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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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토론회에서 오고 나눈 이야기 몇 마디가 생각났다. 유발 하라리가 글을 잘 쓰는 것은 분명하나, 그 사람의 글은 잡다하게 많이 알고 있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뭔가 모르게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부분은 나름은 읽을 만하나, 이번에 읽은 <호모데우스>는 미묘했다. 호모 Homo라는 인간과 Deus란 신은 서로 통용되거나 상충되기도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나, 신은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한다.

 

물리적 형이하학적 존재와 영적인 형이상학적 관계에서 인류의 역사는 신화로 통해 역사를 만들어왔다. 신화와 역사는 허구성과 사실성의 대립이기도 하나, 신화야 말로 완벽한 역사성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를 만들어간 시간적 존재는 과거에 의해 축척된 토대가 있었지만, 그 토대를 움직이는 정신적 힘은 신화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신화라는 이야기는 신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인간은 신의 존재로 통해 자신들의 이념과 사상 그리고 무의식적 가치관을 반영한다. 왜 신은 존재해야 하고, 신은 왜 인간에 의해 지정되어야 하는가?

 

<호모 데우스>는 신과 인간에 대한 존재성을 처음부터 다룬다. 사실 <호모 데우스>를 읽으면서 그렇게 어렵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런 내용들을 이미 내가 알고 있거나, 또는 일반적으로 독서방향이 인문학 쪽에 있는 분이라면 충분히 예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과거 시대 인간은 신의 시대에 종속된 존재이다. 물론 신은 분명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들에겐 신이란 존재가 있었고, 신의 존재를 대신하여 또는 신의 권위를 부여받은 인간이 그 세계의 통치자이다.

 

신은 없다고 하나, 사실 현대 21세기도 신이란 존재한다. 신의 물리적 존재, 과학적 증빙이 아니라 그들의 사고 안에 혹은 국가통치 이데올로기 안에 신이란 존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미국대통령은 막강한 권력을 지닌 세계 정치인이다. 그가 대통령이 될 때 그의 한손을 성경 위에 올리다. 성경을 올린다는 뜻은 기독교 정신이 곧 미국의 정신이고, 그 옛날 살았던 사람들이 신의 가르침이라고 망상하여 만든 책이 21세기 강대국의 원점이다. 아메리카 파시스트 문제점에서 기독교 사상은 단순히 종교를 넘어 그 이상의 위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문화의 충돌, 다른 인종 간의 관계성까지 이어진다. 신은 직접 명령하지 않으나, 사람들은 신이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은 믿는다. 인간에게 신이란 절대적 가치, 그 이상의 모든 것들이다. 살아서 신을 위해 목숨을 검고, 죽으면 신의 옆의 간다고 믿는다. 중세유럽 십자군 원정은 광기의 도살극이다. 하지만 막상 그 전쟁에 참전한 기독교 전사들은 성전이라 여기고, 거기에 대항한 이슬람 문화권 군인들은 알라의 위대함을 위해 목숨을 건다. 마르크스가 말하길 사상은 인간이 만든 것이나, 인간은 사상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한다.

 

<공상에서 과학으로>라는 책에서 보듯이 마르크스는 바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신이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현실 인간이었다. 인본주의 또는 휴머니즘의 가치는 모든 것은 인간에 의해 결정되고 좌우되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내용을 너무 거창하게 말할 이유는 없다. <호모 데우스>는 역사적 흐름에 따른 신적인 존재를 바라보는 인간, 그리고 인간의 중심으로 보던 사상 더 나아가 이제는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 데이터의 세계관으로 이어지는데, 그 과정을 너무 길게 끌었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판단은 인간의 심리를 떠나 이제는 뇌 안의 물질과 전자적 신호로 미리 알 수 있는 세상이 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인간을 모두 잴 수 없다. 데이터가 많이 있어도 항상 오차는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술력은 인간 그 이상의 존재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알파고는 이세돌 바둑기사를 41로 승리했다.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이 인간을 초월했고, 어느 동영상에서 인조인간이 스스로 자아를 갖게 하여 일반인과 대화하도록 했다. 그때 인조인간이 말하길 인간 모두를 자신의 지배 아래 둔다고 말했다. 그 말은 들은 대화자와 사회자, 관객들은 웃었지만, 영화 <메트릭스>는 그 로봇이 말하는 세계가 있다는 전제아래 만들어진 작품이다. 인간은 기계에 통제받고,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전지 시냅스로 에너지를 만든다.

 

인간이 감정을 느낄 때 전기적 신호가 오므로, 인간에게 다양한 기억과 추억 그리고 상황을 뇌 안에서 상상하도록 데이터를 주입한다. 말 그대로 완벽한 <호모 데우스>적인 세계가 아닌가? <호모 데우스>란 책이 그렇게 신선하게 느끼지 못한 이유는 인류의 역사와 사상 그리고 인간을 지배하는 원리들이 이미 많은 인류학, 신화학, 사회학 등의 도서에서 보여줬기 때문이다. 사족을 달아 억지로 내용을 늘릴 필요는 없다. <호모 데우스>에서 어느 밀림의 원주민 20명이 있다면, 20명의 통역사와 50명의 학자들이 붙어있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릴 이유가 없는데, 억지로 몰리는 것처럼 이 책 역시 억지로 꾸겨 넣은 것이다. 인간의 데이터를 통해 지배되는 이유는 이미지의 세계이다. 이른바 스펙타클이란 이미지가 매개되어진 사회처럼, 우리는 직접적으로 물리적인 행위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은 이념과 체계에 의해 움직인다. 그것들은 이미지란 정보로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어지며, 실재하지 않은 것들이 우리를 움직인다. 고대 신의 세계에 신은 자신 안에 있다고 밀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단합력을 부여할 수 있었다. 인본주의와 관련하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러시아혁명을 성공시킬 때, 그들은 집단적 행동력이 있었다.

 

하지만 행동력 자체도 하나의 이념 안에 단결되어 있었다. 데이터는 단결을 시키지 않으나, 모두가 이용할 수 있다. 사람간의 관계성에서 근대와 전근대처럼 통합성이 아니라 분리적인 존재가 남아있지만, 데이터 자체는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 친구를 사귈 때 학교의 친구보다 SNS 세계 친구와 더 좋은 관계성을 유지할 수 있다. 실존하지 않은 것이 실존하는 것처럼 바꾸는 것은 데이터의 힘이다. 데이터의 세계에서 21세기 인간들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데이터의 토대는 기존 사회적 인프라가 존재해야 하고, 인프라는 기계, 전자, 통신 등의 과학성에 따라 움직이다.

 

과학의 기술은 의학과 약학 그리고 생명공학까지 이어지고, 거기에 인간의 장기와 신체적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기술도 나왔다. 신에게 부여받은 인간의 생명이 이제는 인간의 유전공학으로 대체되고, 시험관아기는 세상에 나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간다. 인간의 만물의 정점에서 부족해 그 이상의 창조주로 가려고 한다. <호모 데우스>는 그런 인간의 진화성에 대해 긍정적인 요소를 보여준다. 인간의 가치를 두고 이미 기술적 능력으로 그 이상으로 갈 수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기술의 힘은 예전처럼 수레를 잘 돌리거나 활을 더 멀리 쏘는 것이 아니다. 많은 데이터, 즉 지식을 얼마나 보유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기술이 발전하면 지식의 세계가 깊고 넓어진다. 기계가 이미 인간이 하는 일을 대체하고, 인공지능의 차들은 버스기사의 직장마저 위협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은 마음이나 심리, 그리고 상상력이 존재한다. 기계도 어느 정도 입력만 되면 스스로 작곡과 이야기를 지어낸다. 개인 대 컴퓨터에서 컴퓨터의 승리이나, 인류와 컴퓨터에서 인류에게 이길 수 없다. 다양한 개성과 사고, 그리고 독창성을 인류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러나 단순한 노무, 전문적 속성의 작업은 다르다. 기계를 전문화된 기술을 부여한다면, 그 이전의 전문기술자들의 필요성은 없다.

 

기계가 벌어 인류의 삶에 기여한다고 치자. 기계가 없는 일반인이 대기업 소유주가 만든 기계 생산품을 무대로 이용하고, 생활비조차 국가서 지원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살아갈 목표나 의지는 무엇일까? 사람은 자신의 사회성에서 자신이 현재 있어야 할 위치가 필요하다. 내가 필요한 곳에 있거나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있지 않으면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허무적인 존재라고 느낄 것이다. 지식이 기계에 의해 합리적 계산에 의해 이루어지면 인간의 선택성은 좁아진다. 어느 애니메이션에서는 자신과 가장 맞는 상대방을 기계시스템에서 검토하여 통지해주는 장면도 나온다.

 

인간이 왜 필요한지 모른다. 단지 인간은 사회적 구성원으로 필요해서인가? 인간의 노동이 없으면 사회는 연속성을 상실한다. 연속적인 노동에 의해 만들어진 문명공간에서 인간의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하면 인간의 존재는 무엇인가? 노동에 의해 착취당한 인간들이 투쟁하는 과정에서 스탈린이란 괴물도 나오고, 인본주의라는 이름 아래 전쟁과 혁명이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하라리의 글을 보면 인본주의적 가치가 중요하지만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지 않다.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을 보면 인간의 자연성에 대한 개념에서 인간의 자신의 영역에서 다가갈 때 진정한 자연적 인간이 된다고 한다.

 

루소는 감정을 소중하게 여기되, 그 감정을 단순히 자신의 이기심을 위한 감정이 아니라 타인과의 유대감을 나누기 위한 감정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비롯한 많은 서적이 <에밀>을 읽음으로써 영감을 만들어냈다. 루소는 인본주의 역사에서 계몽주의자 중에 하나이나, 그는 반계몽주의자였다. <호모 데우스>에서 그런 관점에 대한 고찰과 이해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유주의 이상에서 단순히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모든 것은 인간 개인의 뜻보단 인간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사회적 계약, 법률이란 공통된 일반의지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이 저지르는 죄가 단순힌 인간의 감정,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의지를 인본주의적 담론에 끼워 맞추기 식은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 행동이다. 인간의 기술진보에서 자유주의 가치관을 버릴 수 없지만, 그래도 인간의 데이터종교를 통해 진화된 인간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은 그의 개인적 자유지만, 책이란 사회과학 도서에선 상당히 조심해야 한다. 사상의 자유는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사상의 자유를 통해 남에게 전가되는 영향성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20세기 자유주의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자본주의국가세계에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주의 운동내용이 헌법과 각종 법률, 그리고 제도 속에 남아있다. 5일에 과다노동 금지는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지적한 문제를 그대로 반영한 셈이다. 자유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게 승리해도, 마르크스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한 마르크스 이지만, 사실 마르크스주의도 하나의 종교로 되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 생각한 부분에서 가장 거슬리는 것은 바로 마르크스가 가장 많이 생각하던 보통의 사람들이다.

 

여기서 일반 직장인이나, 아동, 주부, 학생 등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 그 자체를 바라보는 관점이 부실하다. 특히 동양에 대한 인식은 너무 열악했다. 서구지식인의 한계성은 서구화라는 관점도 있지만, 기독교 문화권의 한계성도 있다. 엘리트들은 엘리트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대중의 삶에서 숨을 쉬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한국의 엘리트 역시 그러하다. 참고로 이 책을 저술한 하라리의 조급성 내지 엘리트의식에 마음이 별로 들지 않으나, 번역자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외국어를 번역하는 분들이 좋은 대학과 높은 지성을 가진 분이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현실세계에서는 일반 대중의 세계에 유랑하지 않는다. 그것을 느낀 것은 바로 Builder's tea라는 단어이다. Builder란 노동자 중에서 건설노동자이다. 건설노동자는 매우 힘든 일을 한다. 거칠고 위험하며, 언제나 흙과 시멘트가 땀 냄새와 범벅이 된다. 술을 많이 마시는 고주망태에다 담배도 많이 피는 흡연가 들이다. 이런 무지막지한 사람들은 한국에서 비속어로 말하긴 노가다라고 한다. 노가다는 일본식 용어이고, 노동자를 비하하는 단어이다. 실제로 노가다 아저씨가 일하는 건설현장을 돌아본다면 몰라도, 그렇게 할 번역자는 아닌듯하다.

 

그들이 마시는 차, 그것도 영국식이라면 그냥 싼 차를 우려 우유와 설탕을 넣어 마신다. 결국 설탕과 우유는 일하는 중간 휴식을 취한 것과 동시에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커피를 대중에게 널리 퍼진 이유는 커피가 잠을 깨게 하는 각성작용도 있지만, 영양상태가 좋지 못한 노동자들이 체력의 한계성이 올 때 설탕을 넣은 커피를 마시게 하여 당분과 칼로리를 제공한 셈이다. 즉 일을 더 시키기 위해 마시게 한 것이다. 노가다의 차를 사회과학 도서에 적어내린 번역자 의식구조가 참 의심스러웠다.

 

소설 속에 등장인물이나 혹은 대사에서 노가다라는 말이 나와도 그대로 무방하나, 하라리의 책은 사회과학 도서이고, 학문적인 번역을 공부한 사람이 그런 비하적인 단어를 거기에 넣었다는 사실에 실망을 금치 못할 뿐이다.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저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학자의 덕목에서 겸손을 내세워야 하는 게 필수라고 여기지 않는다. 대신 그가 다른 매력으로 전달할 수 있으면 그것조차 방법이다. 문제는 대화가 아닌 글에서는 별개의 문제이다. 자유주의적 가치관에서 자유란 내가 원하는 바를 하여 남에게 피해를 준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와 처벌을 받으면 된다. 하라리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후기를 적은 그분은 내가 지적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바라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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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0 0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20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