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이라는 거짓말 - 진정한 나를 찾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이유
앤드류 포터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사회에 오면서 우리는 진짜라는 의미에 많은 열정을 부여하게 되었다. 영화, 스타, 스포츠, 정치사회 이데올로기까지 말이다. 그러나 막상 거기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물어보면 뭔가 상세하게 답변하거나, A에게 질문에 답변내용이나, BC, 더 나아가 그밖에 사람에게 물어봐도 딱히 특별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대부분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란 보편성이 작용할 줄 모르나, 보편성이란 하나의 상식에 기인하나, 개성이나 자기 안의 열정은 보편적 상식에 의해 등장하는 게 아니다. 개성에 대한 보편성은 대다수 사람들 모두 자기만의 캐릭터를 소유하고 있는 점이다.

 

문제는 캐릭터라 불리는 개인성이 어느새 보면 개인성이 아니라 집단적인 관점을 띠게 되는 점이 많아졌다. 그래서 자신만의 세계관, 자신만의 가치에서 진정한 자신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의 사유는 자신에게 나올 수 없다.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여건, 그리고 교육적 특성과 사회적 변화 모두 개인의 인식과 행동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이들이 그런 비슷한 여건에 있다고 해서 다 같은 것만은 아니다. 결국 사회적 변화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분명히 존재하나, 개인성은 사회적인 영향만으로 다 성립되지 않은 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그런 요소가 잘 보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현대사회는 20세기와 달리 TV, 라디오, 신문 등을 통한 미디어 환경이 구축된 게 아니라 PC, 인터넷, 더 나아가 스마트 폰의 등장 아래 네트워크 시스템 및 모바일 세계로 확장되었다.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되었지만, 인간의 공간적 활동제약은 매우 축소되었다. 누군가의 소식을 듣기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는다. 침실에 누워 손가락으로 스마트 폰을 누르면 금방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최근 신영복 교수님의 <감옥으로부터 사색>을 읽는데, 한국 전통시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전통시장은 매일이 아니라 5일에 1번 열려 5일장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그 시장에 가는 사람들은 돈이 많고 적은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만 물건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가는 것일까? 늘 같은 생활과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5일장은 늘 새로운 이야기와 소문 그리고 거기서 피어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소통을 원하는 존재다.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하던 인간이 이제 인터넷 창으로 가상의 인물과 대화를 나눈다.

 

보이지 않기에 마음 속 깊은 것을 털어놓을 수 있다고 여기기도 하나, 정작 그것을 털어놓는 내 자신이 진심인지 아니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상대방이 진심으로 내 이야기를 수용하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진심을 알 수 없는 투명한 장벽에 자신이 만들어낸 진심을 만들어내고 있다. 앤드류 조터의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은 현대사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진정성에 대한 기만과 위선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인간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도서이다.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일화가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라 여겼다. 그런데 신전에서 신탁이 내려오길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소크라테스는 다른 이와 다르게 자신의 무지함을 알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현명한 인간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그것을 인식조차 못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기를 사람은 어느 지식을 알기 전에도 이미 자신은 알고 있다는 지성에 대한 오류를 지적했다. 인간은 모르고 알고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자신이 알고 있음을 알리고 싶은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가치 내지 진정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세대는 이런 문제가 심각하다. 어느 누가 일으킨 사회적 물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몰려 각종 덧글을 단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이버세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사이버공간이 아니라 일상세계를 파괴한다. 서울 시내버스 운전기사 하차대기 중, 뒷문에 어느 어린 아이가 뛰어내렸다. 그 아이가 뛰어내리고 엄마는 당황했지만, 버스기사는 다음 정류소에서 아이의 어머니를 내려주었다. 그게 인터넷에 소개되자, 버스기사의 삶은 파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CCTV로 통해 보호자의 문제라고 드러나자 이제 아이엄마를 욕하기 시작했다.

 

비판을 할 수 있어도 각종 욕설과 비난이 오고가는 사이버공간은 현실의 인간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험악한 발언을 날리는 자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정당하다 여긴다. 왜냐면 누군가 잘못했으니 자신()이 보기에 잘못된 사람이니 비난을 날리는 것은 당연한 권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전후맥락이 필요하다. 앞뒤를 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고, 최종적으로 문제를 지적하여 개선하는 게 이성적인 인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런 문제는 뒷전이고, 오로지 공격만 존재하고, 적나라한 욕을 통해 자신이 악인을 응징했다는 착각의 세계에 빠진다.

 

착각은 곧 진정성에서 기인한 기만이다. 왜 이런 식으로 전달되는 것인가? 현대사회는 정보가 망라된 첨단사회다. 소통의 장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열린 게 아니다. 자신만 아니라 자신 이외의 모든 이에게 열려있다. 과거 100년 선거할 경우 시장후보가 곳곳을 돌며 얼굴을 마주해야 하나, 이제 TV토크쇼에서 후보들을 볼 수 있다. 상대방의 정책안에 대해 관심 있게 듣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이 보는 것은 상대방 얼굴과 몸에 드러난 이미지다. 즉 겉모습에 나오는 분위기가 많은 선택을 좌우하는 것이다. 미국 선거에서 어느 후보가 어눌하게 말을 해서 혹은 말실수를 해서 지지율이 폭락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도 토론회에서 말실수를 하거나 지나치게 상대방을 몰아넣으면 역효과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이미지에서 보여준 모습에서 이성보단 순간적 감성이 따르고, 그 감성을 드러나는 이들에게 하나의 진정성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자신이란 이토록 감정적이고 순간적이며,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변화하는 것이란 말인가? 기 드보르가 저술한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매개로 하는 사회이다. 이미지라는 것은 자신이 아닌 미디어로 보여주는 방송매체 혹은 신문 또는 인간생활 그 자체만으로 스펙타클이다. 이미지가 매개되었다고 하니 우리의 주변은 이미지로 가득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이미지의 세계로 인간과 대화하는 것은 본질이 아닌 스펙타클로 구축된 이미지 왕국의 세계이다. 진정성이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어제 나온 최신유행인기가요가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하고, 그것이 길거리에서 들려야 한다. 본질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취향이나 성향보단 지금 억지로 고의적으로 은폐된 사실에 모두가 열광해야 한다. 열광 속의 스펙타클러는 자신이 의지가 아닌 미디어와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세계에 더 자신을 보여주려 한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그 시대에 흘러나온 이미지의 부산물에 같이 떠밀려가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사회도 20세기 중반과 후반은 민주주의와 노동투쟁으로 많은 진보를 일구어내었다. 하지만 21세기의 진보는 그렇지 않다. 이성적 판단력과 구체적 현실성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느낀다는 하나만으로 열광한다.

 

진정성의 의미와 사실적 관계, 사회에 대한 이성적 판단보단 그저 자신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만으로 신봉하는 진정성만 남게 되었다. 거짓만 넘치는 진정성은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가득하다. 어떤 사회적 문제가 일어나면 그 행동의 원인 사회적 연결성이 있지만, 그 자체가 사회를 대표하는 인식은 아니다. 결국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논리성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정당하게 만들 수 있는 상황을 인용하는 셈이다. 자신이란 존재가 사회적 조건에 기인하더라도 결국 거기에 너무 매몰되면 자신의 존재성은 사라지게 된다.

 

시대적 흐름은 읽고 변화를 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이란 홍수에 몸을 내맡기면 안 된다. 홍수에 휘말린 사람의 최후는 상상조차 하기 싫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루소가 소개되는 점에서 루소는 인간은 자연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당시 명사들의 오류처럼 인간이 숲에 들어가 곰처럼 사는 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세계인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루소는 낭만주의와 계몽주의, 그리고 자연주의자이기도 했듯이 실제 자연에 대해 예찬했다. 자연속의 인간은 본연의 모습이 되고, 인간사회의 인간은 본연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의해 살아간다. 그런다고 루소는 숲속의 곰이 되는 게 아니라 자연을 누비며 식물을 연구하여 자신의 세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루소처럼 자신의 본연으로 갈 수 있는 공간도 없다. 농촌은 이미 인구가 말라 황폐화되어가고 있고, 경치 좋은 곳은 펜션과 호텔, 그리고 카페들만 즐비하다. 자연이란 공간에서 인간은 하나의 존재성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감성을 충전하는 관광지로 변모된 것이다. 그나마 자연이 가득한 관광지를 가면 힐링이 되겠지만, 그곳조차 갈 수 없는 이들은 늘 일상의 빡빡함만 기다린다. 과거 인간은 자동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회였다. 민주주의 국가 이전에 왕국과 봉건영주국가였다. 게다가 교회세력이 왕족과 귀족하고 연합하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자신들의 결속력을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왕은 단두대 아래 사라지고, 귀족은 빈털터리가 되어 소부르주아로 되거나 심하면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된다. 이게 인간의 역사이다. 민주주의 가치가 도래하기에 바람직하나, 거기에 반해 문제점도 있다. 인간의 진정성은 각 개인과 국가적 관계로 대비한 근대국가로 이행되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은 붕괴했다. 한국사회도 농촌사회가 붕괴되고 대가족은 이미 사라진 문화제도이다. 일가족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은 거의 드문 케이스가 되었고, 그런 장소조차 관광문화지역으로 설정되어 버렸다.

 

강제소속이 없는 반면 자신의 정체성에서 모호하게 변질되었고, 정체성에 대한 심리적 빈곤은 진정성에 대해 감각적인 충동에 이끌리게 된다. 차라리 스포츠는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 약할 수 있다. 적어도 그라운드 위의 선수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은 사실 그 자체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사실이 아닌 이미지 메이킹으로 만들어진 존재들은 어떨까? 그래도 대중은 거기에 열광한다. 열광은 진정성이 아니라 허구성만 남을 뿐이다. 진보적 사회는 이성에 의해 사회문제를 과학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과학적 비판 없이 무비판적 열광이 남은 사회는 그저 같은 문제만 돌고 돈다. 진정성이란 참된 진실은 결국 이성의 눈이다.

 

근대화에 의해 인간은 사회적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부여받았지만, 인간 스스로는 이성에 대한 자율성을 완전히 부여받지 못했다. 탈근대화 시대는 감성과 소통의 세계는 맞다. 하지만 감성의 소통이 자신만의 세계가 아니라 타인과의 조우라면 문제가 발생된다. 타인의 존재는 자신이 아니기에 전혀 다른 관점이 존재하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무리하게 부여받은 동질성은 자신의 판단력이 아니라 기 드보르가 지적한 스펙타클된 사회이다. 군중 속의 고독은 우리가 피를 흘러 쟁취한 자유의 대가이다. 자유를 원했는데, 고독의 시간이 도래했다. 고독을 탈피하고자 계속 진정성을 내세우나 이 책에서 말하듯 그건 자신을 기만하는 거짓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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