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혼'.  혼을 부르다. 지금 이 세상을 떠난 존재를 다시 불러오는 일. 


   혼을 다시 부르는 일은 현실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혼이 현실을 인정하고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정희 장시집을 읽으면서, 우리 가락의 우수성을 한 유산으로 활용하고 싶었다(시인 후기. 175쪽)고 말하고 있는데, 굿의 형식으로 쓴 시들이 이 시집에는 많다.


  이렇게 쓴 시들에는 우리 현대사의 사건들이 등장하고, 그 사건들을 통해서 무언가 한을 풀어야 한다는 의식이 개입하고 있다고 보는데...


  시들이 4.19나 6.25 또는 독재 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이 시들에서 고정희가 우리들의 한을 풀어주려 했는데...


혼을 부르는 일은 단지 혼이 이곳에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혼을 부르는 행위를 통해 혼이 해결하지 못했던 응어리를 풀어주려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초혼'이라 함은 개인의 한이나 사회의 한을 푸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쉬쉬하고 감춰진 일들을 밖으로 드러내는 일 또한 '초혼'에 해당할 수도 있겠다.


이 시집에 실린 시 한 구절... 이 구절을 읽으면서 2017년 3월과 2022년 3월을 떠올렸으니... 이런 역사는 반복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우리가 혼을 제대로 부르지 못했나 하는 생각도 드니... 그게 아니어야 하는데.                                                        


 '천구백칠십*년 시월 그날을 / 우리는 '한얼'의 종지부라 적어두자 ' 천구백칠십*년 시월 그날을 / 우리는 한민족의 꿈이라 불러두자 / 천구백팔십년 모월 모일을 / 우리는 우리들의 죽음이라 전해주자' (고정희, '그 가을 추도회' 중에서 76쪽) 



몇 년 뒤 다시 혼을 부르는 일이 없어야 할텐데... 혼들이 다시 오지 않게 이 사회가 명징해져야 하는데...


오래 된 시집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렇게 혼을, 신을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앞앞이 기원축수 받고 내리소서 / 앞뒤 가리지 말고 내리소서 /가타부타 하지 말고 내리소서 / 한반도 이땅에 절로 깊은 이들에로 내리소서 / 한반도 이땅에 절로 닫힌 문앞으로 내리소서 / 한반도 이땅에 절로 나는 탄식소리 / 한반도 이땅에 절로 오는 생이별 / 단번에 쫓으시려 내리소서 내리소서 / 기왕지사 인연맺은 아땅이기로서니 / 이번에 한번만 내리시기만 하면 /석삼년 병든 전답 옥답으로 일구고 / 석삼년 풍년들게 하겠나이다 / 석삼년 풍어제 바치겠나이다 / 석삼년 태평성대 바치겠나이다 / 막힌 물꼬 터주고 / 닫힌 항로 길을 내어 / 강줄기 바다가슴 어디서나 만나서 /수천대 이을 후손 기르게 하겠나이다 / 민주통일 후손 낳게 하겠나이다' (고정희, '그 가을 추도회' 중에서 90-91쪽) 


이렇게 다시 부르지 않도록... 이미 이루어지도록...그렇게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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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다. 내용도 간명하다. 분명하다. 할 말을 에둘러 하지 않고 하고 있다.


  시를 읽으면서 시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1부에서 생각하게 한다면, 2부와 3부에서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시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현대사를 통해 일어났던 일들. 부끄러웠던 일들을, 권력자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권력을 비판하는 관점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내용은 짧지만 서사가 있다. 쌍용자동차 파업에 대해서도,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에 대해서도, 세월호에 대해서도, 그리고 소위 폴리페서라고 하는 권력을 추구하는 지식인 집단들에 대해서도, 이 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서정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아니다. 서정이 어디 개인의 감정을 노래하는 데서 그치겠는가. 서정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느끼는 마음을 밖으로 표현한 것 아니겠는가. 


함께 느낌. 함께 생각해 봄. 이 시집은 그 점을 생각하게 한다. 사회와 동떨어져 살 수 없는 인간이라면 사회 속에서 삶을 잘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시를 읽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공명을 얻기 위해서 아니던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일. 


가령 이런 표현이 있다. '땅에 깃들지 못한 자 / 오욕의 삶을 등에 메고 하늘로 오른다 // 디딜 땅이 없는 자 / 비바람 피할 길 없는 굴뚝에 둥지를 튼다'('굴뚝' 1, 2연. 68쪽)


사람이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하는 땅, 그러나 떠밀려 하늘로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들의 소리를 알리기 위해서. 그들이 그곳에서 내려오는 일. 결코 쉽지 않다. 그들의 소리를 듣는 일. 저 위에 있는 권력자들은 하지 않는다.


소리는 땅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그들의 몸이 다시 땅으로 내려오면 권력자들은 그들을 가둔다. 그렇게 사람들의 소리를 가두려 한다. 


하지만 가둘 수 없다. 눈귀가 밝고 결코 입을 다물 수 없는 시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채형복의 이 시집처럼 말이다.


지금, 말을 가두려는 집단이 있다. 말을 가두겠다는 오만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말을 가둘 수 없음을 알텐데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으니... 앞으로 시인들, 더 바빠지겠다.


갇히려는 말들을 구출해야 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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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gial 2023-10-20 1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대를 반영하는 시인이군요.
68쪽 구절은 마치 80년대의 시구 같습니다.
역사계에서 지금을 분서갱유라 비판하는 글을 봤습니다. ( https://m.khan.co.kr/article/202310182010025 )
서늘한 때입니다.

kinye91 2023-10-20 14:49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역사가 반복이 되면 안 되는데... 서늘한 때 맞습니다.

그레이스 2023-10-22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 제목이!!!

kinye91 2023-10-23 15:39   좋아요 1 | URL
사실 저는 시집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읽었어요. 시집 앞부분이 시와 시인에 대한 시들인데, 그 중 한 구절이더라고요. 제목도 서늘해요. 참.
 

  어른이 된다는 것. 삶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많은 것을 잃고, 잊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만 지니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꿈을 잃는 과정, 이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면, 이런 어른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의식적으로 우리는 이런 어른이 되지 않으려 한다. 꿈을 잃고 싶지는 않고, 순수함을 잃고 싶지도 않다. 또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잊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어른이 되어 있다.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있다. 이미 과거를 지나 버린 어른.


  박은정 시집을 읽는데 '소녀'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소녀들이 명랑한 소녀들이 아니다. 무언가 어둡다. 꿈과 희망보다는 절망 쪽에 더 가까운 소녀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소녀들에게서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느낌을 받는다.


왜 그럴까? 어쩌면 이 각박한 세상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을 시인은 표현하고 있는지도.


많은 시들이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그럼에도 무언가 시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칙칙하고, 어두웠는데... 다음 시... '녹물의 편애' 


'녹물' 자체가 이미 부정적인 의미를 주고 있는데, 여기에 편애라니... 난청을 가진 아이로 시작하는데, 난청이란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는, 그렇다면 이 세상 소리가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다는 말. 


슬픔이 쉽게 편애된다는 말... 그렇게 소리가 음악이 되어야 하는데, 음악이 되지 못한 소리들, 녹이 슬어 혈관을 타고 흐르는 소리들이 아닌가.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랑을 해야 한다. 시인은 '무서워서 사랑을 한다'고 한다. 벼랑 끝에서도 사랑은 피어난다. 아니, 피어나야 한다. 


여전히 모르겠다. 이 시가 지닌 의미를... 그럼에도 무언가 마음을 울리고 있으니, 이렇게 쓰고 계속 볼 수밖에.


     녹물의 편애

                                           

난청을 가진 아이는 어른이 되자

울 때마다 녹물을 흘리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소리가 녹이 슬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동안


나는 불협의 감정을 사랑하고

나는 병력의 감정을 사랑합니다


정성을 들여 돌아갈 곳 없어

짐승처럼 제 팔을 물어뜯을 때에도

슬픔은 쉽게 편애됩니다


소리의 어디까지 들어가야 음악이 될까요


조금씩 밤을 넘어온 탄식으로

목단꽃 이불이 젖고 있습니다


공명되던 음들이

초록으로 물들 때까지 움츠리는

소리 속의 큰 소리들


나는 무서워서 자꾸 사랑을 합니다


여자가 귀를 두드리면

허공의 낮과 밤이 흩어집니다


검붉은 말들이 울음 없이

벼랑을 내달립니다


박은정,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문학동네. 2018년 1판 4쇄.100-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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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이 시집을 읽다가 '치매'란 말이 생각났을까? 치매, 기억을 잃는 질병이라고 해야 하나. 단순히 기억을 잃는 것을 넘어,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치매란 누구에게도 좋은 상태는 아니다.


  그런데 왜 시집을 읽으면서 치매? 시와 치매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텐데...


  이 시집에 어두운, 어려운 생활에 대한 내용이 많아서 그런가 하다가, 시집에서 시인이 이런 내용을 다룬 것은 '지금-여기'의 우리가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여기',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한국. 선진국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을 거쳐 왔을까? 그런 어려움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또한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기택의 가족들, 아니 기택의 가족들보다도 더 아래에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우리는 보이지 않게 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우리 눈에 보이는 순간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다. 그들에게는 일상이 '별일'인데, 그들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보이는 것이 '별일'이다. 즉, 그들이 '별일 없다'고 했을 때,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고려 대상이 아닌 것이다.


최근 언론에서는 많은 죽음들을 다뤘다. 죽음은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하지만, 죽음을 인식해야만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 죽음까지 가기 위해서 우리는 치열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신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니 자신의 삶이 '지금-여기'까지 오게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있었음을, 또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여기'의 삶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 최근 교사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서, 이게 바로 '사회적 치매' 아닌가 하는 생각. 그래서 이 시집을 읽으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그들을 잊고 살았던 우리 자신이 바로 '치매'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교육을 통해서 이만큼 왔는데, 최소한 자기 자식들을 가르치는 사람에 대한 예의는 잊어서는 안 되는데, 교사들을 마치 자신들의 종처럼( 당연히 누구에게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자신들이 누군가의 노동으로, 그것이 감정이든 육체든, 편히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하는데, 그것을 잊고 있으니 이를 사회적 치매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고 있으니...


어려운 시절에도 교사들을 대우했던 과거를 까맣게 잊고, 버리고 지내는 지금이 과연 치매가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자신들이 무시하는 사람으로부터 자식들이 무언가를 배울 수가 있나? 배움이 없는 학교가 되어 버리게 만든 사람들...


학교만 그런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 간신히 이룬 형식적 민주주의마저도 껍데기만 남기고 다 잃고 있는 지금 아닌가? 과거를 지우듯이, 그냥 과거만 잊는 것이 아니라, 더욱 광포한 행위들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으니, '사회적 치매'라고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에게는 '별일 없는' 상태이겠으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별일인' 상태가 바로 지금 아닌가 하는 생각.


이렇게 과거를 잊으면서 어떻게 '별일 없이' 살 수 있겠는지... '별일 없이' 살기 위해... 시집을 읽는다.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내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점자 숲 오목눈이 교실3


 아함경 읽는다 가시 손으로

 모래사막 낙타가시풀의 고독을 읽는다

 하루가 무섭다 어두워지는 눈이 무섭다

 의사의 만류에도 삶의 낙이 이것뿐이라고

 어머니 철필로 점자 불경 닥종이에 옮겨 새기신다

 해진 열 손톱 끝에 봉선화 꽃물 번져 간다

 시치미 떼고, 연옥을 찾아가는 단테같이

 주문을 하얀 닥종이에 새긴다

 어디선가 찌르르 스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

 잘 알아보면, 점자별과 통신을 하는 소리...

 제 심장에다 나이테를 나무들이 새기듯이

 더듬더듬 감은 눈으로 무얼 쓰고 싶은 것인가

 오늘 만나도 내일은 알 수 없는 내 마음이

 답답한 마스크 끼고 앉아서 철필로 만다라 새긴다

 결국 시작과 끝이 만나서 바람에 털리고야 말

 모래 만다라처럼, 빈손은 백지로 돌아온다

 그래도 자꾸 점자별이 되고 싶어

 만다라 속을 수놓는

 오롯한 점자의 시간

 

송유미, 점자 편지. 실천문학사. 2023년.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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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험악한 말들이 나돌아 다니는 이 시대. 겉으로 드러난 말들이 이리도 험악한데, 말 속에 들어 있는 의미는 얼마나 무시무시할까.


  최근에 '사형'이란 말을 많이도 들었다.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들... 사형에 처해도 마땅한 존재. 과연 사형에 처해도 마땅한 존재가 있을까?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에서 한때 판사였다는 사람이 사형 운운하는 장면을 보는 일은 참 불편하다.


  특히 사법살인이라고, 나중에 무죄가 된 판결로 사형을 당한 사람들이 있는 이 나라에서, 자신이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같은 판사 출신이라면 그러한 판결에 대해서

끄러워하고, 또 '사형제'에 대해서는 많은 성찰을 했어야 하는데...


이 일에 대해서는 역사책도 좋지만 김원일이 쓴 소설 [푸른 혼]을 읽으면 더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다.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아니 '사형'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조정인 시집을 읽다가 말이 아닌 침묵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또는 말과 말 사이에 얼마나 깊은 심연이 있는지, 그래서 말 속에 들어 있는 무한한 함의를 파악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생각하게 됐다.


많은 시들이 있는데, 두 시를 연결지어, 지금 시국을 씁쓸하게 여기에 되었는데...


그 두 시는 '문신'이라는 시와 '말들의 크레바스'라는 시다.


              문신


     고양이와 할머니가 살았다


     고양이를 먼저 보내고 할머니는 5년을 

     더 살았다


     나무식탁 다리 하나에

     고양이는 셀 수 없는 발톱자국을 두고 갔다

     발톱이 그린 무늬의 중심부는 거칠게 패었다


     말해질 수 없는 비문으로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는 했다


     하느님은 묵묵히 할머니의 남은 5년을 위해

     그곳에 당신의 형상을 새겼던 거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기에


     고양이를 보내고 할머니는 하느님과 살았던 거다

     독거, 아니었다


     식탁은 제 몸에 새겨진 문신을

     늘 고마워했다


     식탁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었다


조정인, 장미의 내용, 창비. 2011년 초판 2쇄. 24-25쪽.


함께 함... 여기에는 살벌한 말은 없다. 살벌하게 느껴질, 식탁 다리의 자국들, 그것은 말로 표현되지 않은 말들이다. '말해질 수 없는 비문'이라고 했지만,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쓰다듬는 것이다. 고양이가 남긴 자국, 그것은 홀로 된 할머니로 하여금 고양이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라고 하는 말은 여기서 통한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될 때는 바로 고독할 때다. 사람이 철저하게 혼자 되었을 때, 그 때 비로소 하느님을 의식하게 된다. 할머니가 고양이가 떠난 뒤 고양이가 남긴 흔적과 함께 살게 되듯이. 그러므로 식탁은 할머니의 고독한 식사, 요즘 말로 '혼밥'이 아닌 함께 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 존재가 된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식탁은 함께 한다. 자극적인 말을 할 필요가 없다.섣부른 위안의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그냥 그렇게 자신의 존재로 함께 할 뿐이다. 그러니 고독과 하느님과 침묵은 모두 홀로 됨으로써 비로소 함께 함을 깨닫게 될 때 하나가 된다.


이렇게 말이 아닌 말들을 통해 함께 함을 깨닫는다면, 말을 통해서는 어떨까? 표면에 드러난 말만이 아니라 감추어진, 말해지지 않은 말들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너무도 험악한 말들을 '크레바스'에 떨어뜨려버려야 하지 않을까. 두 시가 통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말'을 통해서 어떤 말들이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말들의 크레바스


말의 수면 아래에는 극지와 극지를 잇는 레일이 있다


말과 말이 어긋나 레일이 끊긴 날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쓸쓸하니? 우심실이 물어왔다 괜찮아, 먹먹한 좌심실이 대답했다

혀끝으로 싸락눈이 몰려 왔다 말과 말 사이 헛발 디딘 날


바람이 낸 길, 크레바스 깊은 골은 만년설의 마음이며 봉인된 입

마음이 밀리고 밀린 단애 밑으로 사랑해, 짧은 말마디가 뛰어내리면 뒤이어

쩌렁쩌렁 설산이 무너진다 누구에겐들 극지를 뒤흔드는

설원의 고함소리를 듣는 밤이 없었겠니?


해일을 일으키며 시작된 안개 무리가 해협을 건너고 초원을 건너

당신께 이르기까지 말은 자주 지워져 띄엄띄엄 새소리에 묻어 흩어지다가

길에 떨어진 단추나 깨진 접시, 돌멩이 따위에 가만히 엎드리기도 하는데


멀고 쓸쓸한 극지에서 태어난, 그보다 훨씬 먼 행성에서 날아온 씨앗에서 움튼

사랑해,라는 말에는 얼마나 자주 마음이 다녀가는지


당신과 내가 투숙하는 이쪽과 저쪽, 극지와 극지 사이 아득하게 레일이 놓였고

하루치 쓸쓸한 바람을 적재한 그날의 화물열차가 협곡을 지나간다


조정인, 장미의 내용, 창비. 2011년 초판 2쇄. 114-115쪽


'당신께 이르기까지 말은 자주 지워져 띄엄띄엄 새소리에 묻어 흩어지다가 / 길에 떨어진 단추나 깨진 접시, 돌멩이 따위에 가만히 엎드리기도 하는데'라는 구절에서 아, 앞에 나온 '문신'이라는 시에 나온 고양이 자국들을 이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즉 말이 엎드려 있는 그런 상태. 그러니 결국 식탁 다리에 있는 자국은 '사랑해'라는 말에 다름이 아니고, 이 '사랑해'라는 말이 고독한 상태에서 침묵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크레바스에 빠진 말이 아니라, 크레바스에 빠지지 않고 다른 존재에 깃들여 우리에게 날아온 '사랑해'라는 말이라는 것. 그런데, 이런 말들이 아니라, 지금 우리는 크레바스에 빠진 말들, 아니 우리를 크레바스에 빠뜨리는 말들을 만나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해질 뿐.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이 한 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 말의 중요성이 나온다. 말이 얼마나 우리 마음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 반대로 말이 우리 마음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지... 그러니 말을 통해서 우리를 크레바스에 빠뜨릴 수도 있고, 하느님과 만나게 할 수도 있다.


자, 당신은 어떤 말을 쓰겠는가? 어떤 말들을 상대에게 보내겠는가? 이 두 시를 읽으며 생각해 보자. 이 질문을 최근에 자주 언론에 나오는 분에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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