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의 사생아 IS 세미나리움 총서 30
마이클 와이스 외 지음, 이예라 외 옮김 / 영림카디널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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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IS라는 말이 언론에 자주 나온다. 도대체 IS가 뭘까? 하는 궁금증. 말 그대로 하면 '이슬람 국가'라는데, 이 이슬람 국가가 왜 문제가 되는가를 잘 알지는 못한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청소년(?)이 여기에 합류했다고 추정이 되기도 하는데, 언론에서는 이들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도하지 않는데도 이들의 세력이 줄기는 커녕 오히려 더 커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궁금증.

 

책 제목이 얼마나 선정적인가? "알라의 사생아"라니... 사생아라는 말은 적통이 아니라는 말이니, IS는 알라의 뜻을 제대로 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제목이 담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알라의 추종자들이라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제목인데, 이 제목에서부터 IS에 대해서 부정적인 관념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본래 원제목도 이랬을까? 책 속지를 보면 원제목은 이렇게 선정적이지는 않고, '테러 군대의 내부(ISIS:Inside the Army of Terror)' 정도로 번역될, 그냥 사실을 전달하는 제목일 뿐이다.

 

원제목은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으나, 번역본은 호기심을 유발하고 IS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갖도록 하고 있다.

 

내용은 여러 사건들, 인물들이 중첩되어 상당히 산만하게 전개된다. 나름 체계를 갖추어 편집을 했다고는 하나, 이슬람에 대해서, 또 지금 이슬람 내부의 갈등관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읽기에는 너무도 난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많은 종파들, 인물들, 사건들이 두서없이 나오는데... 이것들을 번역자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부분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종교가 우선시되는 신성국가를 표방한 것이 IS인데... 이들이 세력을 확장해가는 이유는 그 나라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제정분리시대에 제정일치를 주장하는 집단이 권력을 장악해 간다. 거기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유는 이제는 기본적인 권리가 되었다고 여기는 이 시대에 엄격한 율법을 지키도록 강요하는 집단이 세력을 확산한다... 무언가가 있다.

 

이들보다도 못한 집단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말이다. 이들보다도 못한 집단에게 고통을 당했기에, 그보다는 낫겠지 하는 맘으로 이들을 지지하기도 한단 말이다.

 

또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는 사람들이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폭력을 동반한 모험... 피끓게 하는 위험 등... 이를 경험하고픈 청춘들을 유혹하기도 한다고 이 책에서는 말하기도 하는데...

 

기존의 권력집단이 너무도 광포했기에 이들은 주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세력을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감옥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념을 급속도록 퍼뜨렸다고 하는데... 고통받는 사람에게 간단명료한 교리는 매력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IS에 대해서 알아본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그들의 기원이라든지, 지금 세력을 뻗치고 있는 지역이라든지, 갈등하고 있는 집단들의 모습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결국 인류를 전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종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인간을 행복하게, 평화롭게 해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했는데, 이 종교로 인해서 서로 죽이는 지경까지 나아갔으니...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에서의 전쟁도 전쟁이지만, 같은 종교 내에서 종파간에 일어나는 전쟁은 더 무섭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무엇이 종교의 역할인가? 우리는 종교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강 건너 불 구경 하듯이 그냥 남 얘기러니 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가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종교'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 책이다.

 

조금... 번역자가 이슬람에 대해서, 그 종파에 대해서, 또 IS의 변천과정에 대해서 해설을 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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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의 눈 - 서경식 에세이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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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경식의 미술 관련 책을 읽었다. 좋았다. 그림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 어쩌면 그림을 그림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서 세상을, 삶을 보는 그의 눈이 좋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한겨레 신문에 글을 연재한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읽었던 적도 있고, 그냥 넘어간 적도 있는데, 이 책은 그가 연재한 글들을 엮은 것이다.

 

신문이 그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를 시론(時論) 형식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치는 역할을 한다면, 책은 그보다는 조금 늦게 더 넓고 깊은 생각을 하도록 유도한다. 똑같은 글일지라도 어느 매체를 통해서 언제 읽으냐에 따라 글의 효용성은 달라진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서경식의 글이 신문에 실렸을 때는 그때 당시의 상황과 맞는, 또는 맞서는 글이었을테고, 그 때에 맞는 생각과 행동을 하도록 고무했다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나온 이 책은 시대의 한 상황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상황을 통해서 앞으로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디아스포라' 흔히 이산이라고 번역되는 이 말은 내부보다는 외부, 다수보다는 소수라고 생각하면 되고, '디아스포라의 눈'이라고 했을 때는 그래서 외부에 있는 소수자의 처지, 또는 내부에 있더라도 주류에 편입되지 않은 소수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이런 '디아스포라의 눈'이 왜 필요할까? 서경식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사를 '다른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한 개인이나 사회가 건전함을 유지해가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6쪽)

 

모두가 똑같은 방향에서 똑같은 높이로, 똑같은 것만 보는 사회를 상상해보면 그런 사회는 전체주의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은 숨막힐 수밖에 없고, 이런 사회에서 다른 생각은 곧 이단이 되어 버리고 만다. 사회에서 배제되어 버린다.

 

하지만, 이런 사회일수록 자신들이 획일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그 사람이 바로 '디아스포라의 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고, 서경식은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자이니치라고 한다) 조선인이고, 그의 형인 서승과 서준식은 우리나라에 유학왔다가 간첩단 사건으로 감옥생활을 했고, 그는 형들로 인해 우리나라에 유학올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는 배제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내부에 속해 있지만, 외부에서 소수자의 시선으로 사회를 볼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시선으로 읽는 사회가 우리들의 사회에 대한 시선을 교정해주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이 책에는 일본과 한국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일본과 한국에 걸쳐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국과 일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기 때문인데... 어쩌면 우리는 일본의 뒤를 쫓아가고 있다는 그의 우려 때문인지도 모른다.

 

많은 면에서 우리는 일본을 뒤따라가고 있는데, 싸우면서 닮아간다고 해야 하나, 일본이라는 아주 좋은 거울이 있는데, 그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고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거울 속의 모습에 자신을 맞추려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책의 끝부분 발문에서 한홍구가 서경식을 가리켜 비관주의자라고 한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우리가 일본을 따라가면 안된다고, 일본의 우경화를 따라가면 안된다고 많이 걱정했는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그의 걱정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이 책은 3년이라는 시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유효하다. 우리에게 생각할거리를 많이 제공하고 있다.

 

과거의 사건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서 현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런 활동을 통하여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신문에 실렸을 때 느꼈던 점과는 다른 점들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눈... 내부에서, 주류의 시선으로 볼 수도 있지만, 외부에서 소수자의 시선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 점이 우리 사회를 더 좋은 쪽으로 바꾸게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를 보는 또 하나의 눈이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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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클라시커 50 19
마리 자겐슈나이더 지음, 이온화 옮김 / 해냄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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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장 공정한 직업이 재판관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외부의 압력이든, 자신의 편견이든, 그러한 것에 빠지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판단을 내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재판관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물론 이것은 재판관에 대한 이론적인 생각이다. 현실에서는 재판관도 사람인지라 실수도 하고, 자신의 편견을 판결에 작동시키기도 하고,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기도 한다.

 

또 시대의 한계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는 재판관들이 과연 독립된 판단을 하는가, 공정한 판결을 하는가에 의문을 제기하는 판결이 여러 건 있었다.

 

대법관 임명에서도 문제가 되기도 하고, 권력을 쥔 자들이 압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뒷돈이 오고가기도 하고, 이데올로기의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하고...

 

그래서 법원의 신뢰가 많이 떨어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검찰에 대한 신뢰는 거의 바닥 수준이지 않나 싶다. 변호사라고 다를 것도 없고, 판사들에게는 조금 기대하는 것도 있지만, 거기서 거기라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도찐개찐"인 상태이지 않을까 싶은데...

 

재판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솔로몬"과 "포청천"이다. 서양에서 지혜로운 판결의 대명사로 '솔로몬'을 들고, 중국에서는 '포청천'이란 인물이 드라마로 만들어져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이 둘에게는 공평무사가 기본 원칙이었는데... 클라시커 50 시리즈 "재판"을 읽다보니, 참으로 재한은 공정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재판관은 권력을 무시할 수가 없다. 삼권분립 시대 이전에는 권력자가 임명했기에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삼권분립이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그들이 완전히 권력에서 독립해 있지는 못하다.

 

그러니 권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권력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내리기 일쑤다. 이것이 아마도 중세시대의 '마녀 재판'에 해당할 것이고, 프랑스의 '드레퓌스 재판'에도, 또 소련에서 이루어진 공개재판에도 해당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50가지 재판의 사례를 통해 과연 재판은 정의로운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이 50가지 사례들을 보면 재판은 절대로 정의롭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둑맞은 왕들의 계곡'이라는 도굴꾼에 대한 재판에서 시작하여 '성폭행범들아, 우리가 너희를 잡겠다'는 유고 전범재판까지 50개의 재판 사례를 들어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지금 사법권력으로 우리들의 문제해결을 넘기려는 이 시대에 경고를 보내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든다.

 

읽으면 읽을수록 재판이라는 것이 여러 변수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이 책의 재판 사례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의를 실현한 재판도 있다. 사실, 재판의 일차적 기능이 정의실현일테니, 세계적인 재판 50개 중에 정의를 실현한 재판이 그렇지 않은 재판보다 적은 것이 벌써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하여 이 책은 재판을 '권력과 양심의 파워 게임'이라고 하고 있다. 이 파워 게임에서 어느 쪽이 우세한가에 따라 재판은 정의를 실현할 수도, 실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자 하는가? 정의가 실현되는 재판이 되기 위해서는 양심의 힘이 권력의 힘을 누를 수 있도록 깨어 있는 시민의 힘을 지녀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삼권분립 시대... 그래도 재판이 공정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양심있는 사람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양심의 힘이 발휘될 수 있도록, 우리들이 공화국의 시민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이 더 다가오게 만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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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보수시대 - 미처 몰랐던 징후들
신기주 지음 / 마티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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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장기 보수 시대로 접어들었다. 단순히 보수 정권이 몇 차례 집권하게 될거란 얘기가 아니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보수화가 진행되고 있단 말이다.'(6쪽)

 

'200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두 번의 보수 정권은 구조적 보수화가 낳은 정치적 결과물이다.'(6쪽)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나라가 이미 장기 보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분석, 그리고 그런 징후들이 예전부터 나타났다고 하는 글로 이 책이 채워져 나간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장의 구멍들, 퇴행하는 사회, 기울어진 미디어, 속물스러운 정치"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장기 보수 시대는 결국 경제가 중심이 된다. 먹고 살 만해진 사회에서 어떤 삶을 누릴 것인가가 문제가 되는데, 자신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집단이 사회의 중추를 이루면서 혁명은 불가능한 시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경제부터 시작한다. 우리나라 경제를 재편할 수 있었던 시기에 하지 못했던 결과 결국 시장에 정치의 힘을 빼앗기고 말았다는 이야기. 그런 경제를 우리가 아무리 비판해도, 공약으로 '경제민주화' 운운해도 불가능하다는 얘기.

 

권력의 중심이 시장으로 넘어갔는데, 어떻게 정치가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단 말인가. 경제에 따라 휘둘리는 것이 정치고, 정치인들은 재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된 현실. 결국 경제적 동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니 우리 사회는 앞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자기 것을 지키려는 세력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고, 이런 현상은 사회 전체를 퇴행시킬 수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들에 대해서 이런 현상들이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움직임을 가로막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중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결국 '사다리'고, 그 사다리의 위를 차지하고 있는 '서울대' 문제임도 잘 보여주고 있다.

 

현대 과학기술의 집약판이라고 할 수 있는 우주 로켓 개발조차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존재하게 만드는 사회에서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는 미디어다. 이미 정권의 입맛에 맞춰진 미디어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지 못하게 한다.

 

주어진 사실만 방송한다고 하면서 사회의 보수화에 일조하고 있다. 그렇게 미디어의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그런 미디어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 속물스러운 정치를 이야기하는데... 이는 국민을 바라보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면 권력을 잃는 그런 우리나라 정치 현실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다.

 

대통령 중심제이지만,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회를 장악하려 하고, 국회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이익이 아닌 정치인들의 이익을 실현시켜 주어야 한다는 그런 퇴행, 속물 정치.

 

이것이 정도전을 이 책에서 끌어들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왜 실각할 수밖에 없었던가. 그는 국민을 바라보는 정치를 꿈꾸었지만,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킬 정치를 꿈꾸었다는 것.

 

정치의 중심은 무언가 이익을 지니고 있는 기득권세력일 수밖에 없는데, 그들에게 등돌린 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정치인들을 비판하지만, 정치인들이 지닌 속성을 정도전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제 이익들을 위해서만 그렇게 피튀기게 싸우고, 그런 이익을 위해서는 여당이건 야당이건 힘을 합치는지,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 책의 마지막 두 장에서 잘 보여주고 있단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사회는 '장기 보수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걸 인정하자는 거다. 인정하면 무엇이 좋을까? 정치나 경제나 모두가 다 우리의 행복을 목표로 하지 않나.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떤 정치가, 어떤 경제가 좋으냐를 생각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장기 보수 시대'에서 행복찾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의 끝부분에서 잠시 언급하고 있다.

 

이제는 정치 혁명, 경제 혁명이 아니라 '문화 혁명'이 필요하다고. 그런 '문화 혁명'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고.

 

문화 혁명조차 이루지 못하면 장기 보수 시대는 지속되리라고...

 

'21세기 한국에서 가능한 건 68혁명 같은 문화 혁명이다.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를 성숙시키는 혁명 말이다.'(261쪽)

 

성숙한 자본주의... 이미 세계의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런 혁명부터 이루자고, 그것이 우리의 행복찾기라고...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생각해 봄 직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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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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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무척 유행했던 책이다. 그때는 당연히 우리 사회가 '피로사회'인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하면서 읽지 않았던 책.

 

어쩌면 유행처럼 한 책이 번지는데 대해서 일종의 거부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또 그런 시류에 참여한다는 일이 '피로'하게 여겨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내가 생각하는 '피로'와 다르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쳐 떨어짐, 무언가 하고 싶어하지 않음, 무관심으로 생각했던 '피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달로 사람들을 성과주의로 몰아가는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용어로 '피로'가 쓰였다는 것이다.

 

이 책은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11쪽)는 말로 시작한다. 한 시대의 사회를 규정하는 질병이 있다는 얘긴데, 지금 시대의 질병은 면역체계를 건드리는 질병이 아니라, 풍요의 질병, 지나침의 질병, 긍정성 과다의 질병이라는 것이다.

 

하긴 우리는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는데, 그런 풍요 속에서 오히려 부족함을 느끼니 그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신경성 질병으로 나타나고, 우리 사회는 이런 신경성 질병을 앓고 있다고 하는 말이 타당하기도 하겠다.

 

"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다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22쪽)

 

이렇게 넘쳐나는 사회를 활동사회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 때 활동이 긍정적인 의미라고 하기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수 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회, 무언가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강요하는 사회, 그럼에도 그 자기계발의 깊이는 없이 그때그때 활용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약물에 의존하는 도핑과 같은 사회라고 한다.

 

"활동사회라고 할 수 있는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사회로 발전해간다. ... 도핑은 말하자면 성능 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65쪽)

 

이런 사회가 어떻게 피로하지 않겠는가. 이런 사회에서 모든 책임은 개인이 지게 된다. 사회 문제를 개인화한다. 이 책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66쪽)

 

그러나 이러한 피로가 마냥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피로를 느끼는 사람은 쉴 수밖에 없다. 쉼, 그것은 자신의 몸을 떠나 사유를 할 수 있다는 얘기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빠르게, 빠르게 지나쳐 왔던 세상에서 한 발짝 물러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피로'다. 그런 '피로'는 긍정적인 힘으로 작동한다. 그는 일허게 말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이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 (72쪽)

 

이때 '피로사회'의 사람은 비로소 '주권자'가 된다. 물론 그는 주권자이자 희생자이다. 그 둘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그것이 바로 성과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 책의 부록이라고 할 수 있는 '우울 사회'에서 그는 이 점을 '호모 사케르'라는 용어를 빌어 이야기한다.

 

"성과사회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의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 성과사회에서도 주권자가 호모 사케르를 낳고 호모 사케르가 주권자를 낳는 역설적 논리가 성립한다." (110쪽)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보면 우리는 주권자가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우리는 호모 사케르로만 존재하고 있지 않았는가.

 

하여 세상과 자신을 보는 눈을 갖지 못하고 그냥 '피로'에 지쳐 나가떨어져 있기만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더 달릴 곳도 없는데... 잠시 멈춰야만 하는데도 말이다. 이제는 멈출 줄 알아야 한다. 멈춰서 자신을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호모 사케르로 지내왔다면 이제는 주권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피로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피로사회'는 '성과 사회'다. 성과 사회는 경쟁만을 이야기하는 사회다. 그것이 굳이 남을 적대시하지 않더라도 이미 남은 내 내면에 들어와 있다. 나는 남을 내면화해서 책임을 나만이 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성과 사회, 피로 사회를 벗어나야 한다. 일 덜하기 운동, 일자리 나누기 운동, 저녁이 있는 삶, 기본 소득 논의 등 많은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것은 이제 '피로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호모 사케르'에 머물지 않고 '주권자'가 되기 위한 행동인지도 모른다.

 

그런 행동을 통해서 사회는 변할 수 있기도 하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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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5-01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과지상주의에 대한 일침이었더군요 ...

kinye91 2015-05-02 07:20   좋아요 1 | URL
미래 세대들이 성과지상주의 사회에서 살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