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라는 공간은 인간의 자연에서 빼앗아 온 곳을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 인간의 공간인 문화라는 세계는 우리 인간 스스로에 대한 우월감과 더불어 경쟁심을 만들었고, 문화 그 자체는 거대한 서사가 되어 주변의 작은 이야기까지 억압하고 무시하는 현 상태에 이르렀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그 개인으로서 자신의 세상이 존재하고, 그들만이 공간과 삶이 존재한다. 우리 삶에서 예술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하면 참으로 결정내리기 어려운 것이다. 나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이상하고 어려운 말이다. 사람들은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면 모두 낯설어 보이는 대상으로 여기거나 때로는 뭔가 있어 보이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모두 정답인 셈이다. 이중텐의 <미학강의>에서 예술이란 인간의 삶을 광학적으로 본다고 이야기한다. 예술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을 보여주는 것이고, 미학이란 예술을 철학의 칼로 바라보는 것이다. 예술이 쉬우면서도 왜 어려운가? 아마도 이중텐의 책처럼 예술은 우리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에서 우리 일상이 있기에 충분히 옆에 있는 것이고, 철학적 사유라는 점에서 형이상학적인 관념에 의존성으로 머나먼 세계로도 보일 수 있다.

 

예술에서 대부분 미술을 보면 예술가들의 관념적 세계를 표현한다. 그들의 사고방식에 있는 공간도 시간도 존재도 없는 대상을 우리 눈앞에서 물질적 존재로 표현하여 전시한다. 그러면 전시라는 그 공간적 개념이 배경이 되어, 시간적으로 전시기간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자본주의 경제시대에 도래하면서 인간의 시간과 공간은 분리된다. 우리에게 예술이란 개념이 생긴 시기가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와 밀접하다. 신이란 존재는 시간과 공간 그 밖의 모든 존재에게 영향을 주는 절대적인 영역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을 측정하는 수단이 되고, 신의 영역인 모든 세계에서 시간은 인간의 세계로 분리되었다.

 

시간의 척도는 결국 인간에게 하나의 가치를 부여한다. 그것은 얼마나 많은 이익을 창출하는지 그렇지 못하는지 말이다. 이런 세계에서 시대적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술을 이해하고 혹은 예술가들의 삶을 이해하기란 어려울지도 모른다. 예술인은 낯선 존재이면서도 낯설지 말아야 할 존재다. 관찰하는 존재는 그 관찰되어야 할 세상에 반 정도 다리를 걸쳐야 한다. 너무 안에 들어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사회가 움직이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시대적 급류에 휘말려 자신의 나침판을 잃어버린다.

 

이와 다르게 밖에만 머물게 된다면 민중의 삶을 바라볼 수 없다. 예술인들이 과거 왕정사회에서는 직업적으로 예술인이 아니다. 그들은 절대적인 신과 왕을 위해 고용된 기술자에 불과하다. 위대한 신, 그리고 그 신에게 절대적 지위를 보장받은 왕, 왕권신수설과 절대주의시대에 만들어진 예술이란 바로 숭고와 경배로서 등장한다. 그것을 만든 자들은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을 하거나 신성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역사가로서 혹은 주술사로서 활동했다고 말하는 게 타당할지 모른다.

 

거대서사라는 계급적 이데올로기에 반영된 역사는 결국 그 주변에 있던 많은 농민, 상인, 노예 등과 같은 하부계층을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말한다. 인간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는 존재다. 내가 이름을 남겨보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비록 이 세상에 없더라도 나라는 존재가 분명 살아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인간이 태어나 살아가는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죽어갈 것이다. 물론 장 자크 루소의 <에밀>처럼 농촌에 살아가는 순박한 농민들은 자연인으로 분류된다. 그들은 문명의 도시와 다르게 자신의 삶을 직접 선택하고 삶도 죽음도 지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들에게 죽음은 과연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것일까? 문명의 인간은 다를 것이다. 그들은 자연인처럼 살아갈 수 없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처럼 자신의 사회적 인정으로 통해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 행복의 추구에서 식욕, 수면욕, 성욕을 지나치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결국 누구에게 인정받는 삶,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삶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아니라면 플라톤의 <향연>처럼 철학을 하여 지혜를 사랑하는 삶이라면 어떤 것인가? 이렇듯 우리는 우리의 삶에 결정할 수 있는 것조차 난해한 순간이 온다.

 

그렇다면 그 순간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 삶을 바라보는 것이 옳은 것인가? 비아트 5번째 강연에서 원도심 창작공간 또따또가의 김경화 작가로 통해 한 번 생각해보았다. 이미 시대는 거대서사에서 탈피하여 탈근대적인 사회로 진입했다.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는 탈근대적 시대에 우리는 거대서사적인 요소 전부를 버릴 수는 없다. 그런다고 거대서사에 가려진 작은 이야기, 그리고 희생된 우리의 과거를 모두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은 정체성이 가장 중요하다. 늘 내가 생각하지만, 인간의 삶은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하나 이성보단 순간 자신의 마음에서 움트는 선택이 자신을 움직인다.

 

분명 논리적으로 바르지도 않고 연결되지 않아도 비이성적인 행위나 상황에 몰리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논리란 단지 자신의 무의식적 혹은 감정적 에너지를 합리화하게 해주는 도구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인간의 정신세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으로 현실에 드러난다. 인간의 공간적 세계에서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계획하여 만든 것도 많으나 그렇지 못한 게 많다. 특히 부산이란 도시가 그렇다. 부산은 한국전쟁이란 동족상잔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다. 덕분에 부산의 군사기지는 항만, 철도, 공항 등 다양한 시설이 배치되어 있으며, 한국군만 아니라 미군기지가 계속 배치되어 있다.

 

이런 도시적 기능에서 부산 서면에 위치한 하야리야부대 이전은 아주 역사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강연자가 주장하듯이 100년 가까이 그곳은 한국의 땅이 아니라 일본과 미국의 땅이 되어야 했다. 침략자에 의해 나라를 잃고, 침략자가 머물던 자리는 다른 강자가 왔다. 환경단체와 각종 시민단체의 이야기도 많고 탈도 많은 그 부대, 우리의 의지가 아닌 우연에 의한 상황이 이 도시를 만들었다. 문제는 그 도시가 변해가면 과거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우리의 기억 속에서 다시 꺼내어 그 의미를 찾아가야 하나, 자본주의 시대는 모든 역사와 아픔을 돈으로서 은폐시키려했다.

 

하야리야부대는 부산시민공원으로 하여 꽃과 나무가 가득하다. 넓은 부지는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휴식공간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 공간적 의의는 제대로 넘어가지 못했다. 퍼포먼스로서 그 부대에 100여개의 위패를 모신 후 과거시대의 아픔을 되새기는 것은 중요하다. 부산의 도시적 정체성을 묻기 위해서는 그 역사적 발자국을 찾아 가는 게 옳다. 부산의 도시적 기능은 세종시나 혹은 다른 신도시처럼 계획성이 아닌 무계획성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피난민들이 내려오면서 낡은 판자촌부터 시작하여 콘크리트 도시로 변하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눈물과 아픔이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중의 이야기란 거대서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벗어난 이야기다.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 삶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다.

 

부산 초량 근대식 최초병원인 벽제병원이 있다. 그 옆에 있던 창고가 시에서 구매하려 했으나, 땅주인은 상품적 가치를 위해 그 건물을 철거하고 대신 대형마트가 들어왔다. 도시의 기능에서 가장 많이 변화하게 만드는 것은 부동산시장이다. 부동산투기는 그야말로 최악의 도시파괴자이다. 어지러운 미로처럼 골목길이 있는 마을은 도시개발사업과 산업단지개발로 형체조차 남길 수 없다. 공간의 상실이란 그 공간을 향유하던 사람들에게 기억과 추억을 부수는 것과 같다. 공간이 없어지는 것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있는 시간적 개념조차 사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곳을 살아가는 주민은 자신의 터전과 삶을 잃게 만드는 슬픔으로 이어진다. 부산 동광동, 거긴 원래 피난 이후 근대화시절 인쇄소로 활발히 활동되는 곳이다. 최근 대형 백화점의 입주와 주변지역의 급격한 변화, 대규모자본이 주변 상권을 장악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 곳이다. 우리의 이야기란 바로 도시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점점 자본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광고와 드라마로 이끌려간다. 우리가 자본주의시대로 오면서 가장 변한 것은 이웃과의 소통이다.

 

이웃과 소통을 하는 것은 우리는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라 서로와 같이 즐기면서 살아가는 원하기 때문이다. 커뮤니티의 단절, 분리된 자아, 그리고 거대한 시장화, 이 모든 게 우리 삶에서 많은 것을 주기보단 그 이상을 가져간다. 레드오션으로 강력한 제로섬인 한국 사회는 포화되어 그 방향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또따또가에서 내가 마음에 든 기획은 못 쓰는 물건을 재이용하는 방안이다. 환경오염은 자본주의 경제체계와 더불어 가속화되었다. 상품의 소비는 필요한 것은 맞으나 필요이상으로 소비하면 폐기물이 발생된다. 폐기물처리에 많은 인력과 부가적인 에너지와 자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용하지 못하는 물건을 최종 처리하는 과정에서 2차적인 오염물질이 발생된다.

 

필요 없는 것들이 늘어나면 날수록 우리 주변 환경은 더욱 피폐해진다.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을 재활용하는 것은 환경적으로 가치가 있으며, 우리가 상품시장에 길들여진 정신을 새롭게 보여준다. 단지 우리의 필요수단으로 물건이 소비되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그 사회성을 경제적 교환이나 노동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인간이 모든 것을 도구적 가치로 접하면 인간 역시 도구로 여긴다. 도구와 인간은 다를지 모르나, 도구에는 인간의 노동이 반영되어 있다. 노동에 의해 태어난 도구들이 그 노동한 사람들과 별개의 존재로서 소비자에게 간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우리 삶에서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이웃이다.

 

물론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장이 활성화가 되지 않아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블루오션으로 문화적 사업이 이렇게 필요한 것이다. 폐기물재활용 가치는 환경적으로 중요하나 사회적으로 중요하다. 이차적으로 다시 상품으로 활용하거나 교육, 사회, 경제적 가치를 보여줄 수 있다. 쓰레기를 모아 만든 예술작품도 제법 많은 것을 생각하면, 우리 일상에 있는 많은 것들이 예술로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예술이란 바로 삶에 대한 탐구와 관찰 그리고 새로운 시도이다. 사용하지 않은 집에 콘크리트로 만든 비둘기와 토끼를 1년 동안 방치한 장면에서 그 동물은 동물로서 보여주기보단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자신의 장소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나 여전히 힘든 삶을 보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장면은 장수하는 동물을 그린 12장생도와 책 걸이로 삼은 문방도구이다. 우리 사회는 급격한 서구화로 인해 우리 전통문화를 등한시했다. 우리 전통문화를 마치 미개하고 미신의 세계로 매도했다. 서구의 문화도 이제 동양과 제3세계를 다르게 보고 있다. 여수에서 열린 엑스포대회에서 각국의 민족이 와서 다양한 전시를 했다고 한다. 게다가 다른 나라에서 개최되는 축제나 행사에서 각 나라의 고유한 문화를 선보이는 것을 추천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그 흐름에 새롭게 우리 문화를 도출하기보단 여전히 홀대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삶을 찾아가 그것을 인정하기보단 부정하고 은폐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와 더불어 성장했지만, 자본주의로 인해 우리의 모습은 없어졌다. 작가님이 말하는 문화적 행위는 우리사회에 원류에 있던 공동체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공동체로 만든 여러 가지 작품이 예술이 되고, 우리 삶의 기억이 되는 것이다. 부산의 정체성을 찾자는 슬로건이 부산시청과 문화재단에서 내걸고 있으나, 그것은 관공서의 행정정책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우리 인식을 계속 바꾸어야 그 가치가 실현된다. 작은 시작이 큰 변화를 줄 수 있다고 하는 말에는 크게 동의는 못하겠다. 그런 작은 시작 그 자체도 어려운 것도 있고, 시작되는 과정에서 소멸하는 경우도 많다.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작은 시작이 큰 변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시작들이 모여 큰 변화로 뭉치는 것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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