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박열이 누군지 잘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박열이란 사람이 과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게다가 그가 일본사회에 큰 풍파를 일으킨 조선인이란 사실도 알았다. 단지 재판과정이라 상세한 내용까지 몰랐다. 근대사와 관련하여 독립운동 내지 항일운동, 혹은 이와 유사한 민족 내지 민중운동들을 살펴보면 박열의 이름이 나온다. 영화 <박열>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박열의 아내이며 동지인 가네코 후미코이다. 그녀는 자서전을 낸 것까지 나도 알았지만 직접 읽지는 않았다.

 

단지 아는 사실은 후미코는 어린 시절 매우 불우한 삶을 보내고, 자신이 일본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박열과 혼인신고를 올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서 그녀의 유해는 박열의 고향에 묻혀있다는 점이다. 박열의 시신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 있다. 박열과 후미코는 죽어도 같이 묻히자는 약속은 했다. 안타깝게 육체는 분리되고, 박열과 후미코의 신위정도만 같이 남을 뿐이다. 영화 <박열>1923년 관동대지진을 배경으로 만든 작품이다. 지진은 국가재난 중에서 가장 무서운 사건 중에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화재나 수해는 그 자체로 끝이 나지만, 지진은 수해와 화재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지진이 일어나면 우선 지반이 갈라지고 땅 밑의 빈 공간에 추락할 수 있다. 게다가 지하에는 단순히 자연토양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일본의 근대화가 진행되었다고 하나, 지하에는 각종 선로나 관이 매설된 경우도 많다. 지금 지진이 일어나면 2차적 피해로 화재가 되는 이유는 지하에 매설된 관로 중에는 대부분 전기선로와 가스관이 있다는 점이다. 가스관에서 가스가 새어 전기선로에서 일어나는 스파크현상에 따라 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

 

현대사회처럼 당시 일본이 그 정도로 도시시스템이 구비된 것은 아니나, 화재가 많이 일어났다. 일본 내각대신들이 회의할 때 모두 덥다고 짜증을 부린다. 그러는 와중 누군가가 대답한다. 밖의 온도는 46도라고 말이다. 화재로 인해 기온이 국부적으로 상승하여 주변까지 열기를 타고 간 것이다. 당시 일본 건축물이 고층건물이 없다는 점에서 열섬현상 같은 공기순환 장해가 없었을 것이다. 국부적인 화재가 빈번하게 일어나니 지진의 무서움이 바로 이런 것이다. 지하에 가스관은 없어도 집안에 전기는 들어온다. 전기로 인한 화재, 혹은 아궁이에서 불씨가 나와 화재로 이어진다.

 

이 심각한 사태를 두고 일본내각은 제대로 정리하기보단 이 상황은 타개하기 위해 대안을 내놓는다. 현재 조선인들이 일본에 대한 불만으로 이 혼란을 이용하여 반란을 도모한다고 말이다. 우물에 독을 타고, 불을 지르며, 각종 폭력적인 행위를 일삼으며 정국을 마비한다는 식으로 정보를 날조한다. 영화에서 관동대지진으로 수십만 명이 사망했지만, 대지진 이후 불안심리를 잠재우기 위해 조선인들은 수천명이나 살해되어야 했다. 자경단이 몰려와 칼로 베고, 창으로 찌르고, 강에 수장시키는 등 아주 잔혹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

 

일본입장에서는 이런 혼란을 조선인에게 넘기고, 그 마무리 정점을 수괴를 지목해야 했다. 불령사에서 활약했던 박열은 일본정부에서 불온한 인물로 지목받았다. 일본이 조선을 침범하고 나쁜 짓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일본 내에서도 일본정부를 규탄하던 자도 많았다. 1923년은 19193·1운동 후이기도 하나, 3·1운동은 러시아 소비에트에 의한 볼셰비키혁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세계에서는 제국주의 씨앗이 퍼져간 것처럼 이에 대비되는 좌파 세력도 많았다.

 

한국에서 현재의 좌파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되나, 당시 사회주의 내지 자유주의조차도 좌파라고 볼 수 있다. 국가의 천황을 중심으로 내각이 이루어진 일본에서 개인의 자유를 중심하는 자유주의조차 용납할 수 없고, 사회주의 노선 같은 경우 반봉건을 넘어 반국가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주의자 내지 아나키스트를 비교하면 유사한 접점도 있는 반면 그 기본은 다르다. 박열은 기본적으로 아나키스트였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광복군 내지 임시정부만 생각하겠지만, 주로 공작과 암살을 주도하던 이들은 아나키스트들이다.

 

아나키스트들이 암살을 하던 자 중에 조선총독부 주요인물, 을사오적 같은 친일파 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암살만 아니라 관공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의열단이 조선총독부 폭파사건이 있은 후인지 영화 <박열>에서 폭탄을 구하기 어렵다는 장면이 나온다. 아나키스트는 무정부주의자로써 극단적 자유주의를 추구한다. 한국의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로 이상하게 가고 있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추구하는 자유주의란 국가나 사회가 무엇이든 그 개인이 하고자 하는 행동에 아무런 제재를 가할 수 없다. 단지 그 자유적 책임이 죄가 없는 사람에게 피해가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권총과 폭탄을 들고 죽음을 각오하고 갔다. 성공할 수 없을 줄 알면서도 혹은 가서 아무런 성과 없이 죽임을 당할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의 공간에 찾아간다. 친일파와 일본 관료를 무참하게 살해해도 일본의 민중은 건들지 않는다. 아나키스트들의 마음은 그게 중요했다. 일본의 민중 역시 억압받는 또 하나의 인간이라 본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의 국제사회에서 보여준 행동들은 민족과 국가가 있더라도 아나키스트들에겐 그것은 이미 초월한 개념이다.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일본인이지만,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부정했다. 아나키스트 역사에서 대표인물로 이회영이 있겠지만, 이회영과 같이 활동하던 단재 신채호도 있다. 신채호에 대한 자료를 본다면, 그가 세계 아나키스트 대회에 참석할 때 일본, 중국, 조선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영화 <밀정>을 보면 조선독립운동에 헝가리 아나키스트가 도움을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역시 제국주의를 부정했기에 그들과 접점이 있은 것은 사실이다.

 

영화 <박열>에서 갑자기 후미코가 노래를 부르니, 옆에 있던 불령사 회원들도 모두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른다. 그 노래의 기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만든 국제노동자조직 인터내셔널을 상징하는 노래이다. 인터내셔널가는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시기에 프랑스국가인 라 마르세예즈와 같이 불러진 노래이고, 결국 인터내셔널가는 초기 소비에트연방의 국가가 된다. 하지만 그 노래는 가끔 노동자의 날에 길거리에서 들을 수 있는 노래이다.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이 가진 분노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다.

 

무엇 때문에 후미코가 박열에게 빠지고, 죽음을 닥칠 것을 알면서도 불령사에서 활동했는가? 박열은 시 개새끼를 짓는다. 부당한 권력 앞에 힘없는 자가 조롱당해 억울함에 복받쳐 나오는 눈물을 해학적으로 써내려갔다. 후미코는 이 시를 보고 박열에게 반했고, 그 마음은 평생 이어갔다. 후미코는 가난한 이유로 어린 시절에 수많은 고생과 핍박을 받았다. 단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조선인만 고통 받는 게 아니라 일본인 내에서 가난하고 힘 없는 자도 억압에 시달린 점이다.

 

영화에서 일본 변호사 중에서 후세 다쓰지란 인물을 등장시킨다. 후세 변호사는 영화에서 소개한 것처럼 한국건국 훈장을 받은 최초의 외국인이나, 2·8 독립선언문 제작에 도움을 주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만 아니라 일본의 가난한 노동자를 대변한 변호사이다. 평생의 약자를 위해 헌신했으며, 대한민국 헌법조차 그가 초안을 제공했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가 없다. 영화 <박열> 구성은 박열과 후미코의 만남, 일본내각의 음모, 그리고 관동대지진에 따른 조선인 학살, 박열의 구속과 재판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은 후미코가 죽고, 박열은 후미코의 의문사와 관동대지진에서 희생된 조선인들의 원한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 마지막까지 삶을 택한다. 시나리오라면 이미 역사도서 내지 평전 혹은 인터넷 자료에 잘 나왔을 것이다. 단지 영화에서 이런 시나리오의 토대가 되던 당시 상황을 어떻게 각색 하는 가이다. 박열은 영웅의 이미지보단 광인 내지 광대로 자체했다. 일본 검사와 법원에 당당했고, 보통사람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보여주었다. 이에 후미코 역시 박열 이상으로 광기를 보여준다.

 

검사가 박열에게 협박을 받았냐는 말에 오히려 자신이 박열을 협박하고, 사상적으로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이야기 흐름은 박열을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그 중심인물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후미코였다. 이야기의 최고조는 법정이다. 법관에게 자신의 사상을 당당하게 말하는 박열과 후미코의 연기가 돋보인 상황이다. 박열과 후미코 역을 맡은 배우는 한국인이나, 대사를 말하는 과정은 롱 테이크로 할 수밖에 없다. 일어로 말을 해야 하나, 일어에 대한 발음과 대사, 그리고 감정표현 모두 신경을 써야 하는 고난이도 연기이다. 법정에서 긴 대사만으로 작품의 의미를 내세울 때 배우의 연기력과 감독의 연출력이 없으면 어렵다.

 

한국에서 법정에서 롱 테이크로 명장면을 연출한 영화는 송강호 씨가 등장한 <변호인>이다. 부림사건 때,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를 위해 야학을 해준 대학생들은 불온사상가로 매도해 정식 심문을 거치지 않고 고문을 가한 한국에서 잊을 수 없는 용공조작사건이다. 피고가 된 자들은 모두 죄가 없지만, 죄인이 되어야 했다. 관동대지진 때 죄 없는 조선인들이 권력자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희생되어야 했다. 법치국가에서 죄의 유무는 법정 안에서 밝혀지는 게 당연하나, 오히려 법정은 권력을 대변하는 하나의 도구로 되어버린 것이다.

 

이준익 감독은 관동대지진이란 대재앙을, 그때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인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후세에 남겨준 박열과 후미코, 그리고 불령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기린 것이다. 영화에서 시대는 일제강점기이지만, 그 맥락은 현대적으로 유사한 점들이 많아. 권력계층들은 자신들의 잘못이나 혹은 군중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다른 희생양을 찾아 제거하고, 거기에 반발하는 자들은 철저히 왜곡한다. 정보를 차단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정국을 나가는 모습은 비단 일본 관동대지진 사건만은 아니다.

 

영화 <박열>말고도 역사적 사실을 근원으로 만든 작품들이 많다. 이런 작품에서 주장하는 바는 역사라는 기록에서 당시 누군가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각본을 만들지만, 왜 각본을 짰는지를 우리 관객은 생각해야 한다. 영화 <박열>은 상영시간이 2시간 10분 정도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관람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주말의 킬링 타임 영화으로 마무리 된다면 너무 아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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