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사월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유정희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제물을 위한 제물들.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생각해 보게 되는 이야기다.

존재로서 자리잡지 못하고 도구로서 생을 결정하게 만드는 관습법에 대해서.

누군가가 정해 놓은 것일텐데, 현대의 법률과 도덕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이 말하는 지식을 전하는 작가인 베시안이 애초에 왜 신혼여행으로 북부산악지대를 고르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일종의 과시욕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와 미래를 약속한 아내의 마음을 제물로 산악지대에 바치고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화해의 순간에 방향을 복수로 되돌린 친척 할아버지는 평소 무척 과묵하고 눈에 띄는 법이 없는 노인이었다고 했다. 그 노인의 세계에서는 화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까, 왜 하필 그 결정적인 순간에 수다스러워 지기로 마음을 먹었을까.

피 관리인은 다인의 존재에 왜 그렇게 경악스러운 태도를 보였을까. 아름다움에 미혹되어 장황한 말을 늘어놓은 것은 미숙한 자신 때문일텐데, 그녀가 마녀이기 때문이라고 단정지어 말하는 모습은 무엇을 떠올리게 하는가.

역자의 말에서 관습법 “피에는 피”라는 법칙이 민주적이고 인간적이며, 이러한 서술들이 자아 비판의 전통 때문이라고 작품을 옹호한다. 아마 그보다 더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인 어떠한 것으로부터의 탈출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너는 장례식에 가야 할 뿐만 아니라 장례 식사에도 참석해야 해...... 그렇지만 저는 그자크스란 말이에요. 바로 제가 그를 죽였단 말이에요. 제가 왜 그곳에 가야 해요? 네가 그곳에 반드시 가야 하는 이유는 바로 네가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장례식이나 혹은 장례 직후의 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다름아닌 바로 너다. 왜냐면 무엇볻도 사람들이 너를 기다릴 것이기 때문이다...... 왜 제가 그런 일을 해야 해요? 그조르그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서슬 퍼런 눈길에 부딪히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중략) 전날, 그가 희생자를 기다리며 매복하고 있는 동안 냉정하기는 했으나 미움 같은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듯이, 그들의 눈길 속에도 증오는 들어 있지 않았으며 다만 삼월의 그날처럼 차가웠을 뿐이었다. - 20

그조르그는 좁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의 한 자락을 흘끗 쳐다보았다. 창밖에는 오직 그만이 느낄, 알프스 산맥의 불안한 빛과 절반은 미소를 띠고 절반은 여전히 얼어붙은 삼월이 펼쳐져 있었다. 곧 사월이 오리라. 아니, 오직 사월의 첫 보름만이 찾아 오리라. 그조르그는 가슴의 왼쪽 한편이 뻥 뚫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월은 이미 그에게 시퍼런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랬다. 그에게 사월은 늘 그런 느낌을 안겨우었다. 사월은 뭔가 마무리되지 않는 달이었다. 노래의 가사처럼, 사월의 사랑은...... 그의 마무리되지 못할 사월은...... 어쨌든 더 잘됐지 뭐. 그는 무엇이 더 낫다는 것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형을 위해 복수를 한 것이 잘됐다는 것인지, 일 년 중 이 시기에 피를 회수한 것이 그렇다는 것인지. - 26

그는 아버지가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가 네 형의 피를 회수하지 않는 한, 너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도 살 수 없다. 그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사람을 죽이기 전에는 살 권리가 없다니! 오직 사람을 죽인 연후에야, 그리하여 이번에는 그 자신이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에라야 그의 삶이 이러질 거라니! - 41

그러나 그는 비틀거리지 않았다. 그는 눈길을 고정시킨 채 무덤을 응시했다. 나...... 남은...... 남은 것이라고는 저것뿐이라니.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 삶에서 남은 것이 저것뿐이라니. 아니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의 삶이 남길 것은 바로 저것뿐이로구나. - 236

2018.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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