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나선 - 생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DNA를 발견한 이야기 궁리하는 과학 1
제임스 D. 왓슨 지음, 최돈찬 옮김 / 궁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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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생물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용어 'DNA'. 그것의 구조를 밝혀낸 사람,, 제임스 왓슨과 프란스시 크릭.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다. 물론 DNA의 구조가 이중나선이고 그것들이 네 개로 이루어져 있다는 글을 보기도 했지만 (아데닌-티민, 구아닌-시토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별로 관심 있는 분야도 아니었고, 또 지금은 이를 기초로 더 많은 유전학이 발달해 있으니...


하지만 늘 처음이 어렵다.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처음이 어렵지 시작이 되면 그것을 발판으로 더 많은 연구들, 발전들이 이루어진다.


DNA구조가 밝혀지기 전까지 많은 과학자들이 그에 매달렸고, 많은 실패들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과학자들끼리의 경쟁도 있었고.


과학계가 서로 협동하는 경우도 많지만 치열하게 경쟁하는 경우도 많다. 과학 분야에서라면 누구에게라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과학자 집단 아니던가. 그러니 그들은 협력을 할 때는 하더라도 철저하게 자신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이 많다.


논문에 공동저자로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또한 자기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위대한 과학적 성과를 낼 수 없지만, 집단의 능력과 노력에 개인의 노력과 능력이 더해져야만 과학적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 책은 그 점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 물론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사람 중의 하나인 왓슨이 쓴 책이라, 자신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경우가 많겠지만, 그럼에도 DNA 이중나선 구조가 밝혀지기까지의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서술되어 있다.


왓슨도 자신이 쓴 글 내용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당연하다. 자신의 관점에서 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히기 위한 과학자들의 경쟁과 협력을 잘 알 수 있게 된다.


누구보다도 먼저 DNA의 비밀을 밝혀내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이 아주 긴박하게 잘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과학적 지식이 없어도 이 책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왓슨의 회고록이라고 보면 좋을 책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영국으로 연구하러 가서 거기서 만난 동료와 위대한 업적을 이룬 왓슨.


세상에 그가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것이 20대다. 놀라운 성취다. 하긴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것도 20대니 혈기왕성한 나이에 과학적 업적을 이룬 것이 예외가 아니긴 하다.


새로운 아이디어, 멈출 줄 모르는 도전 정신, 그리고 치밀함 등등이 그런 업적을 이루게 했으리라.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공로로 세 사람이 노벨상을 받았다.(생리의학상). 공동저자였던 크릭과 경쟁자였던 모리스 윌킨스.


이 책에서는 윌킨스와의 경쟁과 협력이 생생하게 잘 펼쳐진다. 그리고 빠진 한 사람. 후기에서 왓슨은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여성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 사람. 그럼에도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내는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나중에 왓슨은 로지(로잘린드 프랭클린을 그들은 줄여서 로지라고 불렀다)에 대해서 다른 평가를 한다. 훌륭한 과학자였다고. 아마 살아있었다면 로지도 노벨상의 공동수상자가 되었을텐데...


여기에 더해서 미국에서 DNA구조를 밝히려고 했던 폴링과의 경쟁. 그리고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냈을 때 깨끗하게 승복한 폴링의 자세. 과학자가 지녀야 할 덕목이지 않을까 싶다.


연구를 할 때는 치열하게 경쟁하되, 상대가 완성된 이론을 발표했을 때는 그를 인정하는 것. 그런 점들을 볼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물론 왓슨의 관점에서 쓰인 책이라는 점을 기억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은 DNA 이중나선 구조가 밝혀지기까지의 과정이 그에 직접 관여했던 사람의 관점으로 아주 흥미진진하게 서술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읽기에도 좋다. 추천사를 쓴 최재천의 말처럼 과학자도 글을 잘써야 한다.


글 잘쓰는 과학자가 더 오래 살아남는다. 그 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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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2-14 20: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난달에 제가 읽었던 과학동아 1월호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 님에 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kinye91 2024-02-15 11:19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왓슨이 자전적인 기록에서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어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2-15 11: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 좀 detail한 내용이긴 합니다만, 제가 읽었던 과학동아 1월호 내용에 근거하면 프랭클린이 DNA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51번 X선 회절 사진‘이라는 것을 찍어서 이중나선 구조 발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는 얘기가 나오더군요. 아마 왓슨도 자전적인 기록에서 이러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나 조심스레 예상해 봅니다.

kinye91 2024-02-15 11:59   좋아요 2 | URL
네. 이 책에 그런 내용이 있어요.

그레이스 2024-02-19 0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았던 책입니다. 이젠 이 책도 과학분야에서는 고전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어느 분야든 관계가 중요한 요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kinye91 2024-02-19 17:17   좋아요 0 | URL
맞아요. 관계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특히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경우를 보니까 더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정원가의 열두 달
카렐 차페크 지음, 요제프 차페크 그림, 배경린 옮김, 조혜령 감수 / 펜연필독약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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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가꾸기에 관한 전문적인 책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정원 가꾸는 사람이 겪게 되면서 느끼는 점을 쓴 책이다. 수필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참 재미있다.


정원에 관한 책을 이렇게 재미있게 쓸 수도 있다니 연신 감탄하면서 읽게 된다. 야, 차페크라는 사람, 정말 대단하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정원 가꾸기를 1월부터 12월까지 계절에 따라서 이야기하면서, 그때 그때 필요한 식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만, 그때 그때 느끼는 감정들이 정말 절묘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한번 보고 말 책이 아니라 두고두고 읽어도 재미있겠단 생각이 드는 책이다. 게다가 식물을, 아니 흙을 가까이 두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게 하니..


우선 차페크는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154쪽)고 한다.


주거지의 형태가 대부분 아파트인 우리나라에서도 베란다에 화분을 놓고 또는 아주 작은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이 있다. 그만큼 인간은 흙과 식물과 떨어져 살기 힘들다는 말인데...


차페크는 그 점을 명료하고도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화단을 가꾸다 보면 '구름들조차 우리 발밑의 흙만큼 변화무쌍하지도 아름답지도 경외할 만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54쪽)고 한다.


그렇다. 흙에는 온갖 생명체들이 산다. 흙은 또 하나의 우주다. 그런 우주를 날마다 보고 접촉한다면 우리는 우주의 경외를 삶 속에서 느끼게 되는 것이다.


흙을 만지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 사람들도 있으니, 하다못해 작은 화분 하나라도 집에 들여놓고 식물을 가꾸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곧장 화원으로 달려가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그만큼 차페크가 정원 가꾸기의 좋은 점들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물론 그는 일방적인 찬양을 하지는 않는다.


정원을 가꾸면서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하는지, 또 몸은 얼마나 힘든지를 재미있게 표현하는 장면이 많다. 특히 사람의 신체 중에서 등뼈가 가장 쓸모가 없다고 주장하는 부분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오게 된다.


이 부분을 보라.


'만약 정원가가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진화해온 생물이라면 무척추동물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정원가에게 등뼈란 하등 쓸모가 없으니, 이따금 "아이고, 허리야!" 하며 몸을 일으킬 때 말고 등뼈가 쓰이는 데가 어디 있을까? 

  다리로 말할 것 같으면 여러 방향으로 구부릴 수 있다. ... 손가락은 구멍 뚫기에 안성맞춤이고, 손바닥은 흙덩어리를 부수거나 곱게 갈 때 쓰기 좋으며, 머리는 줄기와 버팀대를 지지하기에 좋다. 그러나 등만큼은 정원가의 성미대로 구부릴 수가 없다. 한낱 지렁이도 등뼈 없이 자유자재로 노닐 건만, ...'(57-58쪽)


하하, 정원이 아니더라도 작은 텃밭을 가꿔본 사람은 안다. 허리를 구부리고 일을 할 수밖에 없으며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얼마나 허리가 아파지는지. 그러니 이런 표현에 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한 달 두 달, 달이 지나면서 차페크는 정원가가 해야 할 일, 또 어떤 마음인지를 표현해나가고 있는데, 여기에 정원가를 비꼬는 표현도 나오고, 또 그럼에도 식물들, 흙이 주는 고마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흙과 식물과 함께하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데, 겨울이 다가오면서 꽃과 잎을 다 떨어뜨린 식물들을 보면서 차페크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본다. 즉 미래는 현재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미래란 우리 앞에 놓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싹눈 속에 자리하고 있다.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있다. 지금 우리 곁에 자리하지 않은 것들은 미래에도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 단지 땅속에 숨어 있기에 새싹을 보지 못하듯, 우리 내부에 자리하고 있기에 우리는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185-186쪽)


혹독한 겨울이 와도 식물은, 흙은 이미 그곳에서 미래를 품고 있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잘 보면 미래는 바로 현재에 있다. 겨울이 오는 12월에 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봄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차페크의 글을 보면서, 그래, 미래란 바로 현재에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정원가의 열두 달. 정원 가꾸기에 관한 책이 아니다. 정원을 가꾸면서 느꼈던 삶 가꾸기에 대한 책이라고 보는 것이 더 좋겠다. 그것도 낄낄거리면서 읽을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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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제목만 보고, 우리들 서정(사랑과 비슷한 우리들 마음을 울리는 그러한 감정들이라고 좁게 서정을 생각하며)을 노래하는 시들을 모아놓았나 했다. 그런데, 시집 제목이 된 시는 그게 아니다. 서정시를 쓰는 시인도 감시를 받아야 했던 시절.


  감시 목록 파일 이름이 서정시였다는 거다. 살벌한 시대에는 서정시조차도 저항시가 되는 세상이니.


  아니, 서정을 노래하는 시들은 독재에 대항하는 시들일 수밖에 없다. 독재는 개인의 서정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런 서정시들이 널리 퍼진 사회에는 독재가 깃들 수 없으니까. 그러니가 서정시는 독재에 대항하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왜 이리 죽음이 많이 나올까 했다.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한 죽음들과 시인 개인사에 얽힌 죽음으로 읽힐 수 있는 시들까지. 세상이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시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집에서 두 단어가 마음 속에서 자리 잡았다. '기슭'이라는 말과 '대각선'이라는 말. 두 말의 공통점을 '경계'에서 찾는다.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곳이자, 이곳과 저곳을 나누는 곳. 그것이 바로 기슭과 대각선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죽음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이 시집에서 기슭과 대각선을 핵심으로 본다면, 죽음의 대각선 너머, 또는 죽음의 기슭에는 삶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삶을 사각형이라고 하고 대각선을 그어보면, 한쪽은 삶이고 한쪽은 죽음이리라. 그리고 삶과 죽음은 사람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될테고. 이 대각선은 삶 쪽에서는 죽음과 이어지는 기슭이 될 것이고, 죽음 쪽에서는 삶과 이어지는 기슭이 될 테다. 


결국 기슭은 대각선이다. 그리고 대각선은 우리가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을 대비해서 볼 수 있게 해준다. 꼭 삶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기슭에 처해 있는 경우가 많다. 기슭에 있을 때 어떠해야 할까.


무섭다고, 두렵다고 눈을 감아야 할까? 그냥 벌벌 떨면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있어야 할까? 아니다. 시인이 시집에서 수많은 죽음을 이야기한 것은 죽음의 대각선 너머에 있는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기슭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슭에서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기슭에 다다른 당신은'(90-91쪽)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 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 발을 멈추고 구름에게라도 물었어야 했다 / 산을 내려오는 산에게 / 길을 잃고 머뭇거리는 길에게 물었어야 했다'('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3연)


그러면서 '모든 무서움의 시작 앞에 눈을 감지는 말았어야 했다'(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8연 2행)고 한다. 


'대각선의 길이'(118-119쪽)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어디론가 불려가는 것들 / 불려가면서 다른 존재를 불러오는 것들 / 종종걸음으로 / 수평선과 수직선을 가로질러 아주 멀리 가는 것들 / 짧은 궤적을 남기며 사라지는 것들' ('대각선의 길이' 7연)


이것이 '기슭과 대각선'이 지닌 공통점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된다. 그렇다면 동전의 양면처럼 한 면을 볼 때 다른 면을 볼 수 없게 되는데, 이 기슭과 대각선은 한쪽 면과 다른쪽 면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볼 수 있을 때 선택은 우리 몫이다.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100-101쪽)는 시도 있지만, 기슭과 대각선을 생각하는 우리들은 '부사'(꾸밈말)가 아닌 '동사'를 좋아해야 한다. 경계에서는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집의 마지막 시('서른세개의 동사들 사이에서')는 결국 기슭과 대각선에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서른세개의 동사들 사이에서


  빛의 옥상에서

  서른세개의 날개를 돌려라

                   

  오다 가다 오르다 내리다 흐르다 멈추다 녹다 얼다 타오르다 꺼지다 보다 듣다 생각하다 말하다 삼키다 뱉다 잡다 놓다 울다 웃다 주다 받다 묻다 답하다 밀다 당기다 열다 닫다 떠오르다 가라앉다 부르다 사라지다 넘다


  서른세개의 동사들 사이에서

  하나의 파도가 밀려가고 또 하나의 파도가 밀려올 것이니

  세상은 우리의 손끝에서 부서지고 다시 태어날 것이니


  기다리지만 말고 서른세개의 노를 저어 찾아라

  세계의 손끝에서 마악 태어난 당신을


(* '서른세개' 시인이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창비. 2021년. 초판 6쇄. 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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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에 속삭이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5
임철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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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이 나에게 건넨 말]을 읽다가 알게 된 소설이다. 임철우 작품은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땅'과 '봄날'은 읽었으니 어느 정도 믿음이 가는 작가였고.


그런 임철우 작가가 6.25와 광주민주화운동에 이어 4.3을 다룬 소설을 썼다기에 읽어야지 하고 있었다. 마침 [4.3이 나에게 건넨 말]에서 이 소설을 다뤄주었으니, 꼭 읽어야지 하는 결심을 하고 구입.


뜸을 들이다 읽기 시작. 먼저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4.3은 비극이니까. 어떤 슬픔이 몰려올지 모르니 마음에 어떤 각오를 하고 읽기 시작. 


주요 인물은 셋이다. 은퇴한 뒤 제주도에 내려가 사는 한(민우), 그런 한민우에게 언뜻언뜻 나타나는 정체 모를 아이들 몽희(몽구, 몽선), 그리고 한민우에게 그 아이들에게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윤(천엽). 여기에 한 존재를 더하면 개 망고.


제주도에 내려와 사는 한에게 이상한 느낌이 드는 일이 잦다. 왜 그럴까? 망고도 이상한 행동을 하고. 꿈 속에서도 아이들이 보이고. 그러다 장 가는 할머니들을 태우게 되는데, 여기서 윤씨 할머니에게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1948년에 벌어졌던 비극에 대해서. 그리고 왜 자신에게 그 아이들이 보이는지를 몽희의 입을 빌려 독자에게 알려준다. 무심한 사람은 절대 볼 수 없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을 볼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을 소설에서는 '아파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어떤 마음이 아파하는 마음일까? 몽희의 말을 빌리면 아파하는 마음은 바로 이렇다. 이 아파하는 마음이 아파하는 마음과 공명하게 된다.


'혼자서 길을 걷다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사람. 그건 십중팔구 특별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는 표식이야.' (63쪽) 그런 마음이 '아파하는 마음'(64쪽)이라고 한다. 


어쩌면 4.3을 직접 겪은 천엽도 그런 아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있었을 것이고. 그들이 살아온 세상을


'아버지도 나도 지옥에 갇혀 있었다는 걸. 단지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하필 그 지옥에 함께 있었다는 죄뿐이라는 것도요…….'(168쪽) 라고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옥에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아니, 신조차도 무엇을 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지옥 아닌가. 그래서 지옥을 없앨 수 없는 신이 그나마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만든 곳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제주 신화를 빌려서 이야기하는 서천꽃밭 아닐까. 아이들만 갈 수 있다는.


아이들은 지옥에 가기에는 너무도 순수하니까, 현세의 지옥에서 벗어나 아이들이 그나마 안주할 수 있는 곳을 만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 서천꽃밭도 아무나 볼 수는 없다. 서천꽃밭을 볼 수 있는 어른은 바로 '아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살아온 역사가 바로 지옥이었음을 깨달은 윤씨 할머니는 어느 정도 아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한이 찾는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과거를 다시 현재로 불러내오는 용기. 그것은 바로 아파하는 마음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굳이 불경 중 '유마경'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세상이 아프면 사람도 아플 수밖에 없으니... 그 아픔을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옥도 천국처럼 여기고, 지옥에서 잘살려고 악마처럼 변해가겠지만, 아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지옥을 지옥으로 느끼기에, 그 지옥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더욱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몽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남다르게 '아파하는 마음'을 가졌으니까. 그런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을 가진 이들만이 우리들의 존재를 알아보고, 감지하고 또 공감할 수 있어. (205쪽)

 ...만일 당신이 언젠가 그 눈을 갖게 된다면, 당신은 그 순간부터 지상을 떠도는 수많은 불행한 혼들의 슬픔, 절망, 원망, 분노, 고통과 직접 마주쳐야만 해.

  진정으로 두려움 없이 마주할 수 있을 때라야만, 당신은 그들의 검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검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검은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테니까…….'(206쪽)


그냥 아파하는 마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아픔이 주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파하는 마음들이 함께 할 수 있다.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면서 더한 아픔이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다. 그래서 역사적 상처는 반드시 치유의 과정이 필요하다. 치유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픈 마음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공감. 진실한 사과. 그리고 행동의 변화. 소설은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관광의 섬인 제주도에서 마냥 나만의 즐거움만을 찾지 말라고... 제주에 배어 있는 역사적 아픔을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러므로

그 섬에 가거든, 돌담 그늘에 누운 어린 혼들의 고단한 잠을 함부로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기를.


고즈넉한 마을, 이끼 낀 돌담길을 지나거나, 바람찬 들녘의 구불구불한 밭담 사이를 걸을 때나, 혹은 오름 기슭 외진 골짜기에서 이름 없는 돌무더기들과 마추지거들랑.


부디

목소리 발소리를 낮추고

가만가만 지나가기를…….'(224쪽)


이렇게 소설은 가만가만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 속 인물인 한민우가 아이들을 볼 수 있듯이 그렇게 우리 역시 들을 귀, 아파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그것이 우리가 4.3을 기억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그것이 바로 지옥에서 벗어나 서천꽃밭을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게 되는 방법이라고.


이제 봄이 다가오고 있다. 다시 4.3이 올 것이다. 역사의 한 순간으로 지나치는 날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그런 아픔이니.


임철우의 이 소설. 우리에게 '아파하는 마음'을 전달해주고 있다. 함께 공명하자!



덧글


그런데 읽다가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 

'1948년. 기축년 그해 겨울.'(83쪽)이라고 나오고, 또 '1948년 12월 중순.'(140쪽)이라고 나와 몽희네가 죽은 해는 1948년으로 봐야 할 것 같은데, 1948년은 기축년이 아니라 무자(戊子)년 아닌가. 이게 헷갈린다. 찾아보면 기축년은 1949년으로 나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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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날들
정지아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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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설을 쓴 정여울의 글에 정지아 작가가 했다는 말이 실려 있다. 아마도 이 소설집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일 것이다. 물론 예외인 작품은 있지만.


"1%의 삶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99%의 삶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게 문학이 아닐까요?"(338쪽)


'1%의 삶'이란 우리 삶의 일부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1%의 삶이란 상위 1%에 속하는 사람들의 삶이라고 봐야 한다. 굳이 상위 1%에 속하는 삶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삶, 소위 행복하다고, 성공했다고 여기는 삶을 1%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삶에서도 빛나는 한때를 1%의 삶이라고 봐도 좋다.  


이 소설집에서는 '나의 아름다운 날들'이라는 소설이 바로 1%의 삶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삶의 모습.


'막 샤워 끝낸 남편의 몸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 때문에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두 사람 위로 어룽거린다. 눈부시게 찬란한 아침이다. 눈부시게 찬란한 인생이다.'('나의 아름다운 날들' 끝부분. 302쪽)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무엇 하나 부러운 것이 없는 삶을 살아온 김여사. 김여사 부부의 금혼식 날 아침에 김여사의 서술로 벌어지는 일들. 이들에게 가난이란 없다. 어려움이란 없다. 그냥 자연스레 해결이 된다. 그야말로 1%이 삶이다. 그러나 그런 1%의 삶에 가려진 99%의 삶도 있다.


김여사가 가정부의 삶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듯이, 그런 1%들은 자신들의 무지개빛 같은 찬란한 인생 속에 갇혀 있을 뿐이다. 


작가는 그런 삶이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질문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나의 아름다운 날들'은 1% 삶에 대한 풍자다. 풍자로 읽어내야만 한다. 그들의 그런 삶에 가려진 99%의 삶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1%의 삶들이 자신들의 삶으로 99%이 삶을 가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문학은 우리가 애써 감추려 했던, 또는 보지 않으려 했던 99%의 삶을 보여줘야 한다. 


이 소설집에서 그런 우리가 외면했던 또는 보지 못했던 99%의 삶이 잘 나와 있다. 때로는 너무도 힘든 상황이라 읽기에 힘든 그런 작품들도 있는데, 그럼에도 힘든 상황에서도 한 줄기 빛을 놓치지 않는 작품들도 있다. '절정'이란 작품이 그렇다.


한 없이 바닥으로 추락한 노숙인들의 삶. 그러나 노숙은 하지만 노숙자가 되지 않겠다고 노력하던 김이 결국은 간암으로 입원해 있다는 편지를 받은 그. 더이상 떨어질 나락도 없는데, 그들이 살려고 아등바등 대는데, 세상은 이들이 깃들 작은 공간이나마 주지 않는다.  


고시원 다닥다닥 붙은 방. 옆방의 소리만이 아니라 복도 걷는 소리마저도 다 들리는 그런 삶터. 그래도 그들은 노숙은 하지 않는다. 다만 하루하루 앞날을 내다보기 힘든 삶들이다. 지쳐 곯아떨어져야 하는 몸상태임에도 편히 쉴 수 없다. 모든 소리가 들리는 그런 곳에서 어찌 쉽게 잠이 들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곳에서도 사랑은 이루어진다. 숨죽여 사랑을 나누는 이. 그것이 묘한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제목은 절정인데, 그들의 삶은 바닥이다. 사랑조차도 숨죽여야 하는 그런 바닥. 이것이 바로 99%의 삶이다. 


'죽기도 어렵고 살기도 어렵다. 꿈을 꿀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꿈을 버리는 순간 노숙자로 전락할 게 두려울 뿐이다. 그의 손이 위로하듯 가만가만 성기를 조물락거린다. 김이 웃고 있다. 잘 지내게.' ('절정' 꿑뿌분. 328쪽)


이 소설집에 나란히 붙어 있는 '나의 아름다운 날들'과 '절정'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1%의 삶과 99%의 삶이 나란히 붙어 있다. 인생은 이렇게 복잡다난하다. 무어라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 그런 삶의 모습이 잘 드러난 소설이 '브라보, 럭키 라이프''핏줄', '즐거운 나의 집'이다.


무어라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삶들. 그런 삶의 모습들. 예전 유용주의 산문집 제목이 떠오른다.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그렇다. 이들은 살아간다.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온 아들을 20년 넘게 보살펴온 부모. 외국인 며느리가 마음에 들면서도 손자만은 자신들을 닮기를 바라는 할아버지, 한적한 전원생활을 꿈꾸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한 전직 기자들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복잡한 세상, 복잡한 삶이다. 한 사람의 삶 속에도 1%의 삶이 있고 99%의 삶이 있다. 우리가 1%의 삶만 보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 삶에 있는 99%의 삶을 껴안고 가야 한다. 


99%의 삶을 1%의 삶으로 바꾸어 가는 모습이 담긴 소설이 '천국의 열쇠' 아닐까 한다. 남들이 말하는 천국과는 다른, 그러나 분명 천국이 분명한 그런 장소.


이 장소를 자신만이 아니라 힘들어하는 이웃에게도 전해주는 모습. 힘든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모습. 그 점이 잘 나타난 소설 '천국의 열쇠'


천국의 열쇠는 1%의 삶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 열쇠는 99%의 삶에서 나옴을 이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밖의 소설들도 좋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 한편 한편이 좋아서 그냥 읽어보라는 말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


따스한 웃음을 머금게 하는 소설 '봄날 오후, 과부 셋'도 좋고, 이와 대칭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이번에는 할아버지 셋이 등장하는 '혜화동 로터리'도 무겁지만 무겁지 않게, 현대사의 슬픔이 녹아 있지만 삶 속에서 그를 녹여내 살아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읽으면서 99%의 삶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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