다. 임진왜란에서 처음 풍신수길이 조선에게 요구한 것은 명나라 가는 길을 열어달라고 한 것이다.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선이 교행해줄 것을 요구했다. 대동아전쟁을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는 자들이 북한과의 군사적 무력충돌이 생기면 어떤 일이 있을까?

 

한국에서 전쟁이 나서 난민들이 일본에 가면 인도적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죽여야 한다는 망언에서 임진왜란이란 형태는 끝이 나도, 임진왜란이 가진 의미는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내용적으로 큰 결함이 없지만, 사실 이미 1권 서두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백선엽이란 육군 예비역장군은 한국전쟁의 영웅이라 하나, 그는 일제 만주군관으로 활약한 친일파이다. 항일애국투사를 죽이는데 혈안이 된 자가 이순신 장군을 운운하는 게 참으로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순신은 일제에 억압당한 민중의 빛이었다. 항일정신이 이순신에게 이어진 것이라면 백선엽 장군이 <이순신과 임진왜란>에서 자신의 발언이 얼마나 모순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더 심한 모순은 이순신 장군이 다시 조명된 것은 정조대왕 시절이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뒤 100년 정도 그의 기록은 삭제되거나 사라졌다. 이순신은 전투에서 싸운 장수이지만, 그를 지우고 싶은 이들은 전장이 아니라 선조 옆에서 호종하던 세력이다. 동인에서 남인영수(유성룡, 이원익, 이덕형)의 지지를 받은 장수이며, 더구나 남인과 서인이 제일 심각하게 대립하던 예송논쟁 시절, 남인의 논객 윤휴는 이순신과 인척관계였다.

 

윤휴의 서모(庶母)는 덕수이씨, 충무공 이순신의 첩의 딸이었다. 윤휴는 남원윤씨로 이순신 장군 밑에 활약한 무관이 많았던 집안이다. 한편으로 사돈관계이기도 했다. 윤휴는 오리 이원익과 인척관계고, 오리 이원의 손녀사위인 미수 허목과 사돈관계(친한 친구)였다. 임진왜란이 당연히 왜군과의 전쟁이었을까? 인조와 효종을 지나 숙종까지 이순신의 이름에 그늘은 있었다. 칠량해전에서 원균이 왜 통제사로 갈 수 있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역사를 다시 봐야하고, 그 역사를 서양의 눈이 아닌 조선의 눈으로 다시 봐야 하는 것이 <이순신과 임진왜란>에서 전하고 싶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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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9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30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7-11-30 0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 속에서 대의를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모습이 일반적이기에, 대인 또는 성인의 모습이 더 위대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11-30 09:24   좋아요 1 | URL
대의를 위해 싸운 자를 외면하고
옆에서 아첨떠는 인간들이 승승장구하는
과거와 최근 이명박근혜 정부의 현실태를
보자면 작금의 역사는 과거의 일로 치부해서는
안되는 일이고,그곳에서 연꽃처럼 피운
분들의 노고를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게
후세의 도리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