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보면 괜히 폼을 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나, 개인적으로 영화는 대중영화보단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대중영화의 특성은 기본적으로 흥행만 바라보는 점에서 이야기는 재미만 넣었지만, 막상 보고나면 무슨 내용인지 기억해내기가 귀찮아진다. 잊어버리는 것보단 이미 영화를 보기 전부터 자신의 무의식 공간에서 스토리의 흐름을 계산하고, 거기에 얼마나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생각한다. 영화의 서사에서 등장인물, 스토리, 배경이나 소재만 다르지 그 작품에서 의미하는 주제성은 거의 동일하게 흘러간다. 아슬아슬한 갈등관계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로맨스나 신화적 영웅을 추구하는 게 보편적인 관객의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는 솔직히 말해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영상으로 표출되는 이미지의 세계가 친절하지 못하다. 박찬욱 박찬경 형제가 만든 <파란만장>이란 30분 넘는 영화를 보면 정말 불친절한 영상미를 보여준다. 아이폰4로 촬영해서 만든 영화이니 관객에 대한 친절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작품 그 자체이기에 영화는 진짜 영화로 제작될 수 있었다. 문화예술을 찾아가는 정체성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나는 3‧1절을 맞이하여 새로운 형태의 예술영화를 보았다. 아는 동생 녀석에 추천받은 <사울의 아들>을 말이다. 박감독 형제가 만든 <파란만장>은 <사울의 아들>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사울의 아들>을 보는 순간,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추천할 수 없는 영화다. 내용이 정말 비참하고 끔찍하며, 화면에서 나타내는 카메라연출까지도 상당히 불편하다. 감독은 일부러 그런 요소를 노렸다. 그렇게 불편한 장면과 서사들이 결국 예술이란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인류가 살아오면서 가장 큰 사건이란 바로 전쟁이다. 전쟁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는 지에서 예술로서의 가치가 존재한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는 전쟁영화를 많이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적인 가치는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 영화를 하나의 쇼라는 블록버스터 장르로써 전쟁 그 자체를 하나의 스펙타클로 구축한다.

 

전쟁이란 공간은 영웅의 등장만이 아니라 정의의 구현보단 차라리 지옥이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전쟁은 전혀 친절한 얼굴을 하지 않으며,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나머지 상황들을 버린다. 그러나 전쟁에서 언제나 카메라 중심은 우리 아군이라는 점, 아군의 승리와 패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군이 보여주는 활약이다. 살아남으면 승리의 영웅이고, 죽으면 고귀한 희생으로 추앙된다. 이기나 지나, 살아남으나 죽으나 어차피 영화는 주제성을 명확히 전달할 뿐이다. 그렇다면 주제성이 보여주고자 하는 그 의미를 생각하여 만약 그 대상이 우리가 일반적인 범주에서 다가가기 어려우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울의 아들>은 진짜 그런 영화다. 전쟁은 인류가 만든 가장 멍청한 행위이면서 인류문명을 가속화시킨 원인 중에 하나다. 더 많은 적을 빨리 치명적으로 죽이기 위해 효율적인 방법을 연구하면서 과학과 기술은 발전한다. 인류가 100세를 바라보는 이유도 전쟁에서 사망한 병사의 시체, 그리고 비인도적으로 자행된 생체실험의 결과물이다. 생체실험이 이루어진 국가로 일본 731부대, 그리고 독일의 나치수용소이다. 독일에 의해 점령된 헝가리, 일본에 의해 정렴된 조선이란 국가는 전쟁에 의해 엄청난 수탈과 억압을 받은 나라다.

 

일본은 되도 않은 황국신민화 논리로 조선인을 제2의 일본인으로 만들어서 전쟁에 보내나, 독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의 총알받이보단 신속히 가스실에 보낸다. 대신 그들의 재산을 가로챈다. <사울의 아들>은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시작한다.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 밥과 음식을 제공 전, 먼저 샤워를 하라면서 옷을 모두 벗긴 채 어느 방 안으로 보내고, 잠시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난무한다. 독가스를 마신 사람들은 질식으로 모두 사망하고, 가스실은 피가 바닥에 스며들고, 차갑게 식어버린 시체들이 즐비하다.

 

나치독일의 만행, 가스실의 제노사이드다. 하지만 이 잔혹한 계획은 나치가 수행했으나, 모든 일처리를 “존더커맨더”라고 불리는 포로였다. 이들은 몇 개월 동안 나치 감시 속에 업무를 맡다가 어느 일정기간이 지나면 처형된다. 죽기 전에 실컷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더러운 일에 동원된다. 그들의 얼굴에 그 어떤 희망의 눈빛을 찾아볼 수 없고, 굳어버린 표정과 타성에 젖은 대답만 할 뿐이다. 그런 세계에 더 심각한 절망과 증오가 불타오른다. 영화 <사울의 아들> 주인공 사울 역시 절망의 세계에 살아가는 한 남자다. 그는 평소대로 나치의 업무를 수행 중에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한다.

 

독가스를 마시면 일반적으로 호흡곤란으로 모두 죽는 반면, 어느 포로들은 살아남은 경우가 있다. 어느 한 소년이 가스실에서 생존하여 침대 위에 올려지고, 군의관 1명이 와서 생존여부를 확인 후 소년의 목을 눌러 교살시킨다. 결국 소년은 차가운 주검으로 변하고, 사울의 눈빛은 동요하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행동들을 일으킨다. 그 소년은 영화제목처럼 <사울의 아들>이었고, 사울은 눈앞에서 아들이 죽어가도 아비로서 아무것도 못한 채 가만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아들은 다른 시체처럼 토막으로 취급되어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해야 했다.

 

아들을 구할 수 없는 아버지, 그래도 그는 아들의 마지막을 불이 아니라 땅에 매장해주고 싶었다. 매장을 하려면 물론 땅을 파고 거기에 묻어야 하나, 문제는 랍비 즉 성직자가 필요했다. 종교는 구시대에서 유럽의 정치를 좌우하던 권력이었으나, 20세기 유럽에서는 정치보단 그 종교의 문화권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담당하던 문화적 역할이 컸다. 아이가 죽으니 랍비의 장례절차가 필요했다. 신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죽은 아이에게 신의 은총이 내려지길 원한 것이다. 인간의 생에서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죽어가나, 죽은 이후의 세계에선 영혼의 구원을 바란 것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것이란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랍비를 찾기 위해 사울은 여기저기 수소문을 찾아보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가 되지 않고, 언제나 벽이 막힌 현실은 카메라의 연출에서 잘 볼 수 있다. 영화의 영상미가 참으로 불편한데, 보총 영화는 16:9나, 여기는 4:3이란 점, 더욱 놀라운 점은 보통 영화는 롱샷, 풀샷, 미디엄샷, 클로즈업 등이 골고루 배치하도록 연출하나, <사울의 아들>은 거의 모든 화면이 클로즈업으로 처리하려 한다. 사울의 얼굴을 중심으로 다른 피사체는 아주 흐릿하게 보인다.

 

사울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주변 인물과 대화하고, 상황과 장소 정도만 풀샷 정도로 보여준다. 카메라의 시점은 거의 2인칭으로 사울의 행동에 집중적으로 따라가며, 배경과 상황정도만 3인칭 정도로 보여준다. 사울은 언제나 주변의 눈치를 보고, 늘 위기와 감시 속에서 자신의 목적을 향하여 행동한다. 랍비를 찾기 위해 다른 반장의 작업장에 찾아가고, 나치의 만행을 폭로하려는 사람의 일을 도와준다. 나치수용소 내부를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어느 수용자는 사진기로 촬영할 때 망을 봐주거나, 나치가 “존더커맨더” 작업인부 70명 정도 죽이려고 할 때 봉기를 위한 화약을 구하는 일도 맡는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죽게 되지만, 사울은 묵묵히 그 일을 수행하고, 랍비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하필 그 날이 수용소 감독관이 전쟁포로 처리인원을 갑자기 늘리던 때였다. 도착한 포로들을 15분에 1번씩 가스실에 넣으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며, 가스실의 사체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소각로가 모두 차게 되었다. 그러자 나치는 포로를 야외에 끌고 나와 그 자리에서 바로 옷을 벗기고, 머리에 총을 겨누고 사격한다. 그리고 야외에 만든 임시 소각장에 시체를 불태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잔인하고 충격적인 장면만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래도 사울은 랍비라고 말하는 남자를 찾아내나, 그것도 마지막에 허사로 끝난다. 마지막 장면에 나치는 작업반장을 죽이는 것을 시작하여 “존더커맨더”를 제거하기 시작했으며, 사태의 위험에서 사울은 아들의 시체를 매장하려 하나, 결국 그것도 되지 못한다. 나치에 봉기 도중 도망쳐야 했으며, 마지막에 나치가 보낸 염탐꾼의 첩보로 모두 죽는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영화로 유명한 작품으로 <쉰들러 리스트>가 있다. 이 영화는 암울한 수용소에서 어떻게든 희망을 찾아간 것이라 말한다면, <사울의 아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희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울의 아들>이란 영화는 매우 불편하고, 친절함이 전혀 없는 작품이다. 시체의 알몸, 해부실의 시체, 즉결총살, 불타는 시체 등등 피비린내와 죽음의 공간이 인간의 운명을 옆에서 비웃는 것처럼 보인다. 그로테스크한 세계와 냉소적인 인간, 이런 잔인한 영화가 왜 계속 나와야 하는 것일까? 불편한 시선과 달리 보기에만 좋은 작품들은 현실에서 금방 잊어버리고, 그저 흘러가는 것들로 공중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 같은 작품은 인류가 저지른 악몽과 지옥을 되새기는 것으로 인간의 존재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제시한다.

 

영화에서 본 지옥 같은 수용소, 악몽이 현실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을 보면서 우리는 저런 삶과 세상을 오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길 것이다. 만일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을 경우 비극은 또 다시 반복된다. 역사의 교훈은 바로 지나간 일들이 다시 미래에 똑같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왜냐하면 그 당시 인간들은 모두 죽었으니) 똑같은 방식과 형식으로 되풀이 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미래조차 열어갈 수 없으며, 자신의 눈앞에서 미래가 파괴되는 절망을 사울처럼 겪을 것이다. 영화 <사울의 아들>에서 아들은 바로 미래와 희망이다.

 

사울은 바로 그 미래와 희망을 잃을 자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본처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얻었으나) 다른 수용소에 있는 것으로 알았지만, 아우슈비츠에 끌려왔고, 거기서 비참하게 죽어갔다. 미래와 희망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과거의 오류를 반성하고 되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나간 것에 얽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겠지만, 지나간 것을 무시하면 앞이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간다. 그리고 그 앞은 절벽이란 사실은 마치 무언의 약속처럼 등장하여 우리를 절망으로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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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3-01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사울과 스포트라이트 둘 중 하나 고민하다 결국 후자 보았는데, 주말에는 사울도 봐야겠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3-01 21:45   좋아요 2 | URL
오오~!
역시 주말은 이런 영화를 혼자 보는 재미가 있지요...

yureka01 2016-03-01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무젤만 ㄷㄷㄷㄷㄷㄷ그러게요 ....ㅠㅠ

만화애니비평 2016-03-02 08:56   좋아요 1 | URL
주말과 휴일은 잘 보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