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검은 피
허연 지음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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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 산문집에 실린 <칠월>이라는 시가 너무 좋아서, 허연 시인의 시집을 샀다.
과연 좋다. 플래그가 또 덕지덕지 붙은 시집이 되었다.

발췌가 아닌 전문을 기록해 두는 것이 실례일줄 알면서도 적어둔다.

멀리 완행열차가 가슴으로 달려드는 소리가 들렸고 크고 작은 별들이 음표처럼 머리맡으로 쏟아지곤 했다 온갖 빛깔의 꿈들이 야간 비행에 열중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때로는 인간의 사랑이나 신념이 아름답기도 했지만 그건 언제나 검은 여백이었을 뿐 눈이 떠지질 않으면 노래를 부르거나 연어 떼 같은 사랑을 적는게 고작이었다 강물도 기차도 다시 오지 않던 그날 저녁 나는 세상의 옆구리를 뚫고 일어서고 싶었다 - 경원선 중

온통 삐걱이는 세상의 사랑들이 다 내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숨이 막혔다 - 그날 중

너무 쓸쓸해서
오늘 저녁엔 명동엘 가려고 한다
중국 대사관 앞을 지나
적당히 어울리는 골목을 찾아
바람 한가운데
섬처럼 서있다가
지나는 자동차와 눈이 마주치면
그냥 웃어보이려고 한다 - 저녁, 가슴 한쪽 중

<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그대는 오지 않았네. 삐뚫어진 세계관을 나누어 가질 그대는 오지 않았네. 나는 빛을 피해서 한없이 걸어가네.

나는 들끓고 있었다. 모두 다 내주고 어느 것도 새것이 아닌 눈동자만 남은 너를 기다렸다. 밤이 되면서 퍼붓는 어둠 속에 너는 늘 구원처럼 다가왔다. 철시를 서두르는 상점들을 지나 나는 불빛을 피해 걸어간다. 행여 내 불행의 냄새가 붉은 입술의 너를 무너지게 했는지. 무던에도 오지 않을 거라고, 보도블럭 위에 토악질을 해대던 너를 잊을 수는 있는 것인지. 나는 쉬지 않고 빛을 피해 걸어간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당신들이 저놈의 담벼락에 대고 울다 갔는지. 이 도시에서 나와 더불어 일자리와 자취방을 바꾸어가며 이웃해사는 당신들은 왜 그렇게 다들 엉망인지. 가면 마지막인지. 왜 아무도 사는 걸 가르쳐 주지 않는지. 나는 또 빛을 피해 걸어간다. (전문)

<칠월>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는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같았던 내 눈물을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전문)

2018. s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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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9-12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시인의 오십 미터 였나, 그 시 좋아해요. 이 시집도 읽어야겠어요. 마침 오늘 장바구니를 비워볼까 합니다. (땡투합니다~)

hellas 2018-09-12 10:21   좋아요 0 | URL
다른 시집도 읽어보려구요. 요즘같은 날씨의 밤에 너무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