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국수주의자가 법원 판결을 받았는데, 유죄를 선고 받았다. 문제는 그의 언질이었다. 헌법이나 형법을 찾아보면 공인에 대한 비판을 넘어 명예훼손에서 공공의 이익이 해당될 경우 충분히 면죄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결국 공인에 대한 명예훼손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그 사회의 공공성에 문제가 발생될 경우 거론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공공성을 무너뜨리는 인간에 대한 비판이 오히려 공공의 이익인데도 공공의 이익이 아닌 것처럼 떨어지고 있다. 

 

그래 되어버리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제일 중요한 사실은 먼저 개인적으로 자신이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당하는 사람이 본인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족과 친구, 그리고 가까운 몇몇 사람라고 볼 수 있을까? 인간의 가장 어리석은 행태는 자신에게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의 비인식성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타인에게 가겠지만, 나에게는 오지 않을 것이란 안일한 사고가 문제다.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다"라고 큰 명제를 남겼는가?

 

역사적인 사건은 개인의 서술이라고 해도, 그 개인은 역사적으로 보면 큰 정치적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정치적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정치적 인물 뒤에 숨은 이름 없는 희생자들은 시로서 나타낼 수 있다. 영화 (허무)<명량>에서 성웅 이순신은 역사적 존재고, 정치적인 행위자이기도 하다. 전쟁은 정치적인 입장을 국가가 무력을 동원한 자국내에서 합법적인 폭력이다. 그 폭력이 수반되는 무서운 전투에서 장군의 죽음이 전쟁의 당락을 좌우하는 것은 사실이다.

 

전쟁의 지휘관은 작전의 수립과 진행 그리고 종결로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장수가 아무리 제갈공명이라고 해도 수중의 병사가 100명만 있다면 적의 만명의 어떻게 이길 것인가? 전장은 숲이나 성과 같은 매복이나 장기전이 불가능한 평평한 곳이라면? 그 순간만큼은 제갈공명은 아무 필요가 없다. 그 병사 100명의 무술능력과 판단력에 의해 좌우된다. 그 이름 없는 병사 100명 하나하나가 무장의 빛을 발휘하면 이기지 못하더라도 패배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름 없이 사라져간 병사 갑을병정을 두고 우리는 충분히 이야기를 지어내고 만들 수가 있고, 그 것이  전쟁의 당락과 국가의 운명조차 넘어갈 수 있는 플롯이 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거대한 서사 앞에 놓인 작은 존재이나, 그 서사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개인적으로 힘들지만, 가치관의 부합으로 통해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이름 없는 병졸이나 현재 이름 없이 살아가는 국민이라도 살아있는 존재다.

 

이들의 죽음 내지 혹은 몰락 또는 억압은 지금은 어둠에 가려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것이 밝혀지고 세상에 드러날 때 그들의 가려진 이름은 알려지게 된다. 이미 죽은 자에게 아무 의미가 없을지라도 그렇게 고생하며 살아온 자나 그 살아온 자에 의해 남겨진 자에 대해서는 정신적 보상이 따른다. 그 공공적인 가치를 위해서 말이다. 문제는 그 공공적인 가치가 아니라 공공의 이름으로 공공성을 망치는 존재들은 어떻게 하는 가이다.

 

첫 번째로 개인에게 닥칠 수 있다는 개연성 내지 필연성은 항상 우린 망각한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며, 인간은 항상 이성적일 수 없고, 무의식에 의해 지배될 가능성도 높고, 감정의 기복에 휩말려 자신의 현재를 망각하기도 한다. 그것이 당연히 인간이란 점을 인정하고, 그 문제점을 인식해야 그 문제가 발생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문제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순간 인간은 고쳐진다. 문제는 그것이 개인에게 한정된다면 모르지만 타인의 영역에서 곤란한다.

 

가령 내가 운전하고 가는데, 좌회전을 해야 하는 순간, 나는 1차선, 옆 차는 2차선에서 대기하고 있다. 그리고 좌회전 하는 도중, 2차선에 있던 차량이 내가 가는 1차선의 넘어 좌회전을 한다면 누가 문제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의 의지와 노력과는 상관없이 사고와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피해자만의 노력과 판단만으로 넘어갈 수 없다. 결국 사회적인 문제는 개인 혼자만으로 모두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길가다가 갑자기 도로가 꺼지거나 건물이 갑자기 무너지거나 지하철에서 불이 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개인의 문제인가? 

 

두 번째 문제는 사회적인 문제, 공공의 영역의 문제다. 그런데 그 공공의 문제를 지적하고, 거기에 대한 원인과 그 원인에 대한 근본을 찾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가령 철학을 왜 배우는가에서 철학은 문제의 답을 주지 않지만, 그 문제가 되는 원인 그 자체의 결과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결국 재발의 방지라는 예방적 차원이다. 인간은 항상 망각하는 존재이므로 그 망각의 샘으로부터 숨겨진 상처와 환부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찢어진 상처나 병으로 물든 환부를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은 불편하다.

 

그 불편함이 나의 고통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이라면 분명 외면할 터이다. 하지만 그 문제가 개인적 영역이 아니라 사회전반으로 일어난다면 결국 자신의 주변에서 충분히 시각적으로 감지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이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명제가 될 수 있고, 그것은 어느 대상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다. 비판이 되는 대상은 인간의 형체가 없는 것으로 되나, 그 인간의 형체가 없는 것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이다.

 

결국 어느 누군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왜 공공의 이익에 대한 부분에서 명예훼손이 가능해도 그것이 아닌 경우 불가능한 것은 공공성이 아니라 개인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판결받은 국수주의자는 자신이 말하는 공공성이란 이름 아래 그것이 정의라는 명제로서 비난했지만, 그 비난은 결국 거짓이었고, 조작된 것이다. 그의 특징은 전체 중에 작은 부품이 있다면 그 부품 하나 자체를 전체로 확대하는 특기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논리나 윤리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분명한 오류라는 것도 있지만, 역으로 그것이 도리어 그 발언을 최초로 실시한 국수주의자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국수주의자의 똑똑하다고 여기고 싶은 어리석음은 자신에게 주어진 혹은 부여된 또는 지지하는 세력을 두고 강하게 밀어붙인다는 점이다. 그 세력은 바로 국민이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이거나 또는 연결된 대상이다. 그래서 그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거나 혹은 옹호 내지 지지 또는 못본 척하며 기만하고 있을 존재다. 그런데 그 국수주의자가 그토록 비방과 비난을 날려 이때까지는 그저 지나가는 해프닝 내지 이슈로 되었다가 이제는 반대가 되었다.

 

법원에서 판사의 결정은 거짓된 정보로 공공과 상관없이 고의로 없는 사실을 만들어 명예훼손한 것은 명백한 죄고, 게다가 반성의 기미나 피해자에 대한 사과 내지 예방적 태도가 없다는 것으로 6개월의 징역을 내린다. 예전에 부당한 국가권력에 징역살이하던 자들은 추후에 그 누명과 부당한 권력에 대한 보상으로 명예로 이어지나, 그런 식으로 남을 비하하거나 모독한 자에게 어떤 대우가 내릴까? 그저 혼자 미쳐 날뛰는 돈키호테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편하다.

 

득이 되는 자들은 교묘히 언론플레이를 할 수 있고, 자신의 입과 손을 더럽히지 않고 알아서 처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더러운 말과 더러운 글을 만드는 입과 손을 가진 자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거나 혹은 자기 나름의 계산을 하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만약 법적인 처벌로 간주되어 그가 궁지에 몰릴 때 예전에 그의 활약으로 득본 자는 그를 제대로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대신할 것들은 얼마든지 있고, 그와 엮인다는 것만으로 분명 마이너스가 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은 계속 나오고, 집단적인 커뮤니티 활동자들은 왕성하게 활동한다. 그 커뮤니티 회원이 구속되거나 잡혀가도 계속 이어지는 이유는 잡혀가는 사람들이 자기와 가까운 자도 아니고, 그가 잡혀간다고 해서 그들은 위기의식보단 겉으로 부당함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조소를 날리기 때문이다. 국수주의자들은 부지런히 활동하여 애국한다고 하나, 그들이 애국한다고 생각하여 그 대상이 되는 국가라는 존재는 실존의 존재가 아니라 가상의 존재다.

 

국가라는 존재에 대해 그 자리에서 운영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그 애국이란 이름 아래 이익을 보는 자다. 그런 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이들에게 결국 법의 집행에 걸릴 경우 어떻게 대응할까? 도와줄 것인가? 아니면 다르게 할 것인가? 도와줄리가 없다. 처음부터 자신의 이익이 걸린 일이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자에 대해 옹호하는 것에서 여론이나 미디어에 의해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고, 실추된 명예는 자신의 이익으로 연결된다.

 

프로테메우스는 인간에 불을 주어 늘 자신의 간을 독수리에게 뜯어 먹히는 신세가 된다. 그래도 인류의 번영을 위해 불을 준 자는 인간에게 문명이란 이름을 가진 양날의 검을 주었다. 그러나 그 검을 받은 인류는 그 문명을 옳게 쓰는 것보다 옳지 않은 일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옳지 않은 일로 이익을 받는 자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처음에 이익(돈, 명예, 허영심만 남는 자존심)을 노리지만, 막상 어느 기회로 위기가 찾아오면 그들은 신속하게 버림을 받는다.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잡이공선>에서 총을 잡고 폭군처럼 군림하던 십장 같은 남자는 결국 선원의 반란에 의해 고용주에게 잔인하게 내쳐진다. 이때까지 받을 돈도 못 받고, 빈털털이가 되어 비참하게 내쫓기게 된다. 결국 이런 일도 저 <게잡이공선>처럼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 국수주의자는 충분히 재기가 가능할 수 있으나, 일을 계속 크게 만드는 그의 모습에서 불리한 자신의 상황을 여론으로서 재반격하려 하지만, 상황은 너무 늦었다. 없는 것은 이미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조작하여 비난한 것은 기록에 남겨진 사실이다. 지금에 와서 반성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은 이유는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살아가는 이유일 터이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일까?

책들은 한 때 그가 가장 존경하던 선배이며, 지금 가장 저주하는 대학교 선배의 책을 넣어두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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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9-0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아리러니입니다. 정말 롤모델로 생각했던 이를 이제는 적이 되어 만날 싸우니...
하여튼 네 무덤에 침을... 이 책 읽었을 때 신선했던 생각이 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4-09-05 11:25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진중권이란 사람이 참 대단하다고 여겼습니다. 어째 이런 날카로운 패러디의 조소가 나올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