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 -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안재성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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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 집안 제사일로 시골에 내려갔다. 시골에 가면 그동안 만나지 못한 친척들을 만날 수 있다. 나의 친가 쪽 친척들은 그래 많지 않다. 증조할아버지와 고조할아버지가 그 위의 할아버지들이 독자이거나, 다른 형제들이 있어도 모두 일찍 삶을 마감했다. 친가 식구가 6촌 이내나 10촌 이내의 숫자가 동일하다. 그 정도로 가족이 많지 않다. 그러나 촌수를 늘려 20촌까지 가면 말이 달라진다. 그때는 제법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친가의 식구들과 제사를 지내면서 이제 식구수도 계속 줄고 앞으로 묘관리가 어려우니 가족묘를 만드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가 되면 우리 직계식구들만 아니라 선대의 할아버지 기준으로 그 후예들은 모두 같은 무덤 내지 혹은 제삿날도 맞추자는 말이 나온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한국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518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먼 친척들은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에 살고 있고, 제사를 지냐면 동백리 벽송마을로 나는 찾아간다. 그곳에 아주 유명한 인물이 있다. 19805월 광주의 비극에서 마지막 수배자인 합수(合水) 윤한봉의 고향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내 선대 할아버지 묘소를 가는 입구가 마을입구와 겹친다.

 

거기에 합수 윤한봉 생가라는 표지판이 쓸쓸하게 서있다. 윤한봉 선생이 살고 있는 집은 현재 그의 고모가 살고 있다고 한다. 윤한봉의 친척들이 제사를 지내는 시기와 우리 가족들이 제사를 지내는 시기가 비슷하면, 마을제각에 가서 그들의 친척들을 나의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찾아가 인사한다. 게다가 거기 계시는 어느 노인 분은 나의 아버지를 알고 계셨다. 나의 형이나 사촌들은 잘은 몰라도, 내가 합수 윤한봉을 알게 된 동기는 집안문중 홈페이지에 그의 존재를 알았고, 그가 동백리 출신이란 것은 최근 몇 년 전에 알았다.

 

아버지가 살아생전 윤한봉 선생을 아냐고 물어보니, 아버지가 하는 말에 아주 더럽게 독한 놈이라고 했다. 그리고 외국에 망명 갔다가 병으로 죽은 것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전혀 발을 들인 사람도 아니나, 알고 있었다. 시골에 계신 작은아버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518에 대해 물어보니 작은아버지는 마음이 많이 아팠던 모양이었다. 자신은 아직 광주에 있는 518묘지에 가보지 않았으나, 언제 자신을 대신하여 다녀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전에 윤한봉 선생의 자서전인 <망명>을 읽었다. 그가 살아온 인생을 처절했고, 상당히 지독한 신념을 지녔으며, 마지막은 가난한 인생을 살더라도 부와 명예 모두 버리고 세상을 떠난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한국 미술사학자로 유흥준 교수가 유명하다. 그가 언제 사람들을 데리고 윤한봉 선생 본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가 왜 찾아갔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 읽은 안재성 작가의 <윤한봉>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았다. 윤한봉 선생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될 때 옆방에 유흥준 교수가 수감되어 있었던 것이다.

 

윤한봉 선생의 인생을 보면 지금도 한국에서 유명한 재야인사, 학자, 정치인 등이 많다. 김남주 시인과 박석무 다산연구소장, 그의 절친한 후배 윤상원, 윤상원과 영혼결혼식을 올린 박기순, 영혼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을 위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어준 황석영 작가 등,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제법 명성이 높은 사람들의 이름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그러나 윤한봉이란 이름은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 진짜 민주주의 내지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이나, 혹은 거기에 관심이 많은 시민들, 또는 그 사람들을 악의적으로 비난하고 왜곡하는 부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왜 사람이 저렇게까지 되는지 생각해보았다. 그가 가진 평소 성품이나 인격이 어느 특정한 사건을 겪거나, 어느 특정한 인물을 만날 때 변화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훌륭한 인간은 그 자신이 뭔가 성과를 내어 보여주기보다 그 성과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더 좋은 삶과 가치를 주는 것이다. 윤한봉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고, 멋을 부리거나 사치를 즐기지 않았다. 그가 가진 멋은 인간적인 정이었고, 그가 제일 사치를 누린 것은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가진 것은 쇠불알 같은 가방이다. 세면도구와 속옷 그리고 필기도구가 전부이다. 가방 하나에 모든 것을 들고 다녔다.

 

자신은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남이 오면 좋은 것을 대접하고, 자신은 골방에 잠을 자도 그렇게 모은 돈으로 민족학교 내지 한청련 활동에 모두 투자했다. 세월호 비극이 터지자 뉴욕에서 세월호 관련 운동이 있을 때, 그 모임 주도세력의 창시자가 윤한봉 선생이었다. 미국에 망명갈 때 그는 나라를 잊지 않았다. 전봉준 장군과 김구 선생을 존경하여 민주, 민족, 민중을 사랑했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여 오직 배고프고 고통 받은 이웃을 도와야 한다고 여겼다.

 

<윤한봉>을 읽어도 그가 한 업적을 생각하면 보통 인간으로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여겼다. 아마 시골에 가서 윤한봉 선생의 친척들을 만나면 더욱 그럴 것이다. 윤한봉 선생의 아버지 윤옥현은 아들이 민주화운동으로 경찰에 끌려간 뒤 화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시골의 작은아버지가 윤한봉과 518의 이야기를 듣자 착잡한 기분을 드러낸 것이다. 역사에 획을 남긴 인물, 그리고 그가 살아온 인생이 마치 선구자 내지 순교자 같다면 그가 후세에게 큰 존경을 받는 것은 당연하나, 그가 살아온 인생도 그러하나 주변 가족들이 겪어야 할 고통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그렇게 희생으로 이루어져 오늘 자유민주주의를 맞이하게 되었다. 최근 대통령이 탄핵되고, 새로운 대통령이 등장했다. 새로운 대통령은 거의 10년 만에 518행사의 본질을 되살렸다. 유족을 찾아 위로하고, 그들과 같이 묘역에도 참배를 해주었다. 518 비극이 슬픈 이유는 그 당시 희생자는 계엄군에 저항하던 많은 시민들도 있지만, 어린 여중생과 여고생도 있었고, 심지어 세상의 빛을 얼마 보지도 못한 어린 아이들까지 있었다. 광주의 비극은 윤한봉 선생에게 평생 부채로 남았고, 거기서 죽지 않고 살아 혼자 미국에 있었다는 사실은 스스로 철저한 인생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의 모습을 보면 최근 한국의 지성인이나 엘리트들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느 현상이나 사건들을 보면서 어려운 말로 직시하여 고찰할 수 있지만, 때로는 너무 감정적으로 수사적으로 빠져든다. 논리라는 것은 정확한 통계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의 기본적 윤리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최근 한국 지식인층은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의 도덕적 매너리즘에 빠져 대중과의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윤한봉 선생이 518 이전부터 활동할 때 농민을 위해 활약했다. 농민들은 제대로 아는 것이 없고 오로지 땅의 진실만 추구할 뿐이다.

 

그런 농민에게 어려운 말을 늘여놓고, 실질적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민주주의 내지 진보적 가치관을 지닌 지식인 내지 엘리트 한계는 바로 여기서 부터이다. 그들이 말한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들이 만든 지성과 감성은 필요하다. 문제는 그 지성을 위한 지식이 필요하기도 하나, 그 이상으로 그들이 가진 지성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할 사람이 진실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한다. 가장 높은 자들은 가장 낮은 곳을 찾아갈 용기가 필요하다. 서민이나 농민이나 모두 말을 예쁘게 하지 못한다. 욕을 반 섞어 가고, 때로는 농담 그 자체로 이끌어가야 할 때도 있다.

 

고상한 정신은 필요하나, 모든 사람들에게 고상한 정신을 강요할 수 없다. 윤한봉 선생의 호가 합수(合水), 똥과 오줌이 모두 모인 오물이란 의미이다. 오물은 더럽기도 하나, 우리 모두가 오물을 내보내는 생물이다. 깨끗한 것은 바라도, 그것을 위해서 누군가는 더러운 것을 받아들여 정화시킬 필요가 있다. 게다가 똥오줌은 과거 농초에게 소중한 비료가 아닌가? <윤한봉>을 읽으면서 우리 모두가 윤한봉 선생처럼 살아갈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집안 일로 알아 갈수밖에 없는 인물이나, 그래도 내가 관심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면 그저 족보에 이름 세 글자 정도 올라갔다는 정도만 알 것이다. 합수 윤한봉이 이 세상과 작별한지 10년이 되었다. 독재군부가 물러가고 난 후 그가 귀국해도 여전히 한국은 어두운 안개에 가려워져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너무 극진적인 모습도 보였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사상과 가치관은 우리가 절실히 필요해보였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가 합수라는 호처럼, 광주의 비극은 단순히 과거의 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라는 것을 그는 절실하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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