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50주기 기념 신동엽문학상 역대 수상자 신작시집'이다. 2019년에 발간되었다. 그렇다면 신동엽 시인은 1969년에 돌아가셨단 말인데...


  강산이 다섯 번이 바뀌었을 시간인데, 그럼에도 여전히 신동엽은 소중한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의 시도 가끔 인용이 되고, 예전에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시가 실려 있었는데...


  교과서에 실린 시들은 주로 '통일'을 바라는 시였다. '봄은'이라는 시와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가 있었고... 그렇게 그는 남북이 통일되기를, 남북이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를 회복해서 함께 지내기를 시를 통해서 표현했다.


  그런데 다섯 번이나 강산이 변했는데, 이놈의 남북관계는 돌고돌아 제자리로 와버렸으니...


더 갈등이 심화되고, 서로를 적이라고 하는 지경이 되어버렸으니, 시인이 알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그는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이라는 시에서 


'총부리 겨누고 있던 / 탱크들이 일백팔십도 뒤로 돌데. // 하더니, 눈 깜빡할 사이 / 물방게처럼 / 한 떼는 서귀포 밖 / 한 떼는 두만강 밖 / 거기서 제각기 바깥 하늘 향해 / 총칼들 내던져 버리데 // 꽃피는 반도는 / 남에서 북쪽 끝까지 / 완충지대,  / 그 모오든 쇠붙이는 말끔이 씻겨가고 // 사랑 뜨는 반도, / 황금이삭 타작하는 순이네 마을 돌이네 마을마다 / 높이높이 중립의 분수는 /나부끼데.' (신동엽전집. 창작과비평사. 1985년 3판. 76쪽.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부분)라고 했는데...


그것이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에 꾼 꿈이었다고 했는데... 그 꿈이 개꿈이 아니라 실현가능한 꿈일 거라고 시인은 믿었을텐데.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신동엽 50주기 기념시집을 읽으면서 신동엽 시인이 꿈꾸던 세상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만 들었으니.


그럼에도 이 기념시집의 제목처럼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희망찰 것이라 믿고 싶다. 시인은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라고 했다. (앞의 책 106쪽-107쪽)


이런 의미에서 이 시집은 의미가 깊다. 시인의 꿈이, 바람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신동엽 시인의 시처럼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송경동 시인의 '잊지 못할 여섯 번의 헹가래'라는 시를 읽으며 웃음 속에 슬픔을 느끼게 된다.


남과 북만이 아니라 아직도 제 삶을 제대로 누릴 수 없는 사람이 있음을, 그들이 있음을 잊지 않으려는 시인이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고 있는 시이기 때문이다.


총 21명의 시인들 시가 수록되어 있다. 한편 한편이 모두 귀한 시라 특별히 어느 한 시를 선택해서 인용하기도 힘들다. 그냥 지금 다시 '밤'처럼 어두운 시절, 어둠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다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아니 나아가야 함을 시인들이 보여주고 있음을 이 시집을 통해서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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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다독 2024-02-02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통일이 되면 좋겠지만, 갈수록 어려워보이네요. 통일이 된다해도 대부분 공산국가들과 맞닿고 있어서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질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북한이 없었으면 남한이 이 정도로 안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글을 읽다보니 드네요. ㅎ

kinye91 2024-02-02 17:09   좋아요 1 | URL
통일이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겠지요. 통일이 되지 않더라도 남과 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사용 설명서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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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삶이다. 자신의 삶을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경제학자에게만 맡겨서야 되겠는가? 그래서는 자신의 삶에서 주체가 될 수 없다. 남이 하라는 대로 하는 객체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주체적인 삶을 살라고 배워오지 않았던가. 그 배움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경제학자에게 경제를 맡겨만 놓아서는 안 된다.


언론에서 경제 관련 소식을 전할 때 무슨 무슨 교수(소위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사람)를 초빙해 그 사람의 말로 현 경제의 상황을 정리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언론사에서 선호하는 교수를 초빙해서 그 사람의 의견만 듣는다. 다른 의견은 잘 전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언론을 접하느냐에 따라 경제에 관해서도 다른 관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


각자 다른 관점을 지니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관점만이 옳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의 관점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매도하는 태도가 옳지 않다는 말이다. 다른 의견도 있음을 생각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의견들을 듣고 스스로 판단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이 책의 끝부분에서 저자는 바로 다른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변화는 힘들기 때문에 이론은 지적으로는 비관주의, 의지로는 낙관주의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세상이 변할 수 있다고)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것이다. 경제를 경제학자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 왜냐하면 경제는 바로 우리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내 생활을 남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서 시키는 대로 하면 그것이 제대로 된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전문 지식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전문가는 말 그대로 아주 좁은 영역을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삶에서 하나 이상의 넓은 영역이 결부된 문제(즉 대부분의 문제)에서 다양한 인간적 필요와 물질적 제한, 도덕적 가치를 모두 고려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려 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전문 지식을 가지게 되면 시각이 더 편협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전문 지식에 약간 회의론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경제학뿐 아니라 삶의 모든 분야에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포장을 씌운 정치적 주장인 경제학에서는 이 태도가 특히 중요하다.'(441쪽)


이 책을 읽으면 이와 비슷한 말이 계속 나온다. 장하준이 경계하는 것은 바로 남에게 자신의 판단을 의존하는 태도이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점점 어려운 용어로 포장이 되고, 이해하기 힘든 숫자들로 채워진 통계를 앞세우면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하고 만다.


이런 포기의 순간, 내 삶은 경제학자들의 손에 넘어간다. 아니 경제학자들의 손이라고 하기보다는 경제학자들을 이용하는 정치권력의 손에 넘어간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정치가들이 경제학자들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인다. 무슨무슨 경제학 박사들이 늘 정치권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들은 현란한 용어와 통계를 가지고 사람들을 현혹한다. 


나는 모르니, 전문가가 어련히 알아서 했겠어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내 삶에 대한 주도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게 된다.


장하준은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한다. 경제학이 어렵다고 하지만, 전문가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경제학 지식은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검색을 하면 다 찾을 수 있는 시대라고 해도, 검색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 경제학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습득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썼다고 한다.


경제학이 무엇인지, 경제는 어떤 역사를 거쳐왔는지, 경제학에는 어떤 학파들이 있는지를 이야기한 다음에 경제학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설명해준다.


경제학 사용하기라는 2부에서 생산의 세계, 금융, 불평등과 빈곤, 일과 실업, 정부의 역할, 국제적 차원(무역과 이민) 등등에 대해서 설명한다. 명쾌하다. 그리고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고 여러 경제학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알려주고 있으니, 전문가가 아닌 나같은 일반인들이 읽으면 꽤 도움이 된다. 경제학에 대한 거리를 조금은 좁힐 수 있다. 경제학이 무엇보다도 정치와 관련이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게 된다.


그냥 경제학이라고 하기보다는 '정치'경제학이라고 해야 한다는 말을 왜 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경제가 경제로만 떨어져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는 정치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고, 경제 정책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정치를 포함하고 있으니, '정치경제'학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여 저자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고 나서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경제학 전문가들에게 경제를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는'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는 더 이상 경제를 전문 경제학자와 '기술 관료'에게 맡겨 둘 수 없다는 사실을 처참하게 깨닫게 해 주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능동적인 경제 시민이 되어 경제의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 (444쪽) 고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경제학이 그냥 경제학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정치경제학'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앞부분에 계속 전문가에게만 맡겨두었을 때 정치와 관련이 없다고 여기고 실천을 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것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 씁쓸한 뿐인데... 그의 말을 명심하자. 아래 인용한 것이 재반복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일단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난은 자신의 잘못이고, 돈을 많이 번 사람은 그럴 만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며, 열심히 노력하면 자신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 부자들이 살기가 훨씬 쉬워진다. 그렇게 설득당한 가난한 사람들은 많은 경우 자기의 이익과 상반되는데도 부의 재분배를 촉진하는 세금과 복지 지출을 낮추고 기업 규제와 노동자 권리를 줄일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단지 소비자로서의 선호뿐 아니라 납세자, 노동자, 투표자로서 개인의 선호도 고의로 조작될 수 있고 자주 그렇게 된다. 개인은 개인주의 경제이론에서 묘사하듯 '독립의지를 가진 ' 존재가 아닌 것이다.' (197쪽)



덧글


아주 소소한 오타... 97쪽에 '러스크 벨트(rust belt)'라고 나오는데 이건 누가 봐도 러스트 벨트니 다음 판본에서는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참고로 내가 읽은 책은 2023년 3월 개정판 1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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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월 시문학상 작품집을 읽는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시인. 적어도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다면 김소월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데...


  그의 시를 많이는 몰라도 또 '진달래꽃'을 몰라도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이라는 시구를 들으면, 아, 그 시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그만큼 김소월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시인을 기리는 문학상도 의미가 있다.


  아마도 시인들에게 김소월 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큰 즐거움이리라.


이 작품집의 수상 소감에서 수상자인 정일근 시인도 그런 식으로 말을 했으니... 서정성. 이것이 우리 마음을 울리기도 하리라. 김소월의 서정성이 지금까지도 우리 마음을 울리듯이, 김소월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도 계속해서 우리들 마음을 울리리라는 생각을 한다.


이번 수상작은 정일근 시인의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이다. 둥글다는 표현과 두레라는 말, 그리고 밥상이라는 말이 모두 모여 따스함을 전해주고 있다.


모나지 않았음은, 다른 존재를 밀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래서 둥근이라는 말에서는 보름달을 연상하기도 하고, 또 보름달 중에서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한가위(추석)의 달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한가위의 보름달... 풍요롭고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만족을 전해주는 달 아닌가. 여기에 두레라고 하면 홀로가 아닌 함께라는 의미가 있으니, '혼밥'이 대세인 요즘과 달리 '함께하는 밥'이라는 의미로 '두레밥상'이 등장한다고 할 수 있다.


식구(食口)라는 말 자체가 밥을 함께 먹는 존재들이라는 의미니, 두레밥상에는 이미 식구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좁은 의미의 가족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확장된 가족이 바로 식구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식구들이 모여 함께 먹는 밥상은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 너 잘났니, 나 잘났니 싸울 필요가 없다. 


그냥 따스한 밥 한 끼 함께 먹으면 된다. 그렇게 모여 함께 먹는 밥, 함께 모이는 밥상은 둥글 수밖에 없다. 두레밥상이 둥근 까닭이 여기에 있겠다.


서로의 모난 점들을 서로 보듬어주어서 둥글게 둥글게 만드는 두레밥상. 시인이 꿈꾸던 두레밥상이 벌써 20년이 지났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두레밥상'은 의미가 있다. 우리 마음을, 몸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시를 읽으며 마음을 밥상머리에 앉아 있는 듯이 그냥 내어주면 된다. 그러면 된다. 더 말이 필요없다.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2004년도 제18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사. 2003년 초판. 

정일근,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1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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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
다시 로크먼 지음, 정지호 옮김 / 푸른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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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서의 성차별을 다루지 않는다. 가장 친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는 부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성차별을 이야기한다. 


사회에서의 성차별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표시도 잘 난다. 따라서 대응하기가 쉽다. 하지만 가정에서 부부간에 일어나는 성차별은 쉽게 구분하기도 힘들고, 표시도 잘 안 난다.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부부 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사회가 개입하기도 그렇다.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기 쉽지만, 그렇지가 않다. 가정에서의 성차별이 결국은 사회의 성차별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정에서의 성차별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에는 다양한 가정에서의 성차별, 특히 가정에서 얼마나 일을 많이 하게 되는지, 또 양육에 관해서 누가 더 책임을 지는지를 보여주면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성차별을 이야기한다.


부부가 둘만 살 때와 아이가 태어났을 때, 누구의 일이 늘어나는가? 이런 질문을 하면 된다. 당연히(이 당연이라는 말이 당연하지 않아야 하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당연히라는 말을 쓴다) 여자의 일이 늘어난다.


아이에게 쏟는 관심과 아이를 챙기는 일을 여자들이 더 많이 한다. 그렇다면 직장일이 주는가? 아니다. 직장일은 줄지 않는다. 남자들은? 여전하다. 물론 함께 양육에 참여하는 남자들도 많다. 


가정에서의 일을 공평하게 나누려고 노력하는 남자들도 많다. 그럼에도 성차별이 일어난다고 보는 이유는, 사회 전반적으로 육아에 대한 책임을 남자보다는 여자들에게 더 묻는 관행이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도와준다는 말을 쉽게 하는 반면에, 그래서 남편들이 집안일을 하면 아내들은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여자들은 집안일을 하면서 도와준다는 소리를 전혀 하지 않으며, 여자들이 육아에 힘쓴다고 해서 남편들이 고맙다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물론 남편들도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이 고맙다는 말은 '온화한 성차별'이라고 할 수 있단다. 이런 말을 통해서 아내들이 집안일을 더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게 한다는 것이고, 성차별을 내면화한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차별은 대응하기가 쉽다. 저항도 쉽게 일어난다. 그러나 은밀하게 일어나는 차별은 대응하기가 힘들다. 가정에서 남편들이 집안일을 돕는다고 나서면서, 아내들이 더 많은 일을 하는 현실이 고착될 때 성차별은 공고화된다. 


이 책에 많은 사례들이 나와 있는데, 직장에서 성공한 여성이 가정에서도 평등하게 살지는 않는다는, 더욱 충격적인 사례는 사회에서 성공한 여성들의 이혼율이 높다는 사실, 이는 아직도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편견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남성보다 돈을 많이 벌어오는 여성이 집안일을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이러한 편견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데, 이는 직장일로 인해서 가정에 충실하지 않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는 여성들의 노력이 나타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여성들은 직장에서 아무리 일을 잘해도 가정에서 맡은 일을 해내야 한다는 관념을 지니고 있으며, 사회적 통념도 그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집안일이 과연 여성만의 일인가? 산술적으로 똑같이 집안일을 나눌 수는 없지만, 서로 의논해서 적절한 일의 분배는 가능하지 않을까?


아이들을 돌보는 일도 그렇다. 아이 돌보는 일에 본성은 없다고 이 책은 주장하고 있으며, 지금 이 시대에 아이 돌보기는 여성의 일이라고 대놓고 주장하는 사람은 드물 텐데도, 여전히 육아의 부담은 여성이 더 많이 지고 있으니, 그 점을 개선하려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이 책의 끝부분에 나와 있는 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어떤 형태의 가정이든 이처럼 한다면 (성)차별은 사라지지 않을까 한다.


'양육이 의식적인 협동 작업일 때 남자는 여자와 똑같이 자기의 책임을 점검하고 아이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미리 챙긴다. 아내가 명령이나 지시를 내려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견실한 성 평등주의란 아빠나 엄마에게 더 적합한 활동이 무엇인지, 누가 그 활동을 해야 하는지 미리 정해주지 않는 가정생활을 의미한다.' (368-3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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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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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많은 사람들이 시청했던 드라마에서 남자 인물이 여자 인물에게 한 말이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라는 대사.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소설[위대한 개츠비]에서도 돈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나. 떠난 사랑을 돈으로 잡을 수 있을까?


돈으로 환산한다면 얼마면 될까? 그렇다면 비싼 가격을 부르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 세상이 과연 행복한 세상일까?


아닐테다. [위대한 개츠비] 역시 행복한 결말을 맺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한때 사랑을, 아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있었다.


예전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 흔히 다루어지던 사법고시에 붙은 가난한 사람 이야기.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소위 마담뚜들이 달라붙는다고 했다. 돈은 있으나 사회적 지위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여겼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한 가난한 사람에게 재산을 미끼로 결혼을 하자고 한다.


(농담 식으로 판-검사, 의사와 같은 '사'자들과 결혼을 하려면 열쇠가 세 개는 필요하다는 -집, 사무실, 차- 말들이 있었으니, 이런 사고방식이야말로 돈이면 다 된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돈으로 산다고 할 수 있지만, 이는 사랑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방법이 많이 있었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돈이 우리 삶에 너무도 깊숙이 들어왔다. 대부분이 금전으로 환산이 된다. 돈이 있으면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편리를 돈으로 사는 세상, '얼마면 돼?'라는 질문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그래 얼마만 줘'가 되는 세상이다.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미국 사회를 뒤쫓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돈이 사회를 잠식하는 모습도 미국을 따라간다고 볼 수 있다. 아주 씁쓸한 현실이지만.


샌델은 이 책에서 돈이 얼마나 많은 분야를 잠식해 들어왔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결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우선 '새치기'라는 제목으로 1장을 시작한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움직일 것 같지만, 아니다. 새치기라는 말에는 도덕적인 비난이 들어 있지만, 우대권이라는 말에는 그런 비난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우대권. 무엇으로 우대를 받는가? 돈이다. 이것이 보통은 새치기인데, 이들은 표나지 않게 움직인다. 이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가를 지불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비행기 탑승을 생각해 보라. 이제는 대부분의 항공사에서 실시하고 있는데, 돈을 더 많이 지불하면 대기하는 시간이 줄어든다. 아예 없어지기도 한다. 남들이 서는 줄에 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비행기 탑승만 이러면 문제가 안 되는데... 의료 문제로 가면 심각해진다. 누구가 평등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비대면진료가 활성화되면, 또 의료민영화가 이루어지면 돈에 따라 진료의 차별이 발생한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한 사람이 빠르게, 편리하게 진료를 받게 된다. 이를 샌델은 새치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인센티브'라는 장에서는 이 인센티브가 결국 돈으로 사회를 왜곡하는 현상일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인센티브는 잘못에 대한 벌금을 지불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개념을 돈으로 그것을 덮을 수 있는 요금이라는 생각으로 이끈다고 한다.


지각자에게 벌금을 부과하면 지각이 줄까?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돈으로 지각을 대체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조차도 없어진다고 한다.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 인센티브를 돈으로 지급하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렇게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문제에서 시작해서 우리들 삶 곳곳에 침투하고 있는 돈으로 바뀌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선물을 주는 문제... 선물을 현금으로 주면 쉽게 해결될 듯한데, 왜 사람들은 굳이 선물을 주려고 할까? 이것은 바로 돈으로만 환산되지 않는 '선물의 경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함께 사는 사회에서는 돈으로만 계량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이 점을 깨닫지 않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는 점점 멀어진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사람과 사람이 접촉하는 시간과 빈도가 점점 줄고 있는데, 기껏 만나더라도 돈이 개입을 한다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는 벽이 존재하게 된다.


심하게는 죽음(보험)까지도 돈으로 생각하는 사업이 생겨났다고 하니, 이거야 원, 마지막 장에 '명명권'이라는 이름으로 광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광고야말로 돈으로 모든 것을 환산하는 (공익광고는 예외다)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아주 많은 사례들을 들어 돈으로 환산되는 사회가 왜 위험한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경제학으로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는 샌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샌델은 경제학이야말로 도덕, 철학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고, 돈으로 환산되는 눈에 보이는 수치화된 이익만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요소들이 오히려 사람들의 삶에 더 필요함을 이 책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자. 내 삶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는 그런 것들을 얼마큼 지니고 있는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많이 지니고 있으면 있을수록 내 삶이 더 행복한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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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1-29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중학생, 초등학생 아이들하고 토론했어요.^^

kinye91 2024-01-29 11:35   좋아요 1 | URL
토론이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그런 토론하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