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의 운동화
김숨 지음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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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거의 출간 직전에 구입했다. 1판 1쇄를 샀으니.
그럼에도 이제까지 못 읽고 있었던 건 무거운 마음이 따라붙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동화의 복원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역사의 이야기도, 저항하다 스러져간 사람들의 이야기도, 예술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조금 울컥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아서 자주 쉬어가며 읽은 책이다.
이제서야 책을 다 읽었다고 해서 후련한 마음이 들지도 않는 책이다.

- L의 운동화는 유물도 그렇다고 예술 작품도 아니다. 이것 역시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는 게, L의 운동화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는 물건이었다. L이라는 한 개인의 유품을 넘어서서 시대의 유품이 된. - 25

- 그러고 보면 그 어떤 존재를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때는, 그것이 죽어 갈 때가 아닐까, 희미해져 갈 때, 변질되어 갈 때, 파괴되어 갈 때, 소멸되어 갈 때. - 33

- 발생년월일 : 1987년 6월 9일
사망년월일 : 1987년 7월 5일 오전 02시 05분
6월 9일부터 7월 5일까지 L의 운동화는 어디에 있었을까? 질문과 함께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L의 운동화로 향한다. - 51

- "피해자도, 증인도 없는 법정을 상상해 보았어요. 피해인석과 증인석은 비어 있고, 사건과 사건 번호와 배심원들과 재판장과 피의자만 있는 법정을요. 그럴 때 L의 운동화가 피해자이자 증인이 되어 줄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피해자이자 증인이요?"
"네, L을 대신해서요."
"......"
"피해자가 이미 죽고 없으니, 피해자를 대신할 운동화를 어떻게든 살려야 하지 않을까요? 피해자이자 증인이니, 어떻게든 살아서 증언하도록요." - 55

- "6월 10일 자정부터였어요. 스무 날하고 이레 동안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있는 우리 아들 곁에서 신문지 한 장을 이불 대신 깔고 덮고 자는 학생들을 보면서 신문지 한 장만 있어도 사람이 살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신문지 한 장만 있어도 사람이 죽지 않고 살겠구나...... 신문이 내게는 그런 것이에요."
그녀는 또다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말을 잇는다.
"우리 아들이 어디서 죽었을까...... 왜 죽었을까...... 도망가다 죽었을까...... 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더라도 뒤에서 하라고 했는데..... 뒤에서...... 뒤에서 하라고 했는데..... 위험하니까 하더라도 앞에서 하지 말고..... 사진을 보니까 앞에서 했더라구요...... 앞에서......"- 125

- 이미 '사망 선고'가 내려진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는 내게 반문한다. 심장 박동이 멈춘 환자를 붙들고 애를 쓰는 것이.
"저도 의미를 찾는 중입니다."
내가 L의 운동화를 복원하기로 결심하는 데, L의 어머니의 고백이 결정적이었다는 말을 나는 그에게 하지 않는다. 아들의 운동화라고 하니까, 아들의 운동화인가보다 한다는 고백이, 당신의 아들이 신었던 운동화인지 모르겠다던 그 솔직한 고백이. - 136

- 붓에 다시 파라로이드를 찍어 조각으로 가져가던 나는 움찔한다.
번개가 치듯, 조각에 금이 간다.
하나이던 조각이 두 개가 된다.
잘 굳나 싶던 조각이 바스러진다. 바스러지는 조각을 나는 속수무책의 심정으로 바라볼 뿐이다. - 158

- L의 운동화를 지켜보는 시간이 더 길다. 그것을 만지는 시간보다 조용히 지켜보는 시간이. - 159

- "이제 촛불을 켜야 할 때입니다."
"그것도 L의 일기에 있는 문장인가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진다.
"촛불은 우리를 조용히 의자에 앉게 합니다. 그곳에는 타다가 또 타는 우리의 삶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 187

- 이틀 내내 잠자코 지켜보기만 할 뿐, 나는 L의 운동화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울 때가 있다. 뭔가를 할 때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 197

- "오늘 낮에 L의 운동화를 주웠다는 이를 만났어요. 뜻밖에도 제 지인의 친구분이었어요. 여자분으로, 자신도 그날 L이 피격을 당하던 현장에 있었다고 했어요. 사람들이 부축해 가는 L의 발에서 떨어진 운동화를 자신이 주웠다고요. 운동화를 찾아 주려고 병원까지 따라갔다고 했어요. 나아서 집에 가려면 운동화가 있어야 할 텐데 싶어서요. 운동화가 있어야 그것을 신고 집에 갈 텐데 싶어서...... 그 여자분은 L이 나아서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L과는 개인적으로 모르는 사이라고 했어요. 운동화를 아무에게나 줄 수 없어서 손에 꼭 들고 있었대요. 밤 11시가 넘도록 운동화를 손에 꼭 들고 응급실 한쪽에 가만히 서 있다가 L의 어머니께 전해 드렸대요. 그 후로 까맣게 잊고 살다가, 신문에서 L의 운동화를 를 복원한다는 기사를 읽고 무척 놀랐대요. 그날 병원 응급실까지 따라가 집에도 못 가고 기다리다가 L의 어머니께 전해 드린 운동화가, 신문 한 귀퉁에 실린 L의 운동화가 맞나 싶어 혼란스러웠다고 했어요."
전화 통화를 끝내고 나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 운동화가 있어야 집에 갈 텐데 싶어서 L의 어머니가 올 때까지 운동화를 꼭 들고 응급실 한쪽에 서 있었던 마음, 그 마음이 지난 28년 동안 L의 운동화를 버티게 해 준 게 아닌가 싶어서. - 270

2024. jan.

#L의운동화 #김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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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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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리즈는 최애 시리즈.
늘 군말 없이 출간 즉시 구입한다.

미시마야의 괴담 자리는 마음에 꾹 눌러 담아놓은 이야기를 홀가분하게 풀어내고 가고자 하는 화자들이 찾아온다.
즐거움도, 슬픔도, 무서움도 각자의 묵직한 감정들을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그 자체로 당시의 심리상담같은 자리 같고 흥미롭다.
이번에 등장하는 일본판 좀비들도. 아닌 줄 알았는데 나 좀비물 좋아하네...ㅋ


- 사람은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밝은 내용이든 어두운 내용이든 상관 없이. 그리고 미시마야의 특이한 괴담 자리에, 오늘도 새로운 이야기꾼이 찾아온다. - 10


- 울어도 돼요. 울면서라도 괜찮으니까 용기를 내세요. - 68, 주사위와 등에

- 빗물통에 든 더러운 물은 한 번 비워도 이튿날에는 가장자리까지 가득 차 있다. 기리지로의 말을 흉내내어 말하자면, 사람의 더러움은 마를 날이 없어요. - 88, 주사위와 등에

- 괴물과 나쁜 정치, 사람의 목숨을 뿌리째 베어 내는 것으로는 똑같은 해악이다. - 556,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2023. nov.

#삼가이와같이아뢰옵니다 #미야베미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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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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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작가.
늘 좋은 이야기를 써내는 작가 최은영.
슴슴하게 읽히지만 가슴 속에 은은한 슬픔과 불안과 이미 오래전 열화된 분노같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하고픈 말들을 차마 발화하지 못한 채 마음을 누르고 또 누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마음이 계속해서 울컥하게끔 만든다. 마음 속에 잠겨 있는 그들의 말들을 누군가는 경청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이미 다른 지면을 통해 읽은 단편들도 있었지만, 미묘하고 간과되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환기시켜주는 이야기들은 다시 한번 마주쳐도 좋았다.

-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의 이름으로 나온 글이나 번역서를 찾을 수 없었다. 구 년 전의 내 눈에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강해 보였던 그녀가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글이나 공부와 무관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때로는 나를 얼어붙게 한다. 나는 나아 갈 수 있을까.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머물렀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떠나게 된 숱한 사람들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사라질까. 이 질문에 나는 온전한 긍정도, 온전한 부정도 할 수 없다.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 43,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 52, 몫

- 그 문제를 왜 지금 다뤄야 하는 거죠?
용욱이 물었다.
아직도 그곳에 사람이 사니까요. - 71, 몫

- 일을 마치고 복도로 나와서 서울의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날들이 떠올라. 그럴 때면 내가 아직 스물두 해밖에 살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어. 벌써 백 년은 산 것 같은데, 이미 너무 오래 산 것처럼 지쳐버렸는데 아직도 스물둘이래. 밤하늘 아래의 불빛들이 반짝이면서 너는 앞으로도 살아야 해, 살아가야 해, 하고 낮게 합창하는 것 같았어. 더 알고 싶은 것도, 더 해보고 싶은 것도 없는데, 이젠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데, 그런데도 살아야 한다고 자꾸만 누가 내 등을 떠미는 것 같았지. - 160, 답신

- "...... 나는 언니가 살아 있어서 좋아."
"......"
"언니더러 틀렸다는 사람들은 잊어."
"너도 잊어. 그따위 말들."
"응." - 230, 이모에게

- 원고를 묶으면서 그 동네에서 글을 썼던 삼십대 초중반의 시간을 고마운 마음으로 기억할 수 있었다. 그때의 내가 필사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마음 덕분으로 나는 나의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여러모로 결핍이 큰 사람이었고, 어려서부터 삶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벌처럼 느낀 적이 많았다. 그렇지 않은 척 스스로를 포장할 때조차 그랬다. 그런 내가 나의 결핍에 감사하고 그걸 받아들이는 데까지 쉽게 점프하여 갈 수 없다는 것도 이해는 한다.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고 나는 그 누구도 대신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를 풀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갈 뿐이다.
나의 결핍을 안고서 그것을 너무 미워하지도, 너무 가여워하지도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슬프면 슬프다는 것을 알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면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 나를 계속 지켜보는 일. 나는 지금 그런 일을 하는 중인 것 같다. - 작가의 말 중


2024. jan.

#아주희미한빛으로도 #최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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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믈렛 문학동네 시인선 203
임유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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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안도감이 드는 시.
이해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전해져오는 위로랄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시가 죽음을 이야기 하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인지.

- 나는 붓을 들어 이 이야기를 종이에 옮겨 적었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벽에 붙여두었다. 후에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 있어 적당한 값을 받고 팔았다. - 시인의 말

- 어린이는 새가 없는 다리 한쪽이 그리워 운다고 생각해보았어. 헤어진 어미, 아비, 형제, 자매 새들이 그리워 운다고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새에게는 인간의 생각이 없다. 새는 새의 생각을 할 뿐이다. - 생일기분 중

- 너는 고통 없이 고통 없음의 일부가 되고 싶다. 너는 지구보다 늙어서도 순순히 죽고 싶지 않지. 너는 부패 없이 분해되길 원할 뿐인데. 너는 원하는데. 네가 모르는 바다의 일부가 되기를. 나는 바다 앞에서 너를 향해 외치네. 너를 돌아오게 하려고. 듣게 하려고. 네가 들어오게 하려고. 나는 보는데. 너는 뒤돌아보지 않고. 한때 젊은 당신은 결코 머뭇거리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가네. - 유형성숙 중

- 그러나 그건 중요한 일이 모두 시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탓이다. - 기계장치강아지 중

2023. dec.

#오믈렛 #임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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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류이치 사카모토 (Ryuichi Sakamoto) 지음, 양윤옥 옮김 / 청미래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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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것은 좀더 에세이같은 글이었으나, 연대기같은 책이다.

연말에 류이치 사카모트의 음악들을 자주 듣다보니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진 면이 있어 읽게 되었다.
생각했던것 보다도 훨씬 더 반골기질의 음악가였고, 사상적 격동의 시대를 거쳐온 사람인데,
유명했던 곡 말고 다른 실험적인 곡들도 많이 찾아 들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스스로도 언급했듯, 건방지고 힘이 넘쳤던 청년인 류이치 사카모토를 볼 수 있어서 신선.

- 개인적인 체험과의 박리를 통해서 음악이라는 세계의 실존을 얻는 것으로써, 시간이나 장소의 제약을 뛰어넘어 모두와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음악은 그런 힘을 가졌다. - 21

2023. dec.

#음악으로자유로워지다 #류이치사카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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