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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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뽀에 가까운 이야기들.

주변에 만연한 사건들에 캐릭터를 잘 입힌 모양새다.

당연하게도, 피디수첩 작가였다더니 역시..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여성의 인생 전반에 걸쳐, 여러 세대에 걸쳐 어떤 불합리들이 존재하는지 망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생각이 들게 된다.

여아 낙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땐 자연스럽게 엄마 세대의 고충을 떠올렸고(지금도 다른건 별로 없다고 여기지만)

초등학교 남자짝꿍의 괴롭힘 이야기에는 자연스럽게 내 학창 시절에 아주 사소한 여학생들의 연대에 대해 떠올렸다.

취업을 준비하던 나의 대학시절이 생각나고, 불유쾌한 회식자리의 에피소드도 생각나고,

쎄다 예민하다 까칠하다는 평가를 때론 자랑스럽게 때론 불편하게 생각하던 일도 생각난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를 경험하는 주변 사람들의 고충도 떠오른다.

그런데 이 모든 회상의 주체는 여성이다. 이 이야기가 그렇듯 말이다.

그래서 또 착찹하다.

82년생 김지영이 많이 읽혔으면 하는 이유기도 하다.

정부에서 ‘가족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산아제한 정책을 펼칠 때였다. 의학적 이유의 임신중절수술이 합법화된 게 이미 10년전이었고, ‘딸‘이라는 게 의학적인 이유라도 되는 것처럼 성 감별과 여아 낙태가 공공연했다. 1980년대 내내 이런 분위기가 이어져 성비 불균형의 정점을 찍었던 1990년대 초, 셋째아 이상 출생 성비는 남아가 여아의 두 배를 넘었다. 어머니는 혼자 병원에 가서 김지영 씨의 여동생을 ‘지웠다‘. 아무것도 어머니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모든 것은 어머니의 책임이었고, 온몸과 마음으로 앓고 있는 어머니 곁에는 위로해 줄 가족이 없었다. 맹수에게 새끼를 잃은 동물처럼 울부짖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으며 의사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미치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할머니 의사의 그 한마디 덕분이었다. - 29

국민학교 때는 오 남매 중에서 엄마가 제일 공부 잘했다. 큰외삼촌보다 더 잘했어.
근데 왜 선생님 안 했어?
돈 벌어서 오빠들 학교 보내야 했으니까. 다 그랬어. 그때 여자들은 다 그러고 살았어.
그럼 선생님 지금 하면 되잖아.
지금은, 돈 벌어서 너희들 학교 보내야 하니까. 다 그래. 요즘 애 엄마들은 다 이러고 살아.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김지영 씨의 어머니가 된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치맛자락 끝을 꾹 밟고 선 작지만 묵직하고 굳건한 돌덩이. 김지영 씨는 그런 돌덩이가 된 기분이었고 왠지 슬펐다. 어머니는 김지영 씨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딸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넘겨 주었다. - 36

넌 그냥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
이제껏 더 심한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김지영 씨는 갑자기 견딜 수가 없어졌다.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아 숟가락을 세워 들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딱, 하고 단단한 돌덩이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숟가락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당신은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런 고리타분한 소릴 하고 있어? 지영아, 너 얌전히 있지 마! 나대! 막 나대! 알았지? - 105

예전에는 일일이 환자 서류 찾아서 손으로 기록하고 처방전 쓰고 그랬는데, 요즘 의사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종이 보고서 들고 상사 찾아다니면서 결재 받고 그랬는데, 요즘 회사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손으로 모심고 낫으로 벼 베고 그랬는데, 요즘 농부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라고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도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 149

남자 직원들도 다 가정이 있고 부모가 있는데 사람 인생을 이렇게 까지 망쳐 놓아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여자들 입장에서도 사진 나돌고 그런거 소문나서 좋을 거 없지 않느냐. 또래 한국 남자들에 비해 감각도 생각도 젊던 대표의 입에서 너무 뻔하고 이기적인 자기방어의 망발들이 쏟아져 나왔고, 김은실 팀장이 참다참다 한마디 했다.
가정이 있고 부모가 있다는 건, 그런 짓을 용서해줄 이유가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대표님 생각부터 고치세요. 그런 가치관으로 계속 사회생활하시다가는 이번 일 운 좋게 넘기더라도 비슷한 일 또 터집니다. 그동안 성희롱 예방 교육 제대로 안 한 건, 아시죠? - 156

2016. d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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