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후반생 - 다산 정약용, 유배와 노년의 자취를 찾아서
차벽 지음 / 돌베개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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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후반생>을 보면서 정말 인상적인 의미가 나왔다. 한국은 단군조선 고조선을 포함하여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긴 시간 속에 무()의 상징은 충무공 이순신, ()의 상징은 다산 정약용이다. 조선의 역사는 600년이고, 긴 왕조에서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만큼 대단한 사람들도 많았다. 지금도 한국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서 2사람은 절대 놓칠 수 없는 위인이다. 그러나 2사람 모두 공통점이 있다. 시대에 필요한 인물이나 빛을 볼 수 없던 자이다. 정적들로 하여금 죽음의 고비를 계속 넘어온 자들이다.

 

이순신은 원래 하급무관이었으나, 친구인 유성룡의 천거로 상당히 높은 지위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유성룡은 정치적 성향은 동인이었으나, 결국 남인의 영수가 되었고, 이순신의 정적들은 대부분 서인들이었다. 게다가 임진왜란 후반부로 가면 동인에서 시작한 남인과 북인이 서로 갈등을 빚게 되고, 유성룡은 북인에 의해 탄핵당해 평생 안동에서 나오지 않는다.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한 친구는 정치적으로 파면당하고, 그 친구가 파면당한 것을 멀리서 들은 다른 친구는 왜적의 총탄에 서거한다.

 

만일 유성룡이 정승의 자리를 지키고, 선조 옆에서 전쟁 후의 정국을 다스렸다면 분명 이순신을 죽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승리하여 돌아와도 선조와 서인들에 의해 죽을 운명이다. 자신이 반역죄로 몰려 참수당하면 유성룡 역시 무사하지 못한다. 누가 반역죄로 몰리면 가족과 친척, 친구까지 연좌되어 처벌을 받는 게 조선의 형벌문화였다. 이로부터 200년이 지나 정약용은 천주학쟁이란 오명으로 작은형과 매형 그리고 친구들을 보내야 했다. 게다가 대부분 신유사옥에서 죽은 자들은 남인이었고, 그중에 신서파 내지 시파 계열이었다. 노론 벽파와 남인 공서파는 어떻게든 정약용을 죽이려 했다.

 

비극적 운명으로 살아간 2사람에게 이순신은 죽음 그 자체로 승화했다면, 정약용은 삶을 유지함으로 승화했다. 지금 정약용의 이름을 들으면 실학자, 철학자, 과학자, 정치가 등등으로 알고 있지만,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떻게 인생의 마지막을 보냈는지 잘 모를 것이다. 유배지도 다산초당만 기억하고, 그 초당과의 인연, 그 안에서 생활, 초당에 도달하기까지 여정까지도 말이다. <다산의 후반생>은 신유사옥 이후 다산이 처음 강진에 있는 주막에 오고 다산초당에 가고, 그리고 해배되어 마재에서 마지막까지 보낸 것에 대해 저술한 서적이다.

 

처음 강진에 올 때 사암(정약용의 본래 호)을 보고 많은 사람은 마치 괴물이 온 것처럼 놀라 도망치기 바빴다. 담을 허물고, 집을 파하여 도망치는 그 모습에서 유배지의 쓸쓸함과 세상이 모두 자신을 버린 것처럼 여겼다. 귀양살이 하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시기, 다행히 주막의 노파는 그를 받아주고, 방안에서 기거해주었다. 귀양살이하면 참으로 괴롭다. 귀양살이하는 사람은 사대부 양반이나, 조선의 양반 모두가 권력을 가진 게 아니다. 권력자의 눈에 거슬리거나 무고를 당해 귀양 가는 일들이 허다했다.

 

신유사옥의 천주교박해에서 정약용은 이미 천주교와 관계를 끊었다 해도 작은형 정약종, 매형 이승훈와 엮일 수밖에 없었고, 이가환과 9촌이 되는 다산의 친구조차 이가환의 친척이란 이유로 귀양을 20년 넘게 했다. 이런 운명에서 귀양살이에서 그 많은 서적을 저술했다는 것은 인간의 영역을 이미 초월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귀양살이에 감시의 눈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다산의 친구이며 사돈인 윤서유는 신유사옥 때 옥고에 시달렸다. 다산이 신유사옥을 당할 적에 서울에 있고, 친구는 강진에 있는데도 관아에 문초를 받은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박석무 학장님, 이덕일 작가의 책 이외에도 개인으로 들은 이야기가 참 많이 담긴 것 같았다. 지금이야 다산학술재단이 활발히 연구하고 있고, 강진군과 남양주시가 다산을 소재로 문화사업을 계속 발전시키고 있다. 하지만 조선말기와 일제치하 시절에는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다산초당은 원래 초가집이었으나, 해남윤씨 행당공파(어초은공파)의 소유물이고 건축물 관리를 위해 기와집으로 교체했다. 책에서 이것을 언급했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다산연구자로 유명한 분으로 박석무 학장이나, 체계가 잡히기 전에는 다산초당을 관리하시던 윤재찬 옹이었다. 윤재찬 옹은 작고한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나의 할아버지와 친했던 분이다. 과거의 일화이다. 내가 다도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다산초당에 갈 기회가 있어서 초당 아래에 있는 전통찻집 가게 세작 하나를 샀다. 다신계(茶信契)란 가게의 주인은 정약용 선생이 귀양살이 하던 시절에게 초당을 내어준 윤단(윤규로)의 후손이 운영하는 곳이다. 윤재찬 옹은 그들의 후예이다.

 

다산 선생이 초당에 기거하게 된 동기는 학문수준도 높은 것도 있지만, 그들이 외가 집안과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다산의 친모는 해남윤씨 귤정공파(어초은공파) 고산 윤선도 직계 손녀분이다. 다산초당에 기거한 정약용 선생은 외가 방계로부터 생계를 보장받고, 강진군 옆 해남에 위치한 외가 녹우당(綠雨堂)에서 장서를 빌려보고 공부했다. 그리고 한국 최고의 학문그룹인 다산학단을 일으킨 것이다. 시골 강진에 가면 가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이야기를 듣는다.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같은 많은 도서가 다산 혼자서 저술한 게 아니라 제자들과 같이 만들었고, 제자는 스승의 이름으로 책을 세상에 알린 것이라 했다.

 

200년 전의 이야기가 우리 집안에서 구전으로 전해온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산초당 주인인 윤재찬 옹이 나의 친할아버지와 친구였고, 다산의 사돈이자 친구인 윤서유는 나의 직계할아버지와 친척 사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하던 일중에 하나가 집안 족보를 확인하는 절차였다. 나의 조카가 족보에 등재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아버지에 보여드린 것이었다. 병원에서 손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돌아가시기 전 나는 그 족보를 집으로 다시 들고 왔다. 어제 주말 낮에 다시 족보를 확인하면서 색인부분을 찾아봤다.

 

내가 보는 족보는 대동보이고, 집에 있던 족보는 병조참의공파세보였다. 그런데 대동보를 보니 이때까지 우리집안에서 태어난 아들과 딸의 출생을 기록한 것이 어느 책의 몇 페이지에 있는지가 나와 있었다. 거기에 정약용의 3형제의 이름이 있었다. 어머니가 해남윤씨이기 때문에 대동보에 올라가 있던 것이다. 대동보가 아닌 병조참의공파세보에도 정약용의 이름은 올라가있다. 나의 파보에서 정약용은 윤서유의 사돈으로 나온다. 게다가 윤서유가 벼슬하던 중 병으로 작고하자, 그의 묘비에 글을 쓴 것도 족보에 남겨져 있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한 말이 강진 항촌마을에 다산 선생의 따님이 시집왔다는 이야기다. 시집간 집은 나의 아버지가 태어난 집에서 걸어서 10분 내외이고, 옛날 작은할아버지와 큰할아버지 집에 2분도 걸리지 않는다. 명발당이란 이 한옥채에 아직도 사람이 산다. 여기서 다산의 따님이 시집을 왔고, 다산의 따님은 남편, 시아버지, 시할아버지가 묻힌 자리 주변에 잠들어 있다. 이미 태어나는 순간 우리 가족은 다산 선생과 엮이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물론 정해창 선생이나 정새균 국회의장 같은 정약용 선생의 직계후손 분도 있지만, 다산 선생을 유배지에서 우러러보고, 해배 뒤에도 잊지 않고 그 뜻을 기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 같았다.

 

아버지는 예전에 우리 집(고조할머니)이 불이 나서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집이 불타기 전에 엄청난 서적이 있었지만,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전후관계로 보자면 목민심서가 동학운동의 토대가 되는 책이란 점이고 다산의 제자들은 동학운동 시기에 억압을 당했다는 뜻이다. 다산이 살아생전에 서학에 의해 박해를 당했다면, 그분이 작고한지 수십년이 지나서는 동학에 의해 박해당한 것이다. 고조할머니가 증조할아버지를 데리고 항촌마을에 이사왔는데, 그 전에는 다산초당 앞 강진포구 건너편에 있는 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훈장선생을 하던 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강진만을 지나 다산초당으로 갔다고 한다. 책에서도 다산의 18제자 외, 윤정기의 인척 및 양반자제가 초당에서 공부했다고 하니, 인척이라면 분명 맞는 말이다. 아버지가 할아버지 장례식 때 다산계원들이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산도 그렇지만 조선말기 양반들은 모두 잘 사는 게 아니다. 남인 사대부들은 언제 무고에 의해 처형 내지 귀양 당할지 모르는 노릇이고, 힘이 없기에 하루 밥 먹는 일조차 버겁다. 다산 선생은 원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사건으로 더욱 집안은 몰락한다. 정약종의 순교와 정약전의 병사로 남은 조카들을 모아 키워야 했다.

 

강진에서 유배살이 중 아드님 2분이 오실 때 본가에서 마늘을 심고 팔아 여비를 마련했으니 그 초라함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게다가 제일 큰형의 따님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좌되어 제주도 어느 집의 종으로 팔려갔다. 정약용 선생의 큰형은 그런 딸을 생각하면 눈물로 밤을 보내고, 차라리 그때 같이 죽었으면 이런 비참한 생활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다산 선생의 신유사옥부터는 가족들의 죽음에 절망했고, 돌아와서는 가난에 시달렸다. 게다가 다산 선생은 담바고(담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연초를 준비하는 것도 어려운데, 아내인 풍산홍씨는 얼마나 힘들까?

 

책을 읽으면 다산 선생이 위대한 분이란 사실도 알지만, 그와 다르게 그가 참으로 소박하고 조금 다르게 말하면 조금 얄미운 분이었다. 친구를 좋아하는 남편을 둔 아내는 참 괴롭다. 없는 살림에 손님이 오면 어떻게든 대접해야 한다. 귀양살이하기 전에도 친구와 찾아와서 술과 안주를 내어온다고 하나, 친구들 대부분은 가난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하나, 농사를 짓는 양반은 많았다. 실학이 발달된 동기도 남인 사대부들은 권력과 재력이 없기에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했다.

 

배고프면 귀천이 필요 없다. 시대의 모순과 적폐는 지식인들에게 고독을 백성들에게 기아를 선사한다. 강진에서 다산은 다산초당이란 좋은 환경에서 공부했지만, 그와 다르게 백성들의 삶을 보고 한탄을 토해내었다. 작가의 서적에서 보이는 사진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로 이어지는 동백숲속 길은 아름답다. 다산초당 옆 정자에서 보는 강진만 포구는 참으로 시원하다. 아름다운 광경 뒷면에 다산의 눈물이 어린 것이다. 정조대왕 붕어 후 자신을 알아보는 자는 양심의 눈과 존경의 눈을 가진 제자와 학자지만, 세상은 너무 무서웠다.

 

자신을 탄압했던 서용보는 정승자리에 올라가 계속 자신을 억누르고, 구중궁궐 안동김씨 세도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남양주로 돌아와 열수노인으로 학문을 집중하려 해도, 그에게 남은 것은 허무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단지 우리가 다산 선생의 서적과 연구도서를 읽으면 대단한 분이라 여기겠지만, 그가 살아온 발자취를 본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숙연해진다.

 

내년 2018년은 다산선생이 강진에서 해배된 지 200년이 되는 해이다. 매년 음력 222일은 다산선생의 기일을 지낸다. 차를 올려 제를 올리는 헌다식이 이제는 경기도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가 되었다. 아장 혜장스님께 걸명소란 시를 지어 차를 얻어 마신 다산 선생의 재치, 다산선생의 녹차 제조방법은 200년을 넘어 계속 유지된다. 과거에 있던 위대한 인물과 시기가 있다고 말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지켜가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집안문중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았다. 게시자 이름을 보니 과거 아버지와 친구 분이었다. 그분이 시제에 지내는데 집안식솔이 15명 정도 모였다고 한다. 사람이 많고 적음에서 내 글을 보는 사람들은 뭐 대수로운가? 하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이 모시는 어른은 윤광택(다산선생 아버지의 친구), 윤서유(다산선생의 친구), 윤창모(다산선생의 사위), 윤정기(다산선생의 외손자) 등등이 있다. 여기에 더 보태어 아쉬운 것은 아버지 친구는 다산선생의 외손자를 시제에서 모시지만, 피는 조금 다르다. 직계손이 이어지지 않아 윤광택의 동생 후손분이 대신 입양하여 대를 모신 것이다.

 

그래도 이마저도 다행이 아닌가? 다산선생의 친구와 따님, 외손자 되는 분은 계속 후대에 의해 기억되고 있다. 물론 다산학술재단에서 방산 윤정기 선생의 학문을 연구하겠지만, 그분의 묘를 깎아주고, 제사를 지내주는 것은 후예들의 몫이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했던가? 우리의 현실을 보면 역사를 잊는 것보다 역사조차 배척한다. 그러면서 한국인의 특유의 민족주의는 내세우는 형태에서 아쉬움만 남는다. 지켜야 할 것은 그 고집스러운 민족주의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아니라면 자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인지 한 번 더 생각하면 좋겠다고 여긴다.

 

다산은 분명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위인이고, 세계적으로 기념될 정도로 훌륭한 학자이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지키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동학혁명 시기에 다산의 서적을 모조리 없애려 했고, 그와 그 제자들의 후손들은 핍박을 받았다. 역사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후손들이 오래오래 유지를 지켜서 가능했다. 책에서 1888년 이가환과 권철신 같은 신유사옥 희생자들의 묘비를 공개했다는 내용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유사옥이 1801, 다산서거가 1836년이니 그 노고는 알아주는 게 도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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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5-15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허허.. 요즘 연애생활로 바쁘신 분이 어찌 이리 긴 리뷰를.. 허허..

만화애니비평 2017-05-15 21:47   좋아요 0 | URL
여자친구는 현재 야근하고 퇴근하고 있을 겁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