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운명이라는 어떤 것인가? 사실 생각해보자면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귀찮고, 미개한 존재이고, 정치인들이 본다면 분명 나라의 주인이나 오히려 그들의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다. 한국에서 대부분 서민은 프롤레타리아로 살아가지만, 자신이 프롤레타리아라는 의식은 없이 그저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프랑스혁명에서 시민혁명이 일으킬 때 주요한 계급이 쁘디 부르주아였다. 그런 점에서 소시민은 자신이 쁘디 부르주아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다. 오히려 프랑스대혁명 때 머리가 아닌 열정적으로 에너지를 내뿜은 사람들은 배고픔에 허덕이는 프롤레타리아이었다,

 

대한민국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운명은 가혹하다. 그 혹독하고 기구한 인생은 나는 잘 알고 있다. 아니 알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나의 아버지는 노동자였지만, 노동자라는 계급의식보단 그저 사회적으로 소외받아온 존재로 살아왔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고, 그 아들은 시골을 나와 도시로 나와 배고픔과 서러움 속에서 살아왔다.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고기잡이배에서 일했고, 거기서 받은 생선을 당시 이모부 집으로 가지고 와서 시장에 내팔도록 했다. 잠수하다가 귀 안의 고막이 터지고, 배를 타게 되면서 한국에 있는 시간보다 오히려 한국 밖에서 있던 시간이 많았다.

 

아버지는 색맹이었다. 색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거기다가 평발이다. 월남전에 가서 돈을 벌려고 했지만, 평발이라 가지 못했고, 색맹 특성상 운전이나 여러 가지 직업을 선택할 수 없었다. 처음에 생선 잡이 선원에서 어느 순간 화물을 실고 다니는 마도로스가 되었다. 외국에 다니면 해적에게 붙잡힌 적도 있고, 배에서 병에 걸려 3일 동안 계속 먹지도 못한 채 고통에 괴로워했다. 처음에 정규직에 일하다 정년 후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가혹한 노동환경에 저렴한 월급, 거기다가 퇴직금조차 받지 못하고, 산업재해로 내려도 인정받지 못했다.

 

게다가 지역차별을 당했으니, 가난으로 시작된 배고픔과 추위, 학력이 낮은 것과 지역이 다른 이유로 차별을 당했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은 선천적 불평등과 사회적 도덕적 불평등이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런 불평등 2가지 모두 당한 셈이다. 평생 그렇게 일만 하고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고 말하신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2017217일 금요일 오후 1048분 사망신고가 내렸다. 아버지는 작년부터 담도암으로 고생했고, 수술을 받았지만, 암의 재발 및 전이가 되어 복막 전체에 암세포가 퍼졌다.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폐에 염증이 생겨 폐렴증세를 앓다가 결국 심장이 정지되어 그 힘든 인생의 막을 내렸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이전에 태어난 사람치고 키도 크고 어깨도 넓다. 머리는 잘 돌아가는 편이나 가난하여 중학교만 마치고 생계전선을 뛰어들었다.

 

어릴 적, 배고파서 잠이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 배고픈 상태서 무거운 지게를 지니 등이 펴지지 않은 이야기, 추위에 발이 얼어 동창에 걸린 이야기 등등 아버지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 좋은 추억보단 아픈 기억만 내게 이야기해줬다. 경남지역에 살면서 내가 노무현재단 마크를 차에 붙이고 타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게 기억난다. 내가 지역차별이 심한 지역에서 누군가 해를 당할까봐 그런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사회적 약자로 살아오면서 힘들게 사신 분이 강자의 논리에 의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할 때마다 가슴이 아파온다.

 

내가 마르크스, 루소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를 이미 옆에서 많이 봤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자, 특히 배에서 장기간 생활하는 선원들은 그 열악한 환경이 어떤 것인지 아버지 몸으로 확인했다. 작업안전사고로 대퇴부 뼈가 금이 가고, 용접하다 전기에 감전되고, 더운 기관실 열기 때문에 화상도 입었다. 이런 곳에서 일하다보니 심장과 신장이 나빠지고, 결국 암이 발병하는 이유 역시 유전자 요인보단 환경적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 마지막 모습까지 계속 지켜봤다. 처음에 고통에 괴로워하다 수술 후 좋아진 것처럼 보이더니 다시 재발하여 밥도 드시지 못한 모습을 말이다. 끝내는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조차 되지 않아 호스피스병동까지 이송되었다. 이송되기 전 선망증세로 며칠 동안 난동을 피우다가 다시 정신이 온 것 같더니 또 다시 선망증세로 이어진 후에 의식을 상실하고 결국 눈을 감았다. 통증이 얼마나 심한지 진통제와 몰핀이 들어가도 몸부림을 계속 치고 또 쳤다. 그러더니 어제부터 의식을 잃다가 오늘 밤, 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할머니 곁으로 갔다.

 

아버지가 맑은 정신에 나와 대화한 것은 결혼에 대한 부분이고, 아버지가 나라는 사람을 알아본 것은 13일 월요일 낮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나보고 병신이란 말이었고, 아버지가 마지막을 의식을 가진 것은 13일 저녁 늦은 시간 내 조카를 보고 이름을 부른 것이고, 아버지가 선망증세에서 제대로 부른 단어는 어머니였다. 아버지의 심장이 정지하고, 입에 가려진 호흡기를 떼니 아주 평안한 표정이었다. 꿈에서 할머니를 만났던 모양이다. 다른 사망자처럼 온몸에서 체액이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계속 드시지도 못하고 몸무게가 계속 줄어 뼈와 살이 붙을 수준이니 너무 깨끗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런 죽음을 보면서 또한 아버지 같이 병을 앓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은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이다. 대학병원 2인실에서 6인실로 갈 때 확실히 병실의 위생이나 쾌적함 등 여러 환경적인 요소가 좋지 못했고, 좁은 병실에서 그나마 남은 자리마저 보호자들이 있으니 얼마나 불편했는가? 그렇게 몸이 상할 정도로 일하고, 병원에서도 편한 안정도 취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건 요양병원 호스피스병동에 올 때 맑은 공기와 탁 트인 전경이 마음에 드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7일만 가고, 나머지 3일은 고통의 몸부림에 나머지 2일은 의식 없이 돌아갔다.

 

아버지 죽음에서 고통의 몸부림을 치는 모습과 괜히 나를 보면서 욕을 하고 멸시하는 모습에 고통 없이 운명하시길 바랐다. 자아의 의식이 없는 인간에게 과연 인간이란 이름을 가질 수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버지가 다시 깨어나지 못한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알아보고 가지 못한 것이 슬펐다. 적어도 인간답게 돌아가시면 좋겠다고 말이다. 인간의 조건이란 무엇일까? 최순실 게이트를 보면서 이재용의 구속사태까지 이어졌다. 삼성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암으로 죽고 투병 중인데, 오히려 진실은 가려지고 그들의 죽음을 조롱하는 사회에 안타까움만 더해간다.

 

인간의 죽음에 경로와 과정 그리고 마지막은 다르지만, 적어도 부조리와 모순, 삶의 애한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져 가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버지의 죽음에서 그동안 삶을 보자면 개인의 이야기지만, 그 개인이 살아가는 구조는 세상의 부조리로 조장된 삶이다. 아버지가 고모와 삼촌들이 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암에 걸린 다치면서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스트레스에 화병으로 인한 것이다라고 말이다. 아버지 같은 노동자들은 노동능력이 상실하는 50대 이후부터 온갖 잔병들이 찾아온다. 왜 그런 것일까? 이런 이야기는 <자본>에도 나오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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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8 0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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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0 2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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