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이라는 유령 - 우리는 왜 4차 산업혁명에 열광하는가
김소영 외 지음, 홍성욱 기획 / 휴머니스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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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어떤 것에도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붙였다. 이제는 그렇게 시대가 바뀌었다고, 뒤쳐지면 안 된다고...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야 한다고, 교육도, 경제도, 사람도...

 

그런데 그렇게 호들갑을 떤 지 몇 년 -아마도 2016년부터 이 말이 유행이 되기 시작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 지났는데, 뭐가 달라졌는지 잘 모르겠다. 여전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을 뿐이다.

 

하루만 지나도 확확 바뀌는 이 시대에,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나온 지가 2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그냥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해야 한다든지, 그런 시대에 맞는 일자리, 또는 사람을 양성해야 한다는 말만 나오고 있다.

 

그만큼 실체가 없다. 무엇이 4차 산업혁명이지?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지?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추상적이다.

 

그냥 그 시대에는 일자리가 많이 없어질 것이고, 기계가 또는 인공지능이 일을 대부분 할 것이기 때문에 엄청난 실업자가 생길 것이며, 과학기술이 뒤떨어진 나라는 도태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더 살기 힘들어지는 것을 '혁명'이라고 하나? '혁명'이라는 말 속에는 사람들의 삶이 더 좋아진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 아닌가?

 

일자리가 줄어든다? 그렇다면 여가 시간이 더 생겨서 다른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하는데, 실업자가 생기고 비정규직이 더 늘어난다면 그것이 어떻게 '혁명'이 될 수 있나?

 

성장, 성장만을 외치며 앞으로 달려오기만 했던 전세계에 어쩌면 사람들이 이제는 성장이 아니라 분배에, 일보다는 여가를 더 누릴 수 있는 세상, 그것이 바로 '혁명' 아닐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발전, 그것을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하면 그 혁명에 대해서 우리가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닌가 보다. 뒤쳐지면 안 된다고 언론, 정부에서 계속 강조를 하는 것을 보니... 결국 이것 역시 부가가치를 창출하여 다른 사람들의 삶을 마이너스(-힘들게)로 몰아가면서 자신들이 플러스(+풍요롭게)가 되도록 하는 방향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지구촌이라는 지구에서도 마찬가지. 뒤쳐지는 나라는 더 살기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오기 때문에 4차 산업혁명 운운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유독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인다고 한다.

 

다른 나라들도 변화를 추구해야 함을 인정하지만 우리나라처럼 그렇게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뭔가 이상하다? 왜 우리나라만? 이 책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요란한 구호들이 과거에도 있어왔음을...

 

박근혜의 창조경제나 문재인 정부에서 말하는 4차 산업혁명이나 그렇게 다르지 않음을, 또한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박정희 정권 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위로부터 추진되는 일들이 내실을 다지기보다는 결과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고, 이것은 과학기술의 발전보다는 이윤을 중심으로 정책을 펼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본적인 과학이 발전하지 않고 오로지 기술만 발전하는 형태가 된다는 것. 4차 산업혁명이라 이름하든 다른 이름을 쓰든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토대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는 것. 과학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 없이는 자체 발전은 힘들다는 것.

 

이제 우리나라는 서양을 추격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어야 하는데, 4차 산업혁명 논리는 결국 서양 추격논리에 불과하다는 것. 이런저런 점을 고려하건대, 4차 산업혁명을 주장하는 논리가 사회 전체의 발전, 이익으로는 가지 못한다는 것을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 '유령'이라고 하는 거다. 아직은 제대로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는데, 그냥 언론에서 떠들어대고, 정부는 이것을 받아 이렇게 하겠다는 구체적이지 않은 정책을 남발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지적.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 사회가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정책을 펼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에서부터 시작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조금 시일이 지난 책이지만 읽어보면서 생각해 볼 것이 많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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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 - '정체성'이라는 질병에 대하여
김철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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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에 그리 편한 책은 아니다. 문학평론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역사책도 아니고, 철학책도, 시류를 비판하는 책도 아니고... 어떤 쪽으로 분류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말이 솔직하다.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도 이 책을 도서십진분류표에 따라 어디에 포함시켜야 할지 잘 모를 때가 많은데, 그 책 속에 여러 내용이 들어있을 때는 더 그렇다.

 

책을 쓸 때 저자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쓴다. 목적이 없더라도 글이 자신에게 왔다고 하는 저자들이 있더라도, 대개는 어느 한 분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분야, 저 분야에 모두 속하는 책들이 나올 수 있다. 아니 나와야 한다.

 

세상 일이 그렇듯이 어느 한쪽으로 반듯하게 잘리는 일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참 다르게 이해되기도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 편향을 우리는 거부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 편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것도 한사코... 나는 불편부당한 사람이라고, 내 글은 불편부당하다고, 공정하다고 주장한다. 마치 자신에게 여러 편향이 있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 공정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양, 글도 마찬가지로 가치가 떨어지는 양 그렇게 여기게 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느 한쪽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도 어느 한쪽에 고정시키려 한다. 이 때 동원되는 것이 바로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되는 존재들이다. 그런 존재들을 반대 편에 놓음으로써 자기 자리를 마련한다.

 

봐라, 난 이 쪽에 있다. 저들과 다르다. 이렇게 자신을 자리잡게 하기 위해 상대를 설정한다. 특히 이 상대는 자신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다. 자신보다 못한, 아니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역시 자기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존재들을 끌어들인다.

 

이들을 이 책에서는 비체 -非體-(앱젝트abject) 라고 한다. 온전한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 쓰레기가 되는 존재라고 한다. 이들을 자기 바깥에 규정함으로 자신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제목이 의미하는 바다.

 

'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 이라는 말은 그래서 더러운 것, 즉 내가 배제해야 할 것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나를 규정하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우리를 지킨다는 말을 '정체성'이라고 하면 이런 정체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존재가 필요하다.

 

내 '정체성'은 긍정적이고 도덕적이고 올바름이고 정당성이 있다. 그런데 '정체성'이란 상대를 전제하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내가 긍정적이고 도덕적, 올바름, 정당성이 있으려면 상대는 이 반대에 있어야 한다.

 

상대는 나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으면 안 된다. 이런 존재가 앱젝트(비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쉽게 이런 존재들을 찾아낸다면 바로 '빨갱이, 친일파'일 것이다.

 

제목이 되는 글은 바로 이런 논의에서 나왔다. (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오지 않은 '전후 戰後')

 

차분히 읽어보면 수긍이 가는 면이 많다. 우리를 하나로 묶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비체들을 동원했는지, 그것에 대한 깊은 생각 없이, 즉 나는 나라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나 역시 복잡한 여러 존재들이 섞여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나를 우리와 묶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길이 바로 내가 무시할 수 있는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정체성' 논의는 우리가 비판하는 파시즘과 맥락을 같이 할 수 있다. 국가주의가 문제라고 하지만 '정체성'을 추구하다 보면 자연스레 '국가주의' 논리에 함몰될 수 있다.

 

결국 '네 칼로 너를 치리라'라는 말은 같은 논리로 상대를 비판한다는 말이다. 굳이 니체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괴물과 싸우는 이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데, 네 칼로 치다보면 자연스레 자신도 같은 처지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상대를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상대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상대에게 모든 것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 내 안에 있는 또다른 나를 보는 것, 철저하게 나를 인식하고 상대에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

 

상대를 비판하기는 쉬운데 자신을 돌아보기는 힘들다. 내 밖에 있는 적을 상정하고 적을 공격하기는 쉽다. 그러나 적을 공격하는 자신이 적과 같아지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나 역시 '정체성이라는 질병'에 걸리게 된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 점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한다고 한다. 단순하고 명쾌하게 분류하는 적과 나를 가르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이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한다. 당연하게 여기면서 더 고민을 하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 문제제기, 받고, 더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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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1 1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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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1 14: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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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1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명절연휴 잘 보내시고요 맛난거 많이 드십시오^^ㅋ

kinye91 2019-02-01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카알벨루치님도 명절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 - 여성과 아동, 소수자를 외면하는 일상의 디자인을 고발하다
캐스린 H. 앤서니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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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은 꼭 필요하다. 자칫하면 내 잘못이야 하고 개인의 잘못으로, 개인의 능력부족으로 여기고 좌절할 수 있는 문제를, 개인이 아니라 공간의 문제라고, 제도의 문제라고, 그것을 고쳐야 한다고 알려주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려고 해도 지속적으로 내가 접하는 공간이 나에게 차별을 가한다면? 그때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능력이 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공간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이 책에는 왼손잡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대다수 디자인된 것들이 오른손잡이를 대상으로 만들어졌기에 왼손잡이들은 많은 불편함을 견뎌야 한다. 이런 불편함이 학교에서는 학습능력 저하로도 연결될 수 있음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디자인의 문제... 그냥 문제로 끝나서는 안 된다. 책의 말미에 저자는 처칠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꼭 처칠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가 이미 몸으로 겪어서 알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건물을 빚고, 나중에는 우리가 만든 건물이 우리를 빚는다." (385쪽)

 

이런 사례로 여자 화장실 문제를 들 수 있다. 이 책에는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 후보로 나와 토론회를 할 때를 들고 있다. 토론을 하다가 쉬는 시간이 되어 각 후보들이 화장실에 갈 시간이 되었을 때, 꼭 늦게 나타나는 사람은 바로 여성인 힐러리 클린턴이었다는 것.

 

왜냐, 남자 화장실보다 멀리에 배치되어 있었을 뿐더러, 여자 화장실은 멀고 찾기 힘들고 숫자가 적어서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러리 클린턴은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하지 못했다는 것.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것이 힐러리 클린턴의 게으름 때문일까? 이것은 디자인 문제다. 구조와 제도 문제인 것이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여성에게도 이런 차별이 적용되고 말을 하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더한 차별을 받아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여성 화장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고치려고 실천해서 비율을 2:1로 하는 법안도 마련했다고 한다. 일률적인 비율이 아니라 수요에 따른 융통성 있는 비율로 역차별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디자인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고. 우리나라도 여성 화장실을 늘리려는 운동이 있었는데, 아직은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새로 짓는 건물들은 여성 화장실에 대해서 고려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① 공중화장실등은 남녀화장실을 구분하여야 하며, 여성화장실의 대변기 수는 남성화장실의 대ㆍ소변기 수의 합 이상이 되도록 설치하여야 한다. 다만, 행정안전부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개정 2013. 3. 23., 2014. 11. 19., 2017. 7. 26.>)

 

이 책은 그런 침묵할 수밖에 없던 사람들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해주고 있다고 해야 하나? 사회가 진보한다는 것은 소수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인데...

 

기술이 발전하면서 대다수가 편리한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여기에 디자인의 함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 디자인의 함정을 알고 고치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몫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결론 부분에서 자신이 지적한 사항들을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지 행동 방법을 이야기 하고 있으면서 이렇게 끝맺고 있다.

 

우리의 권리를 알고 살자. 디자인은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지만 디자인에는 우리의 삶을 변질시킬 힘도 있다. 좋든 싫든 우리는 매일 디자인에 의해 차별당할 수도 우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디자인에 의해 정의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디자인은 변화를 만들지 않는다. 변화는 사람이 만든다.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장착한다면 변화는 우리 손에 있다. (386쪽)

 

참 많은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 우리가 생활하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몇몇은 이미 심각성을 알고 있었지만 처음 접하는 것들도 있었다.

 

가령 아동보호 차시트... 이것을 미국에서는(우리나라 사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나라가 미국보다 좋은 제도를 지니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정면 충돌 시험만 한다고 한다. 차가 정면 충돌만 하는 것도 아닌데... 아이를 차시트에 앉혀도 측면이나 좀더 빠른 속도에서 정면 충돌이 일어나면 아이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측면 충돌 실험도 해야 하고, 속도도 더 높인 실험을 통과한 차시트를 판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여기에 더해서 병원 문제를 짚고 있는데, 응급실, 노인을 위한 응급실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 병실의 개선도 필요하고, 이런 문제는 꼭 환자들만이 아니라 의사나 간호사들에게도 병원 디자인이 폭력이라는 것.

 

소방관들은 어떤가? 남성들이 대다수였기에 여성 소방관은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소방서 구조라는 것, 참... 반대로 남성 간호사들은 어떤가?

 

여기에 한 가지 더. 아, 그래 맞아 하고 맞장구를 치게 했던 지적... 연설할 때 원고를 올려놓는 연단. 세상에 무겁기는 왜 그리 무겁고 높기는 왜 그리 높고, 어떤 것은 사람을 가리기도 하는, 신체의 다양성을 완전히 무시한 연단의 획일성.

 

이것을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게 하고, 원고나 노트북을 놓을 수 있고, 또 여성들은 가방을 놓을 공간도 만들어 놓은 연단을 만들었다는 것. 작은 부분 같지만 이것들이 해결되면 성평등에 한발 또 신체 평등에 한발 더 다가가게 된다는 것. 그렇다. 평등은 큰부분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평등은 우리가 살아가는 아주 작은 부분들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화장실에 가방이나 물건을 놓을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 버스나 대중교통의 의자를 개선하는 것. 아이들이 자연을 쉽게 만날 수 있게 해주는 학교 건물을 디자인 하는 것,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도로 환경을 만들어놓는 것, 걷고 싶은 계단을 만드는 것.

 

계단을 이 책에서는 좋게 평가하고 있다. 사람들을 걷게 만들기 때문에 근력 운동에도, 또 비만을 줄이는 데도 기여를 한다고 한다. 다만, 계단을 사람들이 접근하기 편하게 또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에서.

 

어떤 계단은 오히려 관절에 무리를 주거나 넘어질 위험이 있다. 이런 계단을 정비하는 것도 소수를 배려하는 디자인일 것이다.

 

이 책이 지닌 장점은 문제점만 나열하지 않고, 대책을 제시하고, 이미 대책을 만든 곳이 있다면 소개해서 따라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는 데 있다.

 

아무 생각없이 생활하고 있는 공간이 여성과 아동, 또 신체가 보통에서 벗어난 사람들, 소수자들을 외면하고 그들을 배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하고 있다. 작은 부분, 그런 부분에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디자인, 그런 디자인이 도입되도록 하는 것. 결국 모두 사람의 몫이다.

 

깨어있는 사람들. 나만 편하면 돼가 아니라, 어, 이건 누군가에게 불편할 수 있겠네... 또 왜 이것이 나한테 불편하지? 나만 그런가? 나만이 아니라 누군가도 불편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고쳐야지 하게 하는 책. 그런 책이다. 이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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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14: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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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3 11: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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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 - 인간은 언제 괴물이 될까
오노 슌타로 지음, 김정례 외 옮김 / 에스파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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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를 명확히 하고 넘어가자. 프랑켄슈타인은 분명 괴물이 아니다. 그는 괴물을 창조한 인물이다. 이렇게 지적을 하면 이상하다. 왜 괴물을 창조했을까? 괴물을 창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창조자는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좋은, 훌륭한, 완벽한, 쓸모있는, 아름다운 등등의 수식어가 붙기를 원한다. 창조자는 결코 괴물이라는 이름이 붙는 피조물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다.

 

성경을 보더라도 태초에 인간을 창조한 신은 만족한다. 물론 그 다음에 인간이 창조자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성경은 그래서 이런 괴물에 대한 이야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성경을 건드리지 않는다. 성경에서 괴물에 해당하는 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기 때문이다.

 

괴물을 이상한, 무섭고, 위험하고, 힘이 세고, 말이 안 통하는 등등의 수식어가 붙은 존재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괴물이라고 하는 말을 쓰는 것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존재라는 뜻으로 이 책에서는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즉, 괴물은 블랙박스와 같은 존재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 우리가 쉽게 알 수 없는 존재.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을 본래 잘 알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우리 인간이 아무리 괴물처럼 행동하더라도 괴물로 취급하지 않는다. 같은 종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다. 그러니 논의를 인간을 제외하고 시작하도록 하자. 이 책은 그렇게 인간을 제외하고, 인간이 창조한 피조물로부터 시작한다. 누구부터?

 

바로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피조물로부터 시작한다. 프랑켄슈타인은 또다른 인간을 만들어낼 욕심에 창조에 몰두한다.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다. 자신이 흉측한 존재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겉모습은 분명 흉측하다. 그런데 우리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도 되나?

 

겉모습을 그렇게 흉측하다고 표현한 것은 피조물이 어떻게 행동할지 전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자신이 창조했지만 피조물은 자신과는 다른 존재, 자신이 알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여기에서 공포가 나타난다.

 

공포가 나타나면 내가 알 수 없는 존재는 괴물이 된다. 이제부터는 함께 할 수 없는 퇴치해야 할 존재다. 그런 존재가 이 책에서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낸 피조물부터 시작해서, 하이드, 투명인간, 드라큘라 등이 등장한다.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또는 인간의 욕망이 극한으로 표현된 것이든 이들은 괴물로 등장하고, 이들은 퇴치의 대상이 된다.

 

결국 이런 인간의 행위들이 올더스 헉슬리가 쓴 역설적인 '멋진 신세계'에 이르게 된다. 완벽하게 통제된다고 여기는 사회, 이 사회에서 괴물은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이런 사회에서 괴물은 바로 인간이 된다. 인공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존재, 통제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괴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괴물을 안고 산다. 우리 인간 자체가 이미 통제를 벗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는 노래 가사 또는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노래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고 산다.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불안감이 생긴다. 이 불안감을 극도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괴물에 관한 이야기다. 괴물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가 괴물이 아닐 수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이런 심리적인 면을 넘어서 왜 괴물 이야기가 우리에게 나타났는가, 괴물이야기가 지닌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가까지 추구하고 있다. 뒷부분에서는 스필버그의 영화까지 언급하면서 우리가 괴물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지가 꽤 오래 되었다. 그러나 괴물에 대한 통제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괴물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알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을 괴물이라고 여기고 그 존재를 없애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 우리는 모르는 존재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우주인을 상상하면서 두려움에 빠지기도 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적'들을 미지의 존재로 가정하고, 퇴치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행동하게 된다. 그들을 우리와 같은 존재로 여긴다면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는.

 

그래서 '테러'에 대한 영화 이야기도 이 책에 나온다. 다른 존재를 어쩌면 괴물로만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프랑켄슈타인을 읽어보면 피조물은 감성이 풍부하고, 공감 능력도 있는 그런 존재다. 다만, 그 외모로 인해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공감에서 배제된 존재, 그 존재는 괴물이 된다.

 

로봇... 복제인간... 자, 우리는 또다른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들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들을 괴물로 여기고 퇴치하려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와 같은 존재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 책은 이 질문을 계속 하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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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7 1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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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7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정기석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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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스위스에서는 전국민에세 기본소득을 주자는 법안을 두고 국민투표를 했는데, 부결되었다. 76.7%가 반대해 부결되었다고 한다. (43쪽)

 

'현상 유지'를 선택한 스위스 국민들이 반대한 이유는 높게 책정된 기본소득 금액, 재원 마련의 불확실성 등이었다. 무엇보다 사회보장 제도를 기본소득제로 대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문제도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43쪽)고 한다. 여기에 아마 놀고 먹는 베짱이들이 많아질 거라는 생각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베짱이들이 내내 놀지는 않는다. 또 이들의 놀이가 우리들 삶을 더 풍요롭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일은 아직은 이른가 보다. 그렇다면 범위를 좁히자. 마을 단위로 할 수도 있고, 직업 단위로 할 수도 있다. 아니면 연령 단위로 할 수도 있고.

 

전체에게 기본소득을 주자는 제도는 부결되었지만 일부에게 기본소득을 주자는 주장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고 또 실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청년배당이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기본소득제가 실시되고 있기도 하다. 이것을 좀더 확대하면 이 책 제목처럼 된다.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우리들 삶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농민들이다. 가장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농민들이 쌀값을 인상하라고 시위도 하고 그랬는데...

 

농민들의 한 해 소득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 소득에 비해 한참 모자란다. 또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살기도 힘들다. 이들은 농업 외 소득으로 자신들의 생계를 지탱하고 있다. 생활이 아니라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농민들이 많다.

 

그러니 젊은이들을 농촌을 떠나게 된다. 농촌에는 노인들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 인구의 고령화 현상도 심각하지만 농촌은 이미 그 임계점을 넘어섰다. 환갑이면 청년회에 들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수입은 적고 나이는 많아지고 편의시설은 부족한 곳이 바로 농촌이다. 이런 농촌에서 그래도 먹을거리를 생산해내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 덕에 먹고 사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당연히 그들도 잘 먹고 살 수 있도록 우리가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 중 가장 기본이 기본소득이다. 처음부터 모든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주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조세저항부터 시작해서, 많은 반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순서를 밟아가면 된다. 어차피 예산은 실행할 의지가 있으면 마련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3단계를 제시하는데... 대략 이야기하면 병역특례를 비롯한 처음 농사를 시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 하위 30%와 만 65이상 노인에 대한 지원 -> 농민 전체에 기본소득. (137쪽 표 참조)이런 단계들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구체적인 정책 대안이 아니라, 농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지니는 일이기 때문이다.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당연하게 여겨지면 그때부터 제도를, 구체적인 시행 방안을 찾아도 늦지 않는다. 아니, 지금 기본소득에 관해서는 상당히 많은 논의가 되어 있으니, 공감대만 형성된다면 시행은 금방 일어날 수 있다.

 

농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주어야 하는 이유는 농민들이 있어야 우리들이 살기 때문이다. 우리들을 살게 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존재가 농민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라지면 우리들 삶도 힘들어진다.

 

그들만 좋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좋게 하자는 것이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주자는 주장인 것이다. 바로 내가 잘살기 위해서는 농민들이 잘살아야 한다는 것.

 

너무 힘들면 이것부터 실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병역특례로 농촌에서 일하는 방법은 지금도 있다고 하니, 이제 실시할 '대체복무'를 농촌에서 하게 하는 것은 어떨까? 이들이 2년반이나 3년 농촌에 머무르면서 노인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 농촌에 사람도 있게 되고, 이들과 함께 할 사람들도 농촌에 머무를 수밖에 없으니 농촌에 소비도 조장이 될 것이고, 또 이들 중에 농사의 중요성을 깨닫는 사람이 있으면 - 대체복무자들은 양심에 따라서 폭력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니, 이들은 천성적으로 농업에 매우 친숙할 테다 - 농민으로 머무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대체복무를 교도소에서 하게 한다던데, 그보다 더 비폭력적이고 생산적인 곳이 바로 농촌 아닌가 하는 생각, 또 농촌을 살리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이 필요하고, 이것에 더해서 다른 것도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 이 책에 그런 것들이 나와 있으니 이를 더 구체적으로 실행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그냥 웃으며 지나칠 수 없는 주장이다. 많이 생각해 봐야 한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잘 읽었다. 기본소득은 앞으로도 우리 사회에서, 정치권에서 계속 쟁점이 될 것이다. 쟁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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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9 13: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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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9 16: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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