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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3
이동민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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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수능이 끝났다. 늘 일어나는 일답게 이번 수능도 오류와 난이도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12년간 공부한 것을 측정한단 말인가?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을 결정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한데...

 

전국민이 교육전문가라고 하는 이 나라에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듯이, 모두가 교육전문가라서 한 마디씩 하는 것이 이 나라 교육정책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도 된다.

 

수능에 즈음해서, 아니 요즘 우리나라 세태 때문에 "탈무드"를 읽고 싶어졌다. 어렸을 때 읽었던 탈무드는 이솝 우화처럼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생각만 남아 있는데, 요즘 유대인 교육법인 '하브루타'라고 토의-토론 식 교육이 소개되고 있던데, 유대인들이 교육에서 가장 기본으로 삼는 책이 탈무드라고 하니, 어른이 된 지금 다시 읽어보자 하고 생각한 것.

 

그런데 책을 검색해 보니 탈무드는 아이들을 위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도대체 뭐야, 집에 있는 삼성 고학년 문고인 탈무드를 먼저 읽었는데, 이건 유대인들에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탈무드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용 중에 나치가 나오고 있으니, 이건 현대에 변용된 탈무드에 불과하다는 생각. 어떤 탈무드가 있을까 하다가 도서관에서 보게 된 것이 바로 이 책.

 

'유태인(요즘은 유대인이라고 하는데, 이 책에는 이렇게 유태인으로 되어 있다)의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게 하는 책'이라고 하는데... 삼성 문고와 겹치는 내용도 있지만, 처음 보는 내용도 있다.

 

역시 짤막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책이 발간되어 있는데, 이 책의 맨 뒤에 있는 '탈무드에 대하여'를 보니, 탈무드는 바빌로니아의 탈무드와 팔레스타인의 탈무드가 있고, 바빌로니아의 탈무드가 더 권위 있고 중요시되고 있다고 한다.(이 책 281쪽)

 

그런데 그 앞쪽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탈무드는 단순한 책이 아닌, 심오하고 방대한 문학이다. 1만 2천 페이지에 달하는 탈무드의 방대한 내용은 기원전 500년부터 기원후 500년까지 구전된 내용을 2천 명의 학자들이 10년 동안 편찬한 것이다.'(278쪽)

 

이게 뭔 말인가?

 

1만 2천 페이지라니? 그런 내가 읽은 이 탈무드는 뭐지? 그 많은 내용 중에 생각할 만한 이야기들을 발췌해서 실은 거란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탈무드의 내용이 전부 들어있는 번역본은 없다는 얘긴가? 1만 2천 쪽에 달한다면 300쪽짜리고 책을 발간해도 40권이다. 엄청난 양이다. 그런데 시중에서는 달랑 한 권짜리 탈무드만 만나볼 수 있다.  

 

결국 탈무드는 내게 완전히 알 수 없는 책이라는 뜻이 되는 건데... 그런데 아니다. 굳이 탈무드를 처음부터 끝가지 읽는 것이 탈무드를 이해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지식에 불과하지 않을까? 탈무드의 첫 쪽과 끝 쪽을 백지로 놓아둔다는데, 이는 탈무드는 누구나 다시 쓸 수 있고, 또 채워넣어야 하는 책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굳이 프랙탈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탈무드의 부분을 정확히 이해했다면 이미 그것은 지식이 아닌 지혜가 되었을 터.

 

지혜가 되었다는 얘기는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발현이 된다는 얘기. 이것이 바로 탈무드 아니겠는가.

 

그러니 탈무드를 굳이 완역할 필요가 없다. 탈무드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삶의 지혜를 획득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책을 지혜롭게 읽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탈무드가 가르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온 이야기 하나하나를 그냥 아, 재미있네, 어, 이런 생각을 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 실현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탈무드를 읽는 법이고, 그것이 바로 유대인들에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하는 책으로써의 탈무드 아니겠는가. 

 

이런 탈무드와 우리의 수능을 비교해 보자. 우리의 수능은 지혜가 아닌 지식만을 측정하고 있다. 이렇게 자라나는 미래 세대의 사람들에게 지혜가 아닌 지식을 강조하는 교육이 과연 바람직할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아이들에게 지식이 아닌 지혜를 가르칠 수 있을까? 이 책 탈무드에도 학교의 역할, 교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그러한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요즘, 다시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이다. 이 "탈무드"는. 

 

많은 이야기 중에 기억하고 싶은 글들을 아래에 몇 개 적어 놓는다.

질문과 대답


스승의 질문과 제자의 대답이다


"사람의 입은 하나인데 귀는 둘이다. 왜 그렇겠는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많이, 잘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눈은 흰 부분과 검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왜 검은 부분으로 세상을 보는 것일까?"

"그것은 세상을 어두운 면에서 보는 편이 좋기 때문입니다. 밝은 면에서 보면 지나치게 자신에 대해서 낙관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기 때문에 그로 인해 교만해지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29쪽

현인


한 사나이가 현인에게 질문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현인이 되셨나요?"


그가 대답했다.

"글쎄요. 식용유보다 등유에 더 많은 돈을 썼더니 현인이라 하더군요." 52쪽


나라를 지키는 학교


어떤 마을에 이웃나라의 유명한 학자가 찾아왔다. 그 마을의 대표가 그를 안내하여 안보 상태를 확인시켜 주었다. 변방을 돌아보니 어떤 곳에는 병사들이 들어 차 있는 작은 진지가 있고, 어떤 곳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그 마을의 대표가 그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학자가 말했다.


"나는 아직 이 나라가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가를 보지 못했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병사가 아니라 학교입니다. 왜 나를 제일 먼저 학교로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까?" 53쪽

선과 악


존경하는 스승에게 제자가 물었다.

"경건한 자가 사람들에게는 올바르게 살도록 강권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들은 항시 착한 일을 행하고 올바르게 살도록 사람들에게 권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악한 자가 사람들을 악한 짓을 하도록 유혹하는 쪽이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또 사람들을 악한 짓을 하도록 꾀어들여 패거리를 늘리고자 할 때에 우리들보다도 더욱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일을 행하고 있는 사람은 혼자 걷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라네. 그러나 나쁜 짓을 하는 자는 혼자 걷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71쪽

마음

인간의 모든 기관은 마음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마음은 보고, 듣고, 걷고, 서고, 굳어지고, 부드러워지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두려워하고, 거만해지고, 설득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사색하고, 반성한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이다. 174쪽.

교육

가장 위대한 랍비가 북쪽 마을을 시찰하기 위해 두 명의 랍비를 시찰관으로 보냈다. 두 랍비가 그 마을에 가서 말했다.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좀 조사할 일이 있소."

그러자 그 마을의 경찰서장이 나왔다.

"아니오.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은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오."

이번에는 수비대장이 나왔다. 그러자 두 랍비가 말했다.

"우리가 만나려고 하는 것은 경찰서장이나 수비대장이 아니라 학교의 선생님이란 말이오. 경찰이나 군인은 마을을 파괴할 뿐이오. 교육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마을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소." 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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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의 세계 (양장) - 전통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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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드 다이아몬드.

 

나도 이 사람의 책을 두 권이나 읽을 정도이니(제3의 침팬지, 총·균·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름이다.

 

이번에 읽은 책도 그의 장기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되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읽어도 잘 이해될 수 있도록 쓰고, 가능한 한 자료들을 모아 자신의 주장을 구체화 하는 것.

 

그래서 책은 두꺼워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본인은 자료들을 발췌해서 책을 냈다고 하지만, 요즘 나오는 책들보다 두 배는 두껍다.

 

무려 680쪽에 달한다. 주나 보충설명까지 더하면 700쪽이 넘는다. 사람들이 읽기에는 우선 분량에서 질린다. 그럼에도 읽기 시작하면 잘 읽힌다.

 

숱한 예화들과 구체적인 자료들이 제시되기 때문에 전문적인 학술서라기보다는 대중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제까지의 세계다. 과거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는 자신이 조사할 수 있는 대상을 조사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책에 남아있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직접 만난 사람들 이야기다.

 

쉽게 이야기하면 오지에 살던 사람들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던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생활방식에 대해서 쓴 글이라고 보면 된다.

 

이제는 지구화, 세계화 되어서 그런 사람들이 얼마 남아 있지 않게 되었지만, 그들의 삶을 어제까지의 삶이라고 하고 살펴본 책이 이 책이다.

 

왜 어제까지의 삶일까? 그것은 그 사람들이 우리 인류의 발생초기에 살았으리라 추측되는 삶들을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들은 현대 문명이 발달했음에도 현대문명을 만나지 못해 예전 방식 그대로 살아왔다. 그래서 어제까지의 세계다. 왜 '까지'냐면 이제는 그런 삶을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국가 없는 삶을 살았던 그들에게 이제는 국가가 존재한다. 국가는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들 고유의 문화를 지니고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국가는 간섭하고 통제하고 교화하려 한다. 또 그들 역시 현대 문명을 접하고는 현대 문명을 동경한다.

 

어제까지처럼 산다는 것은 고통과 괴로움과 굶주림과 위험에 처해 있는 삶이라는 얘긴데, 현대 문명은 이들을 없애버리고 편리하게 살 수 있는 것처럼 비치기 때문에 이들은 어제에서 나와 오늘을 살려고 한다.

 

그래서 어제까지의 세계다. 이제는 사라져 버릴 세계. 그러나 어제란 오늘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오늘에 살아남지 못하는 어제는 어제로 기억되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따라서 어제까지의 세계는 오늘의 세계를 비추어주는 거울이 된다. 오늘의 세계를 더 잘 살게 해주는 안내서가 된다.

 

하여 이 책은 과거의 삶을 사는 소수 민족을 찬양하는 책이 아니다.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그들 삶에서 지금 우리가 들여와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과거가 암울했다고 해서 과거를 통째로 잊자는 말이 아니다. 과거의 빛과 어둠을 다 보여주기 때문에 과거의 어둠은 제거하고, 빛을 지금 우리가 받아들이자는 말이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식생활이다. 또 친밀감이다. 아이들을 키우는 방식이다. 이런 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식생활로 인해 고혈압, 당뇨병 등 온갖 성인병이 난무하는데, 우리가 살아온 어제까지의 세계에서는 이런 식생활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고, 우리의 유전자는 지금의 식생활에 견딜 수 있는 몸을 아직 만들지 못했다고... 그래서 저염식, 채식 위주, 천천히 먹는 습관이 있는 어제까지의 세계가 습관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말.

 

또 서로의 얼굴을 보며 집중하면서 이야기하는 태도. 그리고 아이들을 업을 때 업는 사람과 같은 방향을 보게 업는 것, 또 함께 자는 것 등등. 그리고 많이 걷고 많이 움직이는 것.

 

여기에 무엇보다도 현대를 사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건설적 편집증이라고 할 수 있는 조심하는 태도.

 

안전이 문제가 되고 있는 지금,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어제까지의 세계의 모습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안전 불감증이라는 말은 사라지겠지.

 

방대한 분량에 비해서 결론이 너무도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닐까.

 

정답은 늘 가까이에 있는데, 그걸 멀리서 찾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지. 어제까지의 세계는 바로 오늘의 세계와 맞닿아 있고, 어제까지의 세계가 우리에게 내일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미래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 존재했었고, 오늘에 현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오래된 미래를 보지 못하고 우리는 미래는 과거와 현재와 다를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저자도 말한다. 과거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과거를 무조건 찬양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다만, 충분히 우리 눈 앞에 좋은 것이 함께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계속 유지하자고.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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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부모 얼굴이 보고싶다 무대 위의 문학 1
하타사와 세이고.구도 치나쓰 지음, 추지나 옮김 / 다른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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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5년 전쯤에 우리나라에서 왕따, 집단 괴롭힘이 사회 문제가 되었다. 집단 생활을 하면 집단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그를 참지 못하고, 차이를 차별로 바꾸어 폭력으로 전환시킨 경우였다.

 

아마도 공동체가 무너지고, 집단의식보다는 개인의식이 대두했으며, IMF란 전대미문의 사태를 겪으면서 나만 잘 살면 돼라는 인식이 팽배해 지고 있던 모습이 학생들에게 내려와서 그렇게 된 것이리라.

 

지금은 좀 덜한데, 아직도 해결되지는 않았다. 학교마다 폭력과 따돌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고, 이것이 상당히 음성적이어서 발견하기도 힘들도 또 해결하기도 힘들다는데 문제가 있다.

 

여기에 이제는 학교에서뿐만이 아니라, 아니 학교에서는 좀 잠잠해졌는데, 연령대가 높아져 남자들의 경우에는 군대로 옮겨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아무렇지도 않게 조금 다르다고 해서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들이 지금 군대에서 너무 자주 보여지고, 그래서 힘도 없는 사람들은 자식들까지도 군대에 가서 고생을 하고, 힘있는 자들의 자식들은 군대에 가지 않거나 가더라도 가해자의 편에 서는 경우가 종종 언론에 보도되곤 한다.

 

관용. 배려. 차이를 인정함. 이런 자세들은 여유에서 오는데,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여유가 사라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학생들 역시 성적 스트레스로 여유를 잃고 있고, 군대에 간 남자들 역시 제대하고 살 길이 막막하긴 마찬가지니 여유가 없고, 여자들은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어려움에 처한 경우가 많으니, 나라 전체에 여유란 없다고 봐야 하니, 그 여유없음에서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관용이 생길 리 없으니...

 

제목이 자극적이다.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우리는 아이들을 야단칠 때 흔히 부모까지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니네 부모가 이렇게 가르쳤니?" 이 말을 참으로 쉽게 하고 있지 않았던가.

 

아이들 교육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부모이니, 이런 말이 당연히 나온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소설은 이 점에 착안하여 내용이 전개된다.

 

학교는 명문 사립 여자중학교. 학비가 비싸고 학생들의 아르바이트가 금지될 정도의 보수적인 학교다.

 

여기서 한 여학생이 자살을 한다. 교실에서 목을 대달고 죽은 것. 최초 발견자는 담임 교사. 부임한 지 일년 정도된 신임 교사다.

 

이 정도는 어느 소설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왜 그랬을까를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는데, 이 소설은 아니다. 아이들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부모들만 나온다.

 

아이가 죽은 뒤 제일 먼저 배달되어온 편지. 담임에게 온 편지. 그곳에 이름이 적힌 5명의 아이 부모가 소환된다.

 

여기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로지 부모들의 이야기가.

 

부모들의 직업이 다양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데, 이 중에는 교사인 부모들도 있다.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어쩌면 학교의 사정을 가장 알 아는.

 

하지만 내용은 정말 생각 밖으로 전개된다. 부모들은 한사코 아이들의 행위를 부정한다. 이들은 부인으로 일관한다. 그것이 아이를 위한다고 여기면서. 특히 교사인 부모가 더 그런 상황을 주도한다.

 

물론 도덕적으로 행동하자고 하는 부모(이 소설에서는 전직 경찰 출신인 할아버지다)도 있지만, 정의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는 교사인 학부모의 말에 대부분의 부모가 동의한다.

 

결론은?  읽어보면 알겠지만...

 

어쩌면 자기 자식들의 행위는 일단 부정하고든 부모의 마음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다른 자식의 죽음 앞에서도 자기 자식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부모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죽은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했던 신문보급소 점장이 등장하여 한 마디 하지. 그게 바로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이다.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극으로 공연도 되었다고 하니, 이 소설은 술술 읽힌다. 대사를 중심으로 구성이 되어 있어서 소설이지만 연극적 요소가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만큼 박진감도 있다.

 

그러나, 다 읽고 짙은 여운이 생긴다. 도대체 아이 키우기가 정말 힘들다고 하는데, 어떤 것이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걸까?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 그것도 큰 잘못을 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소설과 비슷한 관점(?) 또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이창동 감독의 "시"란 영화다. 상황이 비슷한데, 결말은 다르다.

 

그래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 아이를 보면 그 부모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정말로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 그 아이가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식으로, 궤변으로 자신을 합리화 해도 자기 앞에 있는 아이의 모습이 바로 자신이다. 부모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서는 굳이 아이를 등장시킬 필요가 없다. 부모를 통해서 아이를 볼 수 있고, 그 사건을 통해서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경어인(鏡於人)이라고 사람에 자신을 비추어보라고 한 말, 부모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비춰주는 거울이 바로 자식이다.

 

또 바로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바로 자신이다. 그러니 남 탓 바 아니다. 바로 내 탓이다.

 

자, 정말로 커다란 잘못을 한 아이가 앞에 있다. 부모,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떤 것이 진정으로 아이를 위하는 것인가?

 

이 책은 학교에서 일어난 집단 괴롭힘 문제를 다루면서 이 질문을 하고 있다.

 

대답은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는.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닌, 어른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그런 질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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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
박홍규 지음 / 소나무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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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그림을 보면 스페인이 보이고, 우리나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은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술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 중인데, 재미 있다. 많은 사실을 알게 되고, 그림을 보는 재미도 느끼고, 이런 점에서 학창시절에 느끼지 못했던 미술에 대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데...

 

고야란 이름을 자주 보게 된다. 사실 예전에는 모르고 있던 화가이고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화가이니.

 

그런데 그의 그림 중에 언급되는 그림들이 제법 있다. 어디선가 본 그림도 있고. 그렇다면 그는 중요한 화가? 이런 생각이 든다.

 

도서관에서 박홍규(그는 아나키스트라고 할 수 있다. 아나키즘에 관한 책이 그에 의해 많이 소개되었다)가 쓴 "고야"에 대한 책을 보았다. 그동안 고야에 대해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넘어간 책들을 읽은 터라 잘됐다 싶어 빌려 읽기 시작.

 

화가에 대한 이야기, 그림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 것과는 좀 다르게 스페인의 역사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단순히 스페인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비교하면서(분명 대조가 아니라 비교다. 이렇게 스페인과 우리나라가 비슷한 줄은 몰랐다) 시작한다.

 

도대체 고야와 스페인의 역사, 그리고 우리나라가 어떻게 관련되기에 이렇게 하나 했더니, 화가는 그 시대를 벗어날 수 없으며 고야는 그 시대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작품으로 남긴 작가라고 한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누드 그림 말고, 대부분의 그림은 스페인의 현실을, 스페인의 민중을 그린 작품들이니 스페인의 역사를 알아야, 고야가 살던 당시 혁명기의 스페인을 알아야 그 그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반도국가에서 비슷한 시기에 기나 긴 독재시대를 거쳤다는, 외국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살해당했다는 그러한 공통점도 있고, 고야의 작품 두 점이 우리나라에서 전시 불가 판정을 받아 전시되지 못했다는 사실도 있으니, 작가가 우리나라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왜 우리나라에는 고야와 같은 작가가 없는가고 한탄하고 있다. 왜 없겠는가? 우리나라에도 있다. 다만, 그와 같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고, 고야 역시 당대에는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지 못했으니, 우리나라 화가들도 작품을 제대로 발표하지 못할 뿐이다.

 

2002년에 쓰여진 이 책은 그 전까지 우리나라 화가들의 서구취향, 또는 전통 한국취향으로 위장한 자기만족에 대해서 비판적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 때도 우리나라 화가들 역시 시대를 직시하고, 그 시대 상황을, 민중들의 모습을 작품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음 확실하다.

 

단지 고야처럼 성공적인 화가의 길을 걸은 사람이 아닐 뿐이지.

 

고야는 시골에서 태어나 아카데미에 두 번이나 떨어지는 고난을 겪는다. 그만큼 그는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발휘한 화가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부단한 노력으로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결국 궁정화가가 된다.

 

스페인에서 궁정화가가 된다는 얘기는 출세의 길에 들어섰다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럼에도 고야는 왕실의 화려함을 자랑스레 표현하기 보다는 비판적인 시선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궁정화가로서 지내면서도 민중들의 삶에 대해, 스페인 현실에 대해 풍자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비록 발표를 못하고, 또 금지 당하기도 하지만, 그는 그런 그림을 포기하지 않고, 말년에는 보수 반동의 흐름을 견딜 수 없어 프랑스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삶을 마감한다고 하는데...

 

궁정화가로서 출세의 길을 달리지만 그는 그가 처한 사회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고, 특히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중들의 삶에 눈감을 수 없었다고... 또 가톨릭의 횡포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마녀사냥이 계속되어지는 스페인의 현실에도 눈을 감을 수가 없어 그를 풍자화로 그려냈다고 하니...

 

그의 그림들을 보면 스페인의 근대를 알 수 있고, 전쟁이나 권력이 사람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평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 고야의 그림들이, 그것도 민중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들이 많이 실린 것은 저자인 박홍규가 권력의 비민주성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고야의 민중성, 혁명성을 더 강조하고 있고, 이런 화가가 우리나라에도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고야처럼 궁정화가는 되지 않았더라도 우리에게도 민중화가들은 많이 있다. 언뜻 떠오르는 이름만 하여도 오윤, 홍성담, 임옥상, 강요배 등이 있으니... 우리도 스페인을 부러워만 할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 역시 우리의 현실 속에서 우리의 현실에 맞는 그림들을 만들어내는 화가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가 말하고 있는, 그래서 한 화가의 평전이지만 책의 앞뒤로 스페인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점은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한다.

 

스페인이 몇 번의 민주화를 이루어냈지만, 민주화 이후에 독재로 많이도 돌아갔듯이, 우리 역시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어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과연 그런가, 정말 그런가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2002년에도 이랬는데, 12년이 지난 지금, 과연 그런가? 이렇게 물으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고야의 그림이 우리나라에 전시 불가 판정을 받았듯이(이 책에 의하면 그 그림은 '벌거벗은 마하'와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프린시페 비오 언덕의 총살'이다) 2014년 우리나라 광주에서, 민주화의 성지라 불리는 광주에서, 광주 정신을 계승하자고 그렇게 말하는 지금 홍성담과 몇몇이 그린 그림들이 광주 비엔날레에 전시되는 것을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보면... 박홍규의 절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책의 마지막 구절... 2014년에도 유효하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그는 권력과 성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한다. 인간을 파괴하는 두 개의 악에 저항한다. 18세기 스페인이나 20세기 한국이나 그 두 가지는 인간을 파괴하는 두 개의 괴물을 상징한다. 그 저항으로 그는 두 장의 그림을 그렸고, 그것이 당대 스페인에서 금지당한 것처럼 20세기 한국에서도 금지 당한다. 한국은 아직도 권력과 성에 있어서는 미개국이다. 274-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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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나날들이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

 

이미 실시되고 있던 복지는 없던 일로 되돌리고, 없던 복지는 아예 없던 일로 하고, 안 해도 될 일은 굳이 하려고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현진건의 소설 제목처럼 '술 권하는 사회'가 되었으니, 술이나 마실 수밖에 없는 건지.

 

"삶창 101호"가 왔다.

 

반갑게 읽기 시작.

 

마음이 따스해지고 싶어서 빨리 손에 들었는데... 이거 더 우울하다. 즐거운 소식은 역시 없다.

 

삶이 보여야 하는데, 우리나라 곳곳에 펼쳐져 있는 가림막처럼, 아님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둠의 장벽인 지배 계층의 일들처럼, 삶은 어둠 저편에 있다.

 

어둠 저편에서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 삶창에 실린 내용들도 아직은 어둡다.

 

이 사회를 보여주는 거울같은 역할을 하는 삶창이니, 당연히 어두울 수밖에 없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럼에도 조금 따뜻할 수는 없을까?

 

비록 희망이 사람을 더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사람을 살아가게 만들고 있듯이 삶창이 무언가 희망을 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 호에서 <오늘>이라는 주제로 쓰여진 글들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잘 짚어내고 있는데, 그게 참 우울한 단면이고, <공간과 환경>에서도 역시 우리 삶을 침해하고 있지만 적절히 대응하고 있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이 글에서는 삶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조금 희망을 가진다면 <다른 세상>에 나온 '공룡'이란 공동체 실험 이야기처럼 아직 희망을 지니고 다양한 삶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세월호에 관해 재판 결과가 나왔다. 그 결과를 두고 말들이 많다. 그 많은 말들 중에 정작 책임져야 할 사람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이런 상황이 이번 삶창 101호에서 고병권의 글.

 

그가 <노동의 인문학>에서 이야기한 '왕에게는 아무 것도 희망하지 말라. 그에게는 단지 책임만을 물어라. 힘은 바로 당신에게 있다.'(83쪽)는 고병권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에게 시혜를 구걸하지 말라는 말, 그들이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은 시혜가 아니라 책임이라고, 우리는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힘없는 서발턴(하위 주체)들에게 책임을 묻는 왕에게 읍소하는 것이 아니라, 왕,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책임자는 바로 너라고 당당하게, 힘있게 말해야 한다고 읽힌다.

 

이게 희망이다.

 

그럼에도 마음은 따스해지지 않는다.

 

이상하게 100호를 기점으로 삶창이 가슴에서 머리로 옮겨간 느낌이다. 삶을 살아가는 주체들의 이야기보다는 그런 주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글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마음을 울리는 글보다는 머리에 호소하는 글이 더 많다.

 

이게 삶창을 읽고 나서도 우울함이 가시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삶이 보이는 창, 마음을 울리는 글들이 나에게 삶을 보여주곤 했었는데, 그 점은 아쉽다.

 

그럼에도 논리적 사유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변화가 더 좋을 수도 있겠지.

 

덧글

 

이번 호에서 사실 마음이 가장 따스해진 글은 책 뒷표지에 실린 손별걸 시인의 글이다. 학생들이 쓴 시를 제비뽑기를 통해서 시상했다는. 시인들 답게 왜 아이들 시를 순위를 매겨야지 하는 생각, 그리고 제비뽑기를 통해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고, 뽑히지 않더라도 마음이 상하지 않는 그런 모습. 정말 따스하다.

 

예전 그리스에서는 추첨으로 지도자를 뽑기도 했다는데, 제비뽑기로 뽑은 지도자가 선거를 통해 뽑은 지도자보다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왜일까?

 

이런 따스한 글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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