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 - 무지와 오해로 얼룩진 사극 속 전통 무예
최형국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집안 문중에서 발간한 도서를 보면 반드시 등장하는 그림이 있다. 자신의 얼굴을 그린 자화상이 현재 국보 240호로 되어 있고, 그의 작품 중에 유명한 것으로 <유하백마도>가 있다. 백마를 그린 이 작품을 본다면 당시 한국의 말들, 즉 조선의 마필은 우리가 TV에서 보는 말하고 상당히 다르다. 우리가 보는 말은 다리가 매우 길고, 몸매가 매우 날씬하여 승마용으로 사용되는 말들이다. 그러나 조선의 말은 덩치가 크고, 다리가 그렇게 길지 않으나 다리 굵기가 매우 굵은 편이다. 제주도의 조랑말이나 혹은 조선의 여타 지역의 말은 보면 키가 그렇게 높지 않으나 덩치나 다리 굵기가 매우 튼튼해 보이는 점이 특징이다.

 

한국의 지리를 잘 생각해보자. 유럽의 지형은 일부지역은 제외하면 대부분 평야들판이다. 산이 많지 않고 오히려 큰 하천을 중심으로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하상계수, 하천의 경사가 급한 한국의 지형에서 서양의 말들, 특히 경마공원에서 보이는 말들이 제대로 달릴 수가 없다.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구릉지에 도로를 만들고, 산을 깎아내려 거대한 대규모 단지를 만든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개발이 덜 된 지역을 가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한국의 산세는 그렇게 평탄한 편이 아니란 점이다. 배산임수(背山臨水), 산을 뒤로 하고 강이 앞에 있는 지형은 전형적인 한국의 전통적인 삶의 형태이다.

 

산에서 나무도 하고, 열매를 채집하며, 사람이 죽으면 산에서 장례식절차를 밟는다. 강이 옆에 있으면 논에 물을 대고, 식수도 구한다. 산이 많은 지형에 경기용 승마들이 달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TV 사극이나 하다못해 역사를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에서도 서양식 마필과 안정까지 등장한다. 역사적 고증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학자들도 과연 얼마나 여기에 집중하고 하는지 모르나, 대부분 국민들이 접하는 역사는 중고교 과정의 국사 혹은 대학에서 배우는 교양 선택과목 수준이다.

 

그 외는 TV에서 보는 것인 역사이다. 주몽이 누구냐고 물으면 고구려의 창시자로 인식하기보단 오히려 탤런트 송일국 씨를 생각할 것이다. 태왕사신기에서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을 소재로 한다면, 광개토대왕을 사람들은 떠오르기보단 배용준 씨를 더 먼저 생각 낼 것이다. 물론 배우의 인기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분명한 것은 어쩔 수 없으나, 하다못해 역사적 고증절차는 신경 써야 하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나라는 안타깝게 일제 치하 시대와 한국전쟁으로 많은 문화유산을 소실했다.

 

조선시대나 그 이전에도 전쟁에 의해 문화재들이 모두 소실되는 경우가 많다. 아주 사소한 단서로 역사의 형태를 복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에서 작가는 이런 문제를 잘 지적했다. 그는 처음부터 E.H Carr<역사란 무엇인가> 한 대목을 제기한다. 역사라는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계속 대화하는 점이다. 과거의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하나의 사실보단 현재의 상황에 따라 새롭게 재구성되는 현재형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조선의 병사들은 삼지창처럼 생기 당파를 들고 싸웠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파는 베거나 찌르는 도구로 사용하기에 많은 문제가 있다. 당파는 창의 길이처럼 되어 있으나 창처럼 길게 찌르기에 부적합하고, 환도처럼 베는 것도 어렵다. 무기는 단순히 폼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이 거기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면 조선의 병사들은 당파만 들고 있다. 오히려 일반적인 창이나 환도를 들고 있는 것이 적합한 게 아닐까 싶다.

 

대부분 병사들은 당파만 사용하는데, 당파 말고 다른 무기가 없는 것인가? 전쟁에서 무기의 백미는 20세기부터는 공중전, 16~19세기 전후로는 근대는 총과 대포, 그 이전에는 칼이다. 물론 근대전쟁에서 근접전에서 칼은 중요하다. 한국 군대를 입영하는 장병에게 총검술은 아직도 필수과목이다. 총에 검을 부착하여 적에게 직접적인 물리공격을 취하는 것은 공중에서 미사일을 날려도 유효하다. 다소 구시대적 발상이 아닐 수 없겠지만, 칼을 사용하는 것이 최고의 전략전술 뿐만 아니라 전투에서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칼을 사용할 때 보병과 기병의 차이에서 기병은 보통 칼집을 한 손에 잡고, 말고삐를 잡고 이동한다. 다르게 생각하면 말의 고삐는 두 손을 잡는 편이 더 안전하고, 말을 훨씬 조정하기 쉽다. 이 책에서는 기병은 어리에 허리끈처럼 생긴 띠에 칼집을 연결시켜 칼을 언제 어디에서 꺼낼 수 있도록 고안했다. 허리춤에 칼을 차는 것은 일본 왜구군사들이 많이 쓰던 방법이다. 무기나 갑옷 체계도 일본, 중국하고 분별하지 않은 게 많았던 것이다.

 

이러다보니 시청자들에겐 보이는 조선시대 전쟁은 그렇게 만들어진 사극에 의해 아니면 그 영화로 만든 장면에 바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의복은 어느 정도 거의 일치하지만, 전투장면은 언제나 볼거리로 만들어진 셈이다. 전쟁에서 장수는 언제나 군주나 군주 바로 밑에 있는 고위신료들이 지휘하는 것은 옳다. 적어도 국가가 처음 생길 때는 군주가 장수로 등장하여 부하를 이끄나, 국가체계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히면 장수가 앞에 나가 싸우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지휘관은 전장에서 부하를 이끌고 명령하는 존재지, 선발대 병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투구도 착용하지 않고, 맨 머리로 싸우는 형태, 칼을 한 번 베면 바로 죽는 장면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과거 전쟁에서 가장 많이 죽는 이유는 칼에 신체()가 절단되거나 과다한 출혈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처에 파상풍균 등과 같은 세균에 의한 패혈증 증세로 사망하는 경우가 높다. 갑주를 만들 때 그리 쉽게 칼에 베이거나 화살이 관통당하지 않는다. 화살도 깃이 3개가 정석인데, 우리가 보는 TV2개로 나온다. 조선시대 무기체계가 상당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어느 순간 한국 전통문화는 낡은 것이고, 그런 소재조차 고증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멋대로 만들어낸다.

 

현대 산업은 문화라는 콘텐츠를 통해 새로운 이익을 창출한다. 문화산업을 하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와 정체성을 드러나게 해주는 중요한 수단이다. 일본하면 유명한 소재는 사무라이이고, 중국하면 쿵푸나 소림사 권법이다. 유럽에도 유럽 나름의 문화재 소재를 항상 문화산업 매체에 반영한다. 그런 중요한 일에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자면 다소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다른 나라의 작품을 참고하는 것도 좋지만, 국내 사극드라마 전투장면은 일본 사무라이 장르를 어느 정도 따라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드라마로 통해 조선시대 역사를 거의 배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도전과 이성계, 태종대왕과 세종대왕, 세조와 단종, 성종과 연산군, 정조와 영조 등등 그 시대의 인물은 우리가 직접 보지 않았기에 알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현대적 관점으로 복원하는 가이다. 지금 만일 이런 관점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우리의 먼 미래에 사는 한국인도 21세기 한국인에 대한 정의를 엉뚱하게 내릴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대해 아주 고리타분하고 지난 것은 보겠지만, 우리 역시 먼 미래에 아득한 과거에 불과하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는 책이 있듯이 우리의 미래는 결국 현대의 인간들이 조성한 토대에 의해 올라올 수밖에 없다. 과거의 모든 것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있었던 것을 모조리 부정하면 나라는 존재는 과연 어디에서 왔는지를 잃어버린다. 외국에 나가면 세계 문화유산을 접한 계기는 매우 많다. 하다못해 그 나라의 지역에서 조성된 유서 깊은 거리나 마을을 방문하면서 좋은 경험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막상 우리나라에 대해 생각하면 깊은 관심을 표하지 않는다. 그렇게 깊게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나, 최소한 우리가 무엇인지 생각을 하고 주변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

 

나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관점, 그 무게의 중심을 잡은 후 서서히 주변을 확장하여 퍼져가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 중에 불교가 조선에 오면 조선의 불교가 아니라 부처의 조선이 되고, 유교가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의 유교가 아니라 공자의 조선이 된다는 말을 본 것 같다. 세계화 시대가 이미 지난 시대에 근대화란 이름은 이렇게 우리 스스로를 파괴했는지 모른다. 전통을 지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나, 전통도 새로운 문화적 형태를 받아들여 그 자체로 전통이 된다. 가령 우리 제사상을 보면 사과와 시금치가 올라오나, 그것들은 원래 한국 토지에 없던 작물이었다. 그러나 집안제사를 가면 사과는 항상 올라가는 과일이다.

 

한국 전통문화 제사조차 그러하니, 앞으로 한국의 다양한 문화가 그대로 유지되기보단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고증이나 제대로 된 장면을 위해서라면 그런 섬세한 요소를 제대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전에 읽은 책으로 <문무를 갖춘 양반의 나라>를 보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동반인 문관보단 서반이 무관의 수가 더 많았다. 집에 있는 족보를 봐도 나의 할아버지들은 문관보단 오히려 무관들이 더 많았다. 그 중에는 을묘왜변(1555) 때 왜구를 무찌른 만호공(萬戶公)도 계셨고, 임진왜란 시기에 무관을 하시 분도 계셨으며, 그 무관의 친척들은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는데, 아버지와 아들, 조카까지 같이 순국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가 400년이나 더 되어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순신 장군을 성웅으로 모시고, 통영 충렬사에서 매년 충무공을 위한 제사가 열린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 동상이 조선의 갑옷이 아닌 중국식 갑옷이란 책 본문을 보면서 아직 갈 길이 참으로 멀다고 여겼다. 가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보면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 신선조와 유신자사의 이야기가 너무 낭만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과 메이지유신 이후의 조선침략 준비 시기는 그들에게 언제나 좋은 콘텐츠거리이다. 그에 반해 우리는 어떠한가?

 

독도문제가 외교문제만 아니라 역사문제까지 확장되는 점을 보면서 생각하지만, 지나친 민족주의는 문제가 되나, 근본을 모르는 상태는 더 심각하다고 여겼다. 조선이 처음부터 문약한 국가라고 생각하나, 처음부터 문약한 게 아니라 문약해지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도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과거가 문약하고 여기는 것은 역사에 대하여 너무 가볍게 혹은 너무 재미를 위한 관심거리로 봐서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든다. 가벼운 기분으로 접하는 부분은 인정한다. 대중이 쉽게 접하는 방법은 미디어밖에 없다. 그러나 그 미디어 자체가 틀려먹는다면 많이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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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7-04-10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화문 이순신 동상은 중국식 갑옷에 일본식 검을 차고 있다는데, 사극 속 우리나라 무예와 전쟁신 또한 잘못된 고증이 많았나 보네요. 몰랐던 사실을 알고 갑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04-10 15:54   좋아요 0 | URL
칼집이 허리춤에 있는 띠가 아닌 그냥 들고 있지 않은 게 한국식 무장체계이니 읽으면서 계속 놀라움만 뽑아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